24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by 별지킴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약을 너무 빨리 줄였던 탓일까. 약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생각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약 효과가 종일 지속되지는 않았다. 나는 약을 빨리 끊어보려고 힘들어도 참다가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약을 먹었다. 그리 한 것이 우울증을 겪는 내내 불필요한 고통을 겪게 된 원인이 아닌가 싶다.

성경 시편 23편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구절이 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두 텍스트는 그리스도인들이 삶에서 겪게 되는 극심한 고통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비유로 표현한다. 내게는 2003년부터 시작된 우울증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다. 다윗이나 크리스천과는 달리, 나는 그 기간 내내 해를 두려워했고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지 못했다. 나는 그 시기를 견뎌내지도 이겨내지도 극복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버텨낸 것조차 아니었다. 내가 한 것은 그저 그 골짜기를 통과한 것이었다. 죽지 않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 통과하게 되었다. 내게는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

나는 지난 내 삶을 돌아봤다. 그 이전에는 우울증이 없었을까. 되돌아보니 대학에 입학할 때도, 대학을 졸업할 때도, 러시아에 갔을 때도, 결혼했을 때도 나는 우울증을 겪은 게 분명했다. 인생의 큰 전환점에 서거나 상실을 경험할 때, 좌절을 겪을 때 나는 늘 우울증에 걸렸었다. 그것도 3년에서 5년 정도 주기적으로. 아버지의 알콜 중독이 심해진 주기와 거의 일치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내 몸이 기억하는 그 주기를 우울증으로 반복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그때는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텨냈는지 신기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아무리 우울하고 힘들어도 일상생활을 어떻게든 꾸려나갔다는 점이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공부하고 책을 읽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모든 일상이 무너졌다. 치료를 받기 전 먹고 자고 걷고 숨 쉬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약을 먹기 시작한 후 기본적인 일상은 회복되었다. 그러나 삼 년 동안 나는 공부를 할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우울증이 회복되고 나서 나는 숨 쉬고 먹고 자고 뛰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됐다.

나는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이었다. 내 인생은 끝났다. 대학 입학 후에도, 졸업 후에도, 러시아에 가서도 이제 내 인생은 끝이라고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나는 하던 공부를 여전히 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그 긴긴 하루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막막했다. 책과 공부가 내 삶에서 사라지자 시간의 여백이 사막처럼 넓게 펼쳐졌다. 사람들을 만나러 돌아다녔다. 6년의 공백이 있었으니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다. 영주에 사는 사촌

언니 집도 다녀오고 친척들을 만나러 한 바퀴 돌았다. 그런 내 모습이 꼭 일 년에 한 번씩 집을 비우고 친척들을 찾아다니는 아버지를 닮아 보였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결과가 이거란 말인가. 러시아에서 그 무서운 시기를 겪어가며 견딘 대가가 이거라고. 그립던 고국에 돌아와 그 푸근한 품에도 안겨보지 못하고 이게 뭐란 말인가. 나는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보다 더한 외로움을 느꼈다. 고국에서 나는 외국인 같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한국은 변해 있었고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배우 김정은이 하는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문구를 들었다. 그 문구가 외계인의 소리같이 생경하고 기이하게 들렸다. 혁명기의 시인 에세닌은 혁명으로 변화된 고국의 현실에서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결국 페테르부르크 이삭 대 성당이 내다보이는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혁명 후 유럽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던 천재적인 여성 시인 츠베타예바 역시 고국에서 유럽에서보다 더한 고독을 맛보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했다. 그들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그들과 달리 내가 자살 충동을 느끼지 않았던 건 순전히 죽음의 공포 때문이었다.

죽음의 두려움과 죽고 싶다는 생각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었다. 매일 근거 없는 죽음의 공포를 맛보면서도 동시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나는 죽음의 문제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찾아올 죽음이 가공스러울 정도로 두려웠다. 이미 러시아에서 시작된 공포가 이제는 내 속에 깊이 둥지를 틀고 잠시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왜 이렇게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인 걸까,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겪는 고통일까, 죽음 후에 있을 사후의 세계에 대한 불안일까. 명료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은 복잡하게 뒤엉켜진 회로처럼 늘 혼란스러웠다. 뚜렷한 원인도, 해결책도 찾지 못한 채 죽음의 주변을 뱅뱅 돌았다. 톨스토이가 『참회록』에서, 소설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 유명한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집요하게 죽음의 문제를 파고들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위대한 대작가가 풀지 못하여 죽을 때까지 고민했던 문제라면 나 같은 사람이 쉽게 풀 수 없는 문제인 건 당연했다.

우울증이 낫고 나서도 죽음의 문제는 근 이십 년 나를 따라다녔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나에게는 멸절 불안이 있다. 아마도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난동을 부리면 어린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에 갑작스럽게 어머니를 잃은 상처가 내게 작용했을 것이다. 내게 죽음은 폭력과 동의어였다. 그저 자다가 조용히 죽는 죽음이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는 폭력이 없으니까. 그러나 사고나 살해, 병으로 인한 죽음에는 반드시 폭력적인 요소가 있었다. 사람은 그렇게는 죽고 싶지 않은데 죽어야 하는 현실을 강제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죽음은 인간에게 불가항력으로 덮쳐오는 폭력이고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비웃는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항거하는 인간을 경탄하고 존경했다. 그들만큼은 죽음보다 인간이 강하다는 걸 증명하는 이들이었다. 죽음은 인간을 가장 나약하게 만들고 비굴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존엄사를 지지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죽을 수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부여해주길 원한다.

죽어야만 하는 인간의 유한성 앞에서 신에게 굴복했던 나는 아직도 죽음을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기독교는 죽음을 결코 부정적인 것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죽음은 단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문턱에 지나지 않을 뿐, 이 세상의 수고를 다 마친 사람은 기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태도를 습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끄러웠고 남들에게 드러내기가 힘들었다. 이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죽음이 그렇게까지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조금씩 깨닫게 됐다. 그 시작은 아버지의 죽음이었지만 갱년기에 극도의 쇠약함을 경험하면서, 나는 죽음이 나를 이 육체의 고통에서 해방해 줄 수 있는 고마운 친구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막상 죽음의 순간이 닥치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전처럼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벌벌 떨며 살지는 않는다. 어떤 논리적인 해결이 아니라 삶의 경험과 고통의 시간이 벌어다 준 고마운 깨달음이다. 이제는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를 날마다 고민하며 살고 있다. 모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익숙해진 내 삶의 방식이다.

2003년에는 그해 말이 되면 나아질까 기대했다. 해를 넘겨도 우울증이 계속되자 나는 이제는 병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에 낙담했다.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렸을 때 무엇이 힘드냐고 종종 묻곤 한다. 여러 가지가 있다. 죽음의 공포와 죽고 싶은 마음 외에도 극도의 외로움을 겪는다. 내겐 익히 익숙한 외로움이었지만 더 깊고 처절한 외로움이었다. 날마다 한강 공원에 나가면 사람들이 짜장면을 시켜서 먹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와 함께 음식을 시켜서 먹을 날이 올까. 러시아에서 지내는 동안 단절된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사람들을 만나도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철저한 고립 속에서 나는 마치 수족관 안에 들어있는 물고기 같았다. 수족관 밖의 사람들은 서로 어울리며 소통하고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 수족관 안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보았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고통도 있었다. 사람들은 의지니 믿음이니 하는 말을 했다. 내 주변에 우울증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이야 너무 흔한 질병이 되었지만 이십 년 전만 해도 우울증에 대한 이해가 빈약했다.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충고와 조언들이 다 부질없었다. 할 수 있는 힘도 없었고 해본 들 효과가 없었다. 나는 이해받고 싶었다. 공감의 언어가 절실했다. “네 맘 알아. 얼마나 힘드니?” 그런 말이 듣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단순한 처방을 내렸다. 낙관주의로 나를 단숨에 우울에서 끌어올리려 했다. 우울증이 ‘마음의 감기’라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감기로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사람들은 몰랐다.

무엇보다 힘든 건 도대체 왜 우울증이 왔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버지의 건강에 대한 불안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원인이 해소되었는데도 우울증은 지속됐다. 뭔가 다른 더 깊은 원인이 있는 것 같았다. 이유라도 알면 좀 낫겠는데 병이 온 이유를 모르니 답답해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앞으로 이런 삶 아닌 삶이 계속되리라는 예상,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자꾸 나를 덮쳐왔다. 길고 긴 터널이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터널. 사람들은 이 터널이 반드시 끝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희망을 줬다. 나는 아무것도 없어도 좋으니 어서 이 터널이 끝나기만을 염원했다. 과연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신앙은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그래도 하나님이 있다는 믿음은 있었지만, 그 하나님은 내 삶에서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다. 성경을 읽지도, 기도하지도, 찬양을 부르지도 못했다. 믿는 이들과의 교제도 단절되었고 예배에 참석해도 자리만 채울 뿐이었다. 봉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믿음의 이름으로 행했던 모든 행위가 멈춰 섰다. 어떻게 하나님은 나를 이토록 비참하게 내버려 두실 수가 있을까. 완전한 하나님의 부재. 흔히들 말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걸 내가 통과하고 있는 것일까. 이 밤이 지나면 아침이 밝아오기는 할까. 영영 밤에 갇혀 그대로 끝나고 마는 건 아닐까. 소스라치게 무서웠다.


자기 삶을 찾아서


2004년에 동생들의 삶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96년부터 LG전자에서 근무했던 큰동생은 미국 지사로 발령받았다. 동생에게도 언젠가는 해외에 나갈 기회가 올 것이라 여겼다. 내가 귀국하자 바톤 터치라도 하듯 동생이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그동안 아버지 문제로 가정 중심으로 살아보지 못한 동생 부부가 안쓰러웠다. 훌훌 가족사에서 벗어나 미국에서 오붓하게 가족끼리만 홀가분하게 지내기를 바랐다. 조카 예영을 몇 년 동안 못 보게 되어 아쉬웠다. 그래도 조카에게 어린 시절 미국 생활이 귀한 추억과 자산이 될 것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동생 가족을 보냈다. 미국에 가서도 동생은 매달 아버지 병원비 일부를 꼬박꼬박 보내왔다. 나는 러시아에서 6년 반, 미국에서 5년, 총 십여 년 동안 진의 가족을 보지 못하고 지낸 셈이었다.

늦깎이 졸업을 한 막내는 활동을 넓혀가며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이제 삼십 대 중반이 된 동생의 결혼이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활동 중에 만난 아가씨와 사귀고 있다고 했다. 큰동생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 그 아가씨와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아버지는 빠졌지만 온 가족이 함께 한 시간이었다. 유일한 아이 예영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 사이를 돌아다녔다. 누가 삼촌이고 누가 고모이고 고모부인지 어른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처음 보는 삼촌의 애인에게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샐쭉하니 조금 떨어져서 관찰했다. 그 모습이 앙증맞고 귀여웠다.

얼마 후 동생은 그 아가씨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일사천리로 상견례와 결혼식이 이어졌다. 12월 초 하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결혼식 날 비가 오면 잘 산다는 말이 있다고 오히려 좋은 징조라 했다. 나와 큰동생의 결혼식에서는 어머니 자리에 외숙모가 앉으셨다. 그런데 막내는 내게 그 자리에 앉아달라고 부탁했다. 고작 네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누나지만 동생에게는 내가 어머니를 대신하는 존재였나 보다. 나는 기꺼이 그 역할을 수락했다. 동대문 시장에 가서 파란 색감의 한복을 빌렸다. 올케의 어머니와 함께 초에 불을 밝히고 아버지 옆에 앉았다. 결혼식을 지켜보는 내내 뭉클했다. 어머니가 이 자리에 계시면 어땠을까. 이제 세 자녀가 다 결혼하여 어른이 되었는데 어머니는 보고 계신 건가요.

드디어 우리 삼 남매는 각자 가정을 꾸리고 서로에게서 분리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는 때때로 함께 만나는 시간이 그리 행복했다. 특히 결혼 초기 아이가 없을 때 우리 부부와 막내 남동생 부부는 서로 자주 만났다. 생일을 축하하기도 하고 별일 없이 만나기도 했다. 2007년에 동생의 가정에 두 번째 조카 가영이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신생아 때부터 보아온 가영의 존재는 내게 감동 그 자체였다. 한, 두 살 때까지는 나를 빤히 응시하던 가영이가 세 살 무렵부터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 “꼬모, 꼬모.”하며 내게 처음부터 반발을 쓰던 가영은 지금도 존댓말 쓰기를 거부한다. 입양해 딸이 생기기까지 조카들은 내 삶의 윤활유였다. 살아있음의 기쁨을 문득문득 느끼게 하는 마법 같은 존재였다.


2005년이 되자 남편은 더 이상 주말부부로 생활하지 못하겠다며 집에서 출퇴근을 시도했다. 6개월 동안 출퇴근한 결과 한 달에 교통비 지출이 생활비의 3분의 1 수준이 되었다. 결국 나는 대전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대전은 평택과 서울 다음으로 내 인생에서 새로운 정착지가 되었다. 여름에 둔산동의 수정아파트에 전세를 구해 이사했다. 수정아파트는 내 어머니 이름과 같았다. 살고 있는 아파트 명칭에서 어머니 이름을 매일 확인하는 게 신기했다.

당시 나의 우울증은 많이 호전된 상태였다. 우울증의 회복 사이클을 그래프로 그려보자면, 한동안 변화가 없다가 어느 지점에서 약간의 도약을 보이고 또 한동안 변화가 없다가 도약을 보이는 식으로 그려질 것이다. 약 외에 가장 도움이 된 것은 일이었다. 강의하면서 아주 천천히 생기가 돌아왔다. 강의하는 동안 어떤 학생도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열정적으로 강의한다는 평을 받았다. 중간에 강의가 끊어진 적이 있었다. 그럴 때는 다시 우울감이 심해졌다. 어떤 일이라도 사람들 틈에서 하고 싶었다. 나는 저녁에 역 근처에서 가판대를 벌이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전에는 생계 때문에 아등바등 살아가는 그들이 안쓰러워 보였다. 이제는 그들의 몸놀림과 외침이 팔팔 뛰는 생선처럼 생동감 있어 보였다. 어떤 일이든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고 정직하게 일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나도 언젠가 다시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게 될까.

일 외에 도움이 된 것은 여행이었다. 우리 부부는 주말에 기차로 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봄에는 산수유와 벚꽃, 매화를 보러 지리산 주변으로, 여름이면 산과 바다가 있는 강원도로, 가을이면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 자락으로, 겨울이면 따뜻한 남도나 겨울 바다를 보러 동해안으로 떠났다. 아직 해외여행을 갈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러시아에 가기 전에 국내 여행을 거의 해보지 못했던 우리는 아이가 없는 자유로움을 맘껏 누렸다. 비행기를 타야 하는 제주도나 배를 타야 하는 섬 빼고는 어디든 갔다. 여행할 때만큼은 우울증이고 뭐고 다 잊고 즐거운 기분에 들떴다. 외향적인 성격 덕분에 어디 가나 사람들이 있으면 우울감이 잠시나마 자리를 비켜주는 듯했다. 자연은 치유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나무들이 뿜어내는 향내를 맡고 멀리 산봉우리 뒤에 또 산봉우리가 솟아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잠시나마 마음에 평화가 찾아 들었다.

내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은 매주 어김없이 규칙적으로 전화를 걸어주었던 친구 지연과 대화 선배였다. 그 두 사람은 일주일 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나는 두서없이 떠오르는 대로 나의 감정 상태를 일기에 적듯이 그들에게 들려줬다. 두 사람은 나의 회복을 재촉하지도, 내 상태에 한숨을 짓지도 않았다. 그저 있는 내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들어주었다. 우울증 환자를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고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 준 위안은 컸다. 나는 우울증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지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어디에서 도움이 될 인연을 만날지 누가 알겠는가. 불가항력으로 내게 닥쳐온 우울증에 대해 내가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적어도 숨기거나 창피해할 일은 아니었다.

남편은 공감 능력에 있어서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래서 내 우울증의 회복에 남편의 기여가 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곁에 있어 준 것만으로, 나 때문에 힘들어하고 지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남편은 일등 공신이라 할 만했다. 어쩌면 공감 능력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주위 사람들은 남편의 인내에 혀를 내두르고 최고의 남편감이라는 후광을 씌워줬다. 나는 극도로 우울해질 때면 남편에게 “나를 버리지 말라”고 호소했다. 이 정도로 우울해하는 아내라면 버림받아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2005년이 다 지나가도록 우울증에서 벗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삼 년이 다 되어도 낫지 않는 우울증을 평생 품고 갈 각오를 했다. ‘그래, 벗어날 수 없다면 받아들이자. 우울증과 같이 사는 거지, 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2006년을 맞이했다. 그런데 기적처럼 2006년은 내게 회복의 해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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