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면회가는 길

by 별지킴이

6장 이별

아버지는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와 이별할 때가 다가왔다. 나는 아버지를 수용하고 비로소 아버지에게 헌신할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잘한 일 중 하나는 아버지를 버리지 않은 것이었다.

면회 가는 길

민들레 병원은 주변에 아무 건물이 없는 산 아랫자락 호젓한 장소에 있었다. 정문을 통과하면 병원 마당이 나왔고 정면으로 병원 건물이 보였다. 나무와 꽃들을 가꾼 흔적이 보였다. 오른쪽으로 면회실을 겸한 식당 같은 건물이 있었는데, 평소에 식사하는 곳은 아니었다. 면회객들이 오면 그곳에서 챙겨온 음식을 먹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면회실 안에서는 간단한 음료수나 과자를 팔기도 해서 나는 면회를 갈 때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사 가지 않았다. 대전에서 파주까지 뭔가를 사 들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전역에서 서울역까지 기차, 서울역에서 금촌역까지 다시 경의선 기차를 타야 했고 금촌역에서 병원까지 차량으로 이동하는 긴 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토요일 아침에 출발하면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면회 신청을 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십 분쯤 후에 간호사와 함께 아버지가 면회실로 들어섰다. 흰 바탕에 파란색 잔무늬가 있는 환자복은 아버지의 마른 몸을 감싸기에는 헐렁했다. 입원한 후로는 볼록 나왔던 뱃살도 다 빠지고 운동이 부족해서인지 허벅지와 종아리가 유독 가늘어졌다. 우리는 늘 면회실 앞쪽에 놓인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어떻게 지내요, 아버지?”

“별일 없어.”

“심심하진 않으세요?”

“심심하진 않아.”

아버지는 나와 대화할 때도 주변에 누가 있는지 연신 두리번거리곤 했다. 아는 환자라도 있으면 아는 체를 했다.

“내 딸이야. 러시아 유학 갔다 왔어.”

동생들이 오기라도 하면 영락없이 “내 아들이야. 서울대 나왔어.”라며 자랑을 빼놓지 않았다. “어이구, 자식 잘 두셨네.” 그 소리를 들으면 아버지 얼굴에 득의만면한 미소가 번졌다. 그 맛에라도 지내시라고 만류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폐쇄병동에 있었기 때문에 병원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직접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 말을 통해서만 대충 짐작할 뿐이었다. 한 방에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함께 생활하고 매일 프로그램을 해서 시간은 잘 간다고 했다. 아버지는 매번 사탕과 콜라를 사 달라고 했다.

“아버지, 이런 거 드시면 이빨 상해요. 다른 거 드세요.”

“난 이게 좋아.”

아버지는 골초였던 탓인지 유난히 단것을 좋아했다. 면회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사탕과 건빵을 몇 봉지나 사 달라고 했다.
“내가 저번에 다른 사람한테 얻어먹어서 이번에는 내가 살 차례야. 얻어먹기만 할 수는 없잖냐.”

맞는 말이었지만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오래전에 해 넣은 틀니가 자꾸만 빠지고 검어지는 게 단 음식을 많이 먹은 탓인 것 같았다.

“아버지,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가족이 면회와요?”

“연고가 없어서 여기서 계속 사는 사람들도 있어. 불쌍해.”

“아버지는 자식들이 면회 와 좋아요?”

“좋지, 그럼. 언제 오나 그거만 기다리는데...”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병원의 일상이나 다른 사람들과 지내는 얘기는 화젯거리가 되지 못했다. 말없이 그저 앉아있는 시간이 면회 시간의 절반을 채웠다. 간호사가 아버지를 데리러 오면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서운하고...” 이 말을 대사처럼 되풀이했다. “다음 달에 또 올게요, 아버지. 잘 지내셔요.”

“그래.”

아버지는 사탕과 건빵이 든 검은 비닐봉지를 소중히 들고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뒤로 돌아 병동으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등이 구부정해 있었다.

가영이가 세 살쯤 되었을 무렵 어버이날에 동생 가족과 함께 면회했다. 가영이는 어린이집에서 카네이션을 만들었다며 할아버지에게 드리겠다고 가져왔다. 꼬물꼬물한 작은 손으로 만든 카네이션이 제법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와, 할아버지 보시면 좋아하시겠는걸. 우리 가영이 최고!”

칭찬받은 가영은 으쓱해져서 병원 마당에 있는 나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뛰었다. 아버지가 나오시고 가영이가 만든 카네이션을 달아드렸다. 손녀에게 받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 카네이션이었다.

“아버지, 카네이션 오늘 하루 종일 달고 계세요.”

“그럼 그래야지.”

중독으로 허망하게 날려버린 세월이 야속했지만, 대를 이어 아버지의 자손이 자라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아버지의 삶이 전혀 헛된 것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날 우리는 아버지를 모시고 근처 파주 영어마을과 헤이리마을을 들렀다. 아버지는 병원 밖으로 나와 기분이 들떴다. 그런 시간을 좀 더 많이 가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민들레 병원에 환자가 꽉 찼다며 아버지를 인천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도 되겠느냐고 연락이 왔다. 인천 병원은 폐쇄병동이 아니라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제는 대전에서 서울역으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전철로 동암역까지 가서 마을버스를 타고 병원까지 가는 길이었다. 파주까지 걸리는 시간은 비슷했다. 병원은 도로변에 있는 빌딩이었고, 한 층 전체에 노인들만 지내고 있었다. 큰 방 몇 개에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이 나누어 방을 썼는데 각자 병실 침대를 사용했다. 큰 거실이 있어 그곳에서 대화도 나누고 바둑을 두기도 했다. 아버지가 생활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게 좋았다. 그곳에는 매점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드시고 싶을 만한 음료수나 과자 등을 사 갔다.

인천 병원에는 민들레 병원보다 힘센 남자 간호사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가끔 지나가는 한 남자 간호사를 보고 욕을 해댔다.

“저놈이 나를 침대에 묶었어. 나쁜 놈이야, 아주.”

그 간호사는 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줬다. 가끔 난폭해지는 아버지를 저지하기 위해 침대에 손발을 잠시 묶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래도 아주 꽉 묶는 건 아니에요. 금방 풀어드려요.”

“네에...”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항의를 할 수 없었다. 병원을 믿는 수밖에, 그리고 아버지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거실에는 노래방 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자주 모여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아버지에게는 그나마 즐거운 시간일 터였다. 하루는 병원에 들어서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거실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잠시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노래를 불러야 한다며 거실로 나갔다.

“여기 있어라. 나 노래 부르는 거 들어.”

“네.”

나는 거실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 사람씩 나와 마이크를 잡고 반주에 맞춰 옛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간호사들과 내가 청중이었다. 열심히 박수치고 환호를 보내기도 했다. 아버지 차례가 되었다. “울고 넘는 박달재” 아버지 십 팔 번이었다. 아버지는 소리를 꺾어가며 제법 구수하게 노래를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반주보다 한 박자 빠르게 노래를 부르며 끝까지 박자를 맞추지 못했다. 그래도 열심히 부르는 아버지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마이크를 잡았으니 한 곡으로 끝낼 수 없다는 듯 연달아 몇 곡을 불러제꼈다. 다른 할아버지들의 항의를 받고서야 제 자리로 돌아왔다. 노래방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아버지에게 손을 흔들고 병실을 나섰다. 아버지도 그날은 손만 번쩍 들어 흔들 뿐 나를 따라 나오지 않았다.

2008년에 아버지 성화에 못 이겨 한 번 더 집에 모셔 온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아는 친척들 집에 다 전화를 돌렸다. 아버지가 다녀갔다는 말은 하는데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버지 소재를 파악하지 못한 채 일주일이 흘렀다. 일주일 후 홀연히 아버지가 집에 나타났는데, 그 몰골이라니! 입고 나간 옷은 흙과 먼지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머리칼은 다 헝클어지고 얼굴은 새까매져 있었다. 아버지의 바지 주머니는 구겨진 천원, 만원 지폐로 불룩해져 있었다. 하루는 비가 오는 날에 아버지가 밖에 나갔다. 누군가 벨을 눌러 나가보니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아버지를 부축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가 길에 쓰러져 계셨어요.”

“이런 고마울 데가. 정말 고맙다, 얘야.”

“아니에요.”

아이는 쑥스러워하며 발길을 돌렸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여 빗길에 쓰러져 옷과 얼굴에 진흙이 잔뜩 묻어있었다. 며칠 후 아버지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다시는 아버지를 퇴원시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병원 밖에 있다가는 아버지가 길에서 돌아가실 수도 있었다. 민들레 병원에 다시 자리가 났다고 해서 인천에서 다시 파주로 옮겼다.

마침내 풀린 비밀

내가 코아라는 사실과 중독이 중독자뿐 아니라 그 가족에게도 장기적이고 파괴적인 심오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나는 어쩌면 평생 갈 수도 있는 긴 치유의 길로 들어섰다.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았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신분석을 비롯한 상담도 받아보았다. 꾸준히 치유에 관련된 책도 읽었다. 2009년에 생명나무 치유 사역이라는 것을 접하게 됐다. 일주일에 한 번 강의를 듣고 나눔을 하고 기도하며 상처를 드러내고 치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애도하지 않은 상실의 아픔과 혼자 남겨지는 데 대한 가공할만한 공포, 동반 의존, 과도한 성취욕, 파국적인 사고 등 치유해야 할 상처 목록에 압도되었다. 몇 년간 이어진 치유 과정을 통해 치유란 극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대부분 매우 느리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배웠다. 치유에 있어서 애도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는데 애도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이 글을 쓰는 것도 애도 작업의 일환이다.

2010년 러시아의 트베리라는 작은 도시에서 대전으로 와 살고 있는 이야라는 고려인 여성을 만났다. 신앙심이 깊었던 이야는 친구를 통해 한국 남자를 소개받아 결혼했다. 그녀의 남편은 과거 환각과 환촉까지 경험했을 정도로 지독한 알콜 중독자였다. 그는 살기 위해 대전에 있는 라파라는 중독자 공동체를 스스로 찾아갔다. 피나는 노력 끝에 중독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그 후 건실한 생활인이 된 그는 이야와 결혼해 딸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나는 이야에게서 그녀의 남편과 라파 공동체에 대해 듣고 흥분했다. “중독자가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구나. 그런 공동체가 다 있었다니!” 당장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라파 공동체는 당시 보문산 아래 자리하고 있었다. 교회와 공동체가 함께 운영되고 있었다. 도로에서 구불구불하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지막으로 계단이 나왔다. 그 계단을 올라가면 작은 문이 나타났고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담한 라파 공동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마당 왼쪽으로 교회 건물이 있었고 오른쪽으로 중독자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있었다. 생활공간은 직접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얼핏 보아도 아주 작은 방이 몇 개 이어져 있었다.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소박한 공간이었다. 공동체가 세워진 지는 벌써 십 년이 넘었다. 그동안 무수한 중독자들이 공동체를 거쳐 갔는데 목사님은 열 명 중 두 명 정도가 중독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나는 경이로웠다. 중독은 치료할 수 없고 오로지 격리만 가능하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여지없이 깨졌다. 중독에서 회복되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니. 꿈이요 기적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공동체에서 일주일에 몇 번 교육이 진행되었다. 나도 중독자의 자녀라는 자격으로 매주 한 번씩 교육에 참석할 수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병원 밖에서 중독자들을 만났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처음이었다. 중독자들이 그렇게 말을 잘하고, 자신의 상태를 그렇게 잘 알고 있고, 중독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깊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중독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들의 갈망은 처절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 아버지도 젊었을 때 저랬을까. 아버지도 저렇게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가망 없는 인생으로 보였던 중독자가 노력하기에 따라서 회복될 수 있는 망가진 보석 같은 존재라는 인식에 처음 눈을 떴다. 술을 먹지 않을 때 그들은 너그러웠고 유머 감각이 풍부했으며 인간다웠다. 나는 그들 사이에 끼어 마냥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만 싶었다. 무용담처럼 펼쳐지는 중독의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새롭고 다채로웠고 슬펐다.

라파 공동체를 알고부터 오랫동안 내 안에 잠재된 물음이 되살아났다. 도대체 아버지는 왜 중독자가 된 것일까. 공동체 안에서 중독자들은 그들이 중독에 빠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알고자 교육받고 자신을 성찰하고 있었다. 그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 회복에 결정적이었다. 자신에 대해 알아가고 중독의 원인을 찾아내고 회복의 여정을 걷고 있는 그들이 아버지의 모습과 겹치면서 그리 부러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도 젊었을 때 이곳에 오셨다면 회복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물음을 할수록 가슴이 진하게 아려왔다.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평생을 중독의 노예로 살아온 아버지가 가여웠다. 누군가 아버지를 제대로 도와주었더라면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제는 너무 늦어버려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한번 아버지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버지의 중독의 원인만큼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아버지를 면회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잠시 나누다 나는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 아버지는 왜 그렇게 술을 드셨어요?”

“세상이 내 맘대로 안돼서 마셨지.”

“세상이 내 맘대로 안된다고 다 술 마시나? 혹시 아버지 어렸을 때 무슨 가슴 아픈 일 있었어요?”

다른 때 같으면 “그런 거 없었다.”고 했을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갑자기 아버지가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아버지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전쟁이 나서 이북에서 아버지, 어머니, 형하고 나, 그리고 동생이 피난을 떠났어.”

“어, 동생이 있었어요? 큰아버지만 계셨던 거 아니에요?”

아버지의 동생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있었지. 내가 열세 살이고 동생은 다섯 살이었어. 피난 오고 나서 여름에 동생하고

강에서 헤엄을 치고 놀았어. 그런데 동생이 갑자기 꼬르륵하더니 물속으로 가라앉았어. 내가 손을 써볼 틈도 없이.”

“네? 진짜요?”

나는 귀를 의심했다. 아버지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런데 더 놀랍게도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아버지의 메마른 눈가가 촉촉이 젖고 있었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야기하는 내내 눈 아래에 눈물방울이 고여있었다. 지어내는 이야기로 눈물을 흘릴 수도 있는 걸까.

“그래서요?”

“그래서 동생이 죽었어. 그 애가 아주 똑똑해서 아버지가 이뻐했어. 큰 인물 될 거라고. 그 애를 묻고 오면서 아버지가 대성통곡을 했어. ‘네가 죽고 그 애가 살아야 했는데...’ 하면서.”

아아. 내 눈앞에 그림이 펼쳐졌다. 강에서 헤엄치다 죽은 아이. 자신의 온 희망이었던 아이를 안고 오열하는 할아버지. 아이를 묻고 오면서 북받쳐오는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차마 해서는 안 될 말을 입 밖에 낸 할아버지. 내가 어릴 때 알았던 할아버지와 전혀 연결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정말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서 아버지가 그렇게 된 거였어. 우리 아버지 너무 불쌍하다.”

나는 아버지의 눈에 고인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아버지의 마음속에 맺혀있는 사건이 있음에는 틀림없었다. 그 사건은 아버지가 중독자가 된 이유를 설명하고도 남았다. ‘네가 대신 죽었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가 그 후 무슨 목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아버지가 왜 그렇게 대통령이 되겠다는 터무니없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살았는지 그 의문도 풀렸다. 똑똑한 동생을 대신해 할아버지의 희망을 성취시켜주어야만 했던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을 살 수가 없었던 거였다. 할아버지의 말은 아버지에게 ‘너는 너로 살면 안 된다’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삶을 살 수 없었던 아버지가 중독 외에 갈 곳이 어디 있었겠는가. 내 눈에서도 눈물이 나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아버지, 힘들었겠다. 그것도 모르고. 진작 얘기해주지.”

아버지는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서 후련한지 얼굴이 한결 밝아 보였다. 그 이후로 나는 다시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할 길도 없었다. 사촌 언니들도 들은 바가 없다고 했다. 두 형제는 같은 아픔을 가지고 살아온 걸까. 큰아버지는 아버지의 상처를 알기에 성인이 된 아버지를 끝까지 돌보려고 하셨던 것일까. 아버지의 큰 비밀을 알아버린 나는 그 어릴 때 사건이 아버지 중독의 원인이었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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