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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4장 트라우마의 습격. 천형같은 외로움

4장 트라우마의 습격    

 

  낯선 땅에 가서야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나를 습격했다. 유학 시절은 내가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를 받았는지 그 증상이 구체적으로 발현된 시기였다. 가장의 짐을 벗어 던진 대가로 더 혹독한 죄책감이 나를 짓눌렀다. 

  

천형 같은 외로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건 1996년 8월 말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방의 도도한 미인 같이 곁을 쉽게 내주지 않는 도시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사실 나에게는 모스크바보다는 페테르부르크가 더 적합한 유학지였다. 내가 전공하는 도스토옙스키가 페테르부르크의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지만 십 대의 청소년기에 페테르부르크에 유학을 와서 그곳에서 작가로 출발했다. 시베리아 유형 십 년, 유럽에서 사 년을 제외하고는 생애 대부분을 페테르부르크에서 지냈고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살고 죽었던 곳,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을 비롯한 초기 작품들, 『죄와 벌』과 『백치』, 『미성년』까지 세 편의 후기 장편소설의 무대가 되었던 그 도시에 유학하는 것은 전공자로서 특권이면서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석사 시절 읽었던 단행본을 쓴 선생님에게 지도 교수를 청할 생각이었다. 발렌티나 베틀롭스카야 선생님. 그분은 박사 논문으로 쓴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시학』을 책으로 출간했고, 그 책은 곧 영어로 번역되었다. 책을 읽으며 ‘이분의 제자가 되어야지’라고 결심했다. 알아보니 그분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국립 아카데미 산하 러시아 문학 연구소에 계셨다. 일명 ‘푸쉬킨의 집’이라고 불리는 저명한 러시아 문학 연구소였다. 나는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은 상태였다. 도착하자마자 두 달 정도는 이러저러한 서류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학은 내게 다른 교수를 지도 교수로 정해줬다. 키가 크고 우람한 체격에 큰 뿔테 안경을 낀 교수였다. 그 교수의 수업을 들어보고 나서 나는 학과 사무실로 그를 찾아갔다.

“무슨 일인가?”

“저, 지도 교수님을 바꾸고 싶습니다.”

약간 얽은 그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기분이 좋을 리는 없지. 그러나 나는 당신의 제자가 되려고 이 먼 곳까지 온 건 아니올시다.

“이유가 뭔가?”

“한국에서 올 때부터 지도 교수님을 하고 싶었던 분이 있습니다.”

“그게 누군가?”

“러시아 연구소에 계신 베틀롭스카야 선생님입니다.”

“음...”

그가 베틀롭스카야 선생님을 모를 리가 없었다. 도스토옙스키 연구자로 세계적인 권위가 있는 분이었으니. 그는 내 요구를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 러시아 박사 과정의 시스템은 학생이 자신이 원하는 지도 교수를 선택할 수 있었다. 

  대학의 허락을 받고 러시아 연구소를 찾아갔다. 미리 베틀롭스카야 선생님에게 전화해 약속 시간을 잡아두었다. 러시아 연구소는 페테르부르크를 남북으로 나누고 있는 네바강에 인접해 있었다. 대학에서 강변을 따라 걸어 궁전 다리를 건너면 은빛 돔이 보였다. 노란색으로 칠해놓은 건물 앞에는 연구소 이름에 걸맞게 청동으로 만든 푸쉬킨의 흉상이 서 있었다. 육중한 나무로 만든 현관을 열고 안에 들어서면 석고로 만든 유명한 문학 이론가의 흉상이 나를 반겼다. 바닥이고 벽이고 부서지고 파진 홈투성이였다. 당시 대부분의 건물이 그랬듯 보수가 시급한 상황이었지만 재정적인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유명한 연구소의 내부는 너무나 초라했다. 좁은 연구실 안에 몇 개의 책상이 놓여 있는 게 전부였다. 연구소 소속 연구자들은 대부분 집이나 연구소 근처에 있는 아카데미 소속 도서관에서 작업했다. 베틀롭스카야 선생님도 거의 집에서 연구하고 연구소에는 나를 만나기 위해서나 일이 있을 때만 나왔다. 

  선생님과 나는 연구소 1층 로비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먼저 도착해 로비에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얼마 후 작은 키에 남자 청소년처럼 짧게 머리를 자른 마른 체형의 한 여자분이 나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당신이 소냐인가요?”

소냐는 내가 지은 러시아 이름이었다. 선생님은 바지 차림을 하고 목에는 수수한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 회색 눈동자가 호기심과 반가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십 후반 정도 되어 보였다. 이 선생님을 내가 이렇게 쉽게 만나다니.

“네.”

“반가워요. 그래, 당신 논문 제목이 무엇인가요?”

선생님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도스토옙스키 소설들에서 정교 미학의 측면들을 연구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얼굴이 환해졌다.

“좋아요. 당신을 제자로 받겠어요.”

선생님은 내 논문 주제에 무척 만족했다. 그 주제를 스스로 정했는지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잘했다며 칭찬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내가 읽어야 할 책 목록을 몇 권 적어주었다. 그중 한 권은 러시아 정교 신학자인 플로롭스키의 『러시아 신학의 여정』이었다. 그 책을 훗날 내가 번역하게 될 줄은 우리 둘 다 몰랐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선생님을 그렇게 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났다.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이 들어보니 나는 고국을 떠나 뿌리가 뽑혀버린 이방인이었다. 혁명 후 소련 체제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베를린과 파리, 프라하로 뿔뿔이 흩어졌던 망명자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러시아의 ‘우수’라는 감정이 나의 혈관을 타고 흘렀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외로움에 정처 없는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잿빛만 보였다. 

  아버지와 동생들이 이렇게까지 보고 싶을 줄 몰랐다. 얼마 전까지 나의 진정한 집이었던 교회가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하숙집 내 방에 주인아주머니가 빨간색 천으로 된 소파 겸용 침대를 놔 주었다.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침대의 기능을 하기에는 무리였지만 그런대로 사용할 만했다. 나는 그 침대에 누워서 제일 잘 보이는 벽에 동생들과 교회 형제, 자매들의 사진을 붙였다. 밤이 되면 침대에 누워 그 사진을 보며 흐느껴 울다가 잠이 들었다. 달력의 날짜를 하루하루 지우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계획한 삼 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끝이 오지 않을 영원같이 느껴졌다. 

  나의 하루는 거의 매일 똑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간단히 빵과 우유로 식사했다. 가끔 주인아주머니는 러시아식 수프나 죽을 끓여 내게 주곤 했다. 나는 특히 귀리죽을 좋아했다. 거친 귀리껍질과 부드러운 속 알갱이가 어우러진 식감이 러시아 건강식의 맛을 보여줬다. 집에서 지하철 1호선의 마지막 역인 프리모르스카야 역까지 가려면 십 분 정도 걸어야 했다. 내가 살던 동네는 한국 유학생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는데도 오가며 그들을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가 살았던 집은 일명 닭 다리 아파트라고 알려진 건물이었다. 20층이 넘는 네 개의 똑같은 아파트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지어져 있었다. 닭 다리라는 별명은 아파트 하단이 마치 닭 다리같이 생긴 구조 위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설계했는지 독특한 외양을 한 아파트였다. 나는 역에서 마지막 네 번째 아파트에 살았다. 네 개의 아파트 옆으로는 도로가 이어져 있었고, 그 도로 옆으로는 인근의 핀란드만으로 물이 빠져나가도록 운하가 파여 있었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는 공터였기 때문에 유난히 매서운 바람이 그 사이로 불었다. 운하 맞은편에는 긴 아케이드 형태의 아파트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지하철역 근처에서 대학으로 가는 트롤리버스나 트램을 탔다. 트롤리버스는 전선에 줄을 매달고 도로를 달렸고, 트램은 궤도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진즉에 폐기되었을 법한 소련 시절의 낡은 교통수단이었다. 언제 칠했는지도 모르는 어두운 황토색과 칙칙한 자주색, 찌그러지고 군데군데 뜯어진 외관과 딱딱하고 볼품없는 의자들. 창밖으로 펼쳐지는 음울한 겨울 풍경. 누가 페테르부르크를 아름답다고 했던가. 북방의 베네치아니, 암스테르담이니 하는 별칭을 가진 여행 명소지만 도시의 이면은 이곳에 꽤 오래 살아야 하는 나의 눈에 금세 포착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페테르부르크를 ‘세상에서 가장 음울한 도시’라고 불렀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몇 달 살아보니 이해가 되었다. 

  버스에서 내릴 때는 이미 마음에 구멍이 뻥 뚫린 상태였다. 페테르부르크 국립 대학교는 네바강에 바로 면해 있었다. 미국 유학을 준비했을 때 나는 넓은 캠퍼스에 잔디밭, 곳곳에 젊은 학생들이 오가는 활기찬 모습을 늘 그려왔다. 러시아 유학은 유학에 대한 나의 로망을 산산 조각냈다. 캠퍼스라고 할만한 공간이 없어서 학생들이 모여 있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인문대학은 세월의 흔적을 담은 엷은 녹색으로 칠해진 건물이었다. 쪽문이라고 할 만큼 작은 나무 현관을 열고 들어서면 1층에 책을 파는 가판대가 있었다. 그곳에서 살만한 책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유학생들의 일과였다. 오늘 보이는 책을 사지 않으면 다시는 살 수 없을지도 몰랐다. 언제나 책을 사기 위해 여분의 돈을 준비해 두고 있어야 했다. 어떤 날은 책가방 가득 책을 사기도 했다. 내게 꼭 필요한 책을 발견할 때의 반가움을 가끔 맛보았다. 

  계단을 올라가면 미로 같은 복도들과 강의실이 나타났다. 러시아 박사 과정은 따로 전공 수업이 없었다. 러시아어와 철학 수업을 일 년 듣고 시험을 치르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전공 공부는 알아서 하는 것이었고 논문 방어를 하기 전에 시험을 치러야 했다. 늘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살았는데, 수업도 없고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우들이 없다 보니 아무 데도 소속되지 않은 자연인 그대로의 나를 마주 대해야 했다. 나는 고국 땅을 떠나 소속감도 없이 뿌리 없이 부유하는 미미하고 불안정한 존재였다. 

  러시아 문학 학부 수업을 청강했다. 강의실을 가득 메운 학생들은 두 시간 반 동안 이어지는 수업 시간 내내 미동도 없이, 옆 학생과 대화도 하지 않고 노트에 필기만 했다. 단조로운 교수의 목소리와 필기하는 소리만이 강의실에 맴돌았다. 강의 내용을 알아듣기 힘들 때는 뇌에 과부하가 걸려 졸음이 몰려왔다. 그래도 언젠가 필요할 때가 있겠지 싶어 열심히 노트에 필기했다. 푸쉬킨 연구자로 유명한 노년의 마르코비치 교수는 건강이 좋지 않은지 늘 목소리가 갈라지고 떨렸다. 설명을 위해 손을 뻗으면 그 손이 덜덜 떨렸다. 대학자답게 구사하는 러시아어가 어려웠다. 때때로 학생들이 노교수의 말에 웃음으로 반응하면 그들만의 교감에 끼어들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나처럼 수업을 청강하는 유학생이 거의 없었다. 나는 유령처럼 인문대학 안을 떠돌았다. 작은 카페에서 샌드위치나 얼큰한 맛이 나는 살랸카로 혼자 식사했다. 가끔 카페에서 아는 한국 유학생을 만나기라도 하면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잠깐의 만남을 뒤로 하고 헤어졌다. 서로의 시간을 빼앗지 않기 위해 철저히 생활의 경계를 지켜 주었다. 한국 유학생이라는 연대감이 없었다. 

  수업을 듣는 시간 외에는 대학 건물 끝에 있는 아카데미 도서관에 갔다. 육중한 석조 건물로 제법 큰 도서관이었다. 1층에 들어서면 짐 보관소에 겉옷과 가방을 맡기고 노트와 필기도구만 들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도서관의 중앙 계단은 넓고 천장도 높았다. 중앙 열람실로 향하는 길은 시대를 거슬러 학문의 전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중앙 열람실은 책상을 두 개씩 붙여 네 열로 배치해 놓았다. 열람실 한쪽 벽은 천장까지 고서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덕분에 열람실 안에는 늘 오래된 책 특유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책상마다 초록색 램프가 놓여 있었다. 낮에도 램프의 불을 켜야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열람실 내부는 어두웠다. 열람실이 가득 차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아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젊은 학생들보다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학자들이 많았다. 일흔, 여든이 넘어 보이는 등이 구부정한 노학자들이 책을 읽으며 노트에 얼굴을 바짝 대고 내용을 옮겨적고 있었다. 그렇게 일 년 내내 열람실을 지키는 분들이 있었다. 

  아직 노트북이 없던 시절이라 나도 대출받은 책을 읽으며 노트에 필기했다. 책을 집으로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에 자료를 보는 것은 도서관 안에서만 가능했다. 정적이 흐르는 고요한 도서관. 두어 시간 책을 읽다 보면 다시금 우수가 가슴에 찾아들었다. 나는 여기서 무얼 하는 것일까. 무슨 보람을 바라고 여기에 온 것일까. 이런 외로움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날카로운 비현실의 감각이 폐부를 찔렀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책을 보다가 바깥이 캄캄해지면 도서관을 나섰다. 

  유학생들은 가끔 서로를 초대해서 저녁을 대접했다. 누군가의 생일이면 학생들을 초대해서 러시아식으로 연회를 즐겼다. 샴페인과 케잌, 러시아식 축하 인사. 그러다가 한국 이야기와 소소한 생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유일하게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런 날만큼은 혼자라는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이렇게 비슷한 처지의 한국 학생들이 많은데 왜 나는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을까. 나처럼 유난스럽게 외로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은 누가 불러주지 않나. 그 기대로 버티는 내가 초라했다.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으면 지하철역 근처에서 장을 봐서 나만을 위한 간단한 저녁 식사를 차렸다. 양손에 장 본 꾸러미를 들고 아파트 사이로 부는 칼바람을 맞으며 걸어갈 동안 눈이 따끔거렸다. 펑펑 울 수는 없었다. 가정이 있는 유학생 부부가 부러웠다. 집에 도착해서 다른 일을 하기 전에 컴퓨터를 켜서 한국에서 온 이메일이 있는지 확인했다. 혹시라도 이메일이 온 게 있으면 읽고 또 읽었다. 몇 줄의 이메일이 주는 위안이 얼마나 큰지. 메일함이 비어 있으면 나는 바탕 화면에 깔린 카드 맞추기 놀이를 몇십 분 동안 했다. 그러다 보면 쓸쓸한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딱히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떨 사람도 없었다. 밤에는 러시아 소설들을 읽었다. 적막한 밤에 라디오를 켜두면 누군가 옆에 있는 듯했다. 나는 엘도 라디오를 즐겨 들었다. 96년의 라디오에서는 80년대의 팝송들이 흘러나왔다. 중고등학생 때 들었던 아바, 보니 엠, 듀란듀란의 노래들을 러시아에서 듣노라니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었다. 젊은 남녀가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서로 마음에 들면 즉석에서 전화 연결이 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듣다 보니 그들의 사연과 선호하는 남녀에 대한 견해가 재미있어 애청자가 되었다. 그렇게 밤을 보내다가 새벽 다섯 시쯤 되면 잠을 청했다. 나의 하루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왜 유독 외로움에 취약할까. 정들고 익숙한 장소와 사람들을 떠나면 왜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죽은 듯이 지내는 걸까. 누구나 다 나와 똑같을까. 나는 좀 유별난 것 같았다. 안정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한 어린 시절이 영향을 주는 것일까. 내가 상실에 유독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자각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상실의 문제는 내 삶을 어디나 따라다니는 어두운 그림자였다.

  아마 어머니를 일찍 잃은 것이 원인인 듯했다. 내 안정감의 근원이었던 어머니의 상실 이후 나는 어머니를 대신할 대상을 찾아낼 때만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대상은 친구들이거나 교회의 친한 언니들이었다. 나는 남성에게서는 안정감을 누리지 못했다. 포근하고 든든한 안정감을 제공한 대상은 늘 여성이었다. 그런 대상을 잃을 때마다 나는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러시아에 와서야 그런 나의 문제를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러시아에서 외로움을 극복하게 된 것 역시 친구 지연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우리는 신앙적인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급속하게 친해지게 되었다. 지연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나의 외로움이 사라졌다. 덕분에 러시아에서도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었지만 내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했다. 안타깝지만 지금까지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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