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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4장 트라우마의 습격. 동생의 결혼

동생의 결혼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에서 벗어나 나 혼자만의 자유를 찾아 러시아로 왔건만 오히려 그것이 내게 고통이 되었다. 아버지와 동생들을 생각하면 미안함과 후회로 번민했다. 빨리 학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마음이 급했다. 그동안 나름 희생했는데 이 정도는 괜찮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했다. 집에 전화하면 동생들은 별일 없다고, 아버지도 잘 지낸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러시아 음식만으로 지낼 수가 없어서 된장이니 고추장, 간장, 라면, 김, 미역 등 러시아에 없는 음식을 보내달라고 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막내 남동생이 석 달에 한 번 

꼴로 꼬박꼬박 소포를 부쳐주었다. 러시아에서는 집으로 편지나 소포를 배달해 주지 않았다. 편지나 소포가 우체국에 도착했다는 통지서만 우체통에 들어있었다. 통지서를 가지고 직접 우체국에 가서 편지나 소포를 찾아와야 했다. 처음에는 역 근처에 있는 우체국에서 소포를 찾아 그나마 수월했다. 집에 오는 길에 찾아 가까운 거리지만 약간의 돈을 주고 택시로 운반했다.

  그러다가 가야 하는 우체국이 바뀌었다. 핀란드만 바로 앞 바닷가에 있는 아파트 건물이었다. 그곳까지 걸어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편지를 받으면 돌아오는 길이 아무리 추워도, 손이 꽁꽁 얼어도 마음이 훈훈했다. 집에 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걸어가면서 편지를 읽었다. 그런데 문제는 소포를 받아 돌아올 때였다. 도저히 집까지 들고 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약간 외진 곳이어서 택시도 잘 다니지 않았다. 소포를 길에 놓아두고 차가 지나가기를 한참 기다렸다. 칼날 같은 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보내온 물건들과 함께 온 편지를 읽을 생각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마음은 따뜻했다.

  교회에서 가장 친한 언니가 있었다. 재희 언니. 친언니 이상으로 나를 아껴주고 내가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언니였다. 언니에게 자주 편지를 썼고 언니도 바로 답장을 보냈다. 아파트 사이의 넓은 공터를 가로질러 걸으며 언니의 편지를 읽을 때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언니의 편지에서 전해지는 마음은 이렇게 포근하고 가깝게 느껴지는데 우리를 갈라놓은 거리는 너무나 멀고 멀었다. 

  1997년 2월에 동생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러시아에 간 지 6개월 만에 나는 동생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으로 잠시 돌아왔다. 그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내 일생에서 가장 긴 6개월이었다. 재희 언니가 공항에 마중 나왔다. 언니를 보자마자 나는 언니를 얼싸안고 펑펑 울었다. 언니도 함께 울었다. 언니의 첫마디는 “선화야, 다시 돌아오면 안 되니?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 고생을 해? 돌아와서 사법고시 준비라도 하면 어때?”라는 말이었다. 언니의 그 말에 나는 완벽하게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언니 말대로 할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막내 남동생이 흰색 에스페로에 나를 태웠다. 그새 동생은 자동차 면허를 땄다. 대학을 졸업한 동생은 성악을 가르치며 돈을 번다고 했다. 우리 집에 차가 다 생기다니. 비쌀 텐데 제대로 할부를 갚기는 하나 싶으면서도 날렵한 차의 외관과 동생의 능숙한 운전 솜씨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막내도 이제 다 커서 독립했다는 게 실감 났다. 

  그런데 신림동 언덕의 집에 들어선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오열이 터지고 말았다. 나의 부재를 고스란히 드러내 준 집의 모습. 이런데도 내가 없어도 괜찮을 거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였던가. “선화 왔냐?” 안방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에 울음을 꾹 삼켰다. 나는 “잘 지내셨어요, 아버지?”라는 말 대신 “이게 꼴이 뭐야, 아버지”라고 말했다. 나는 짐을 풀기도 전에 집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연신 흐느낌을 진정시키지 못하는 내 모습에 재희 언니는 내 등을 두드리며 말없이 함께 정리를 거들었다. 동생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이따 들어올게.”라며 밖으로 나갔다. “언니, 나 다시 돌아올 거야. 이건 정말 아니야.” 나는 울먹이며 언니에게 말했다. 

  그날 저녁 결혼할 동생이 집에 돌아왔을 때 그 말을 했다. 

“나 다시 돌아와야겠어. 집 꼴이 이 모양인데 어떻게 러시아에 계속 있어?”

동생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누나, 유학 간 게 장난이야? 이러고 살면 좀 어때? 누나 공부나 신경 써. 돌아온다고 하면 내가 누나 안 받아줄 거야.” 

동생의 말은 단호하고 강경했다. 동생도 사실 “그래, 누나가 돌아와 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을 참아내고 동생은 나를 앞으로 떠밀어냈다. 그 말이 준 힘이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막상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공부를 포기하는 게 너무나 아쉬워졌다. 이런 마음으로는 포기할 수 없겠다는 걸 확인했다. 빨리 공부를 마치는 게 가장 좋은 길이었다. 누나를 자랑스러워하며 기꺼이 짐을 지고 있는 두 동생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자랑이었던 나는 이제 동생들의 자랑이 되어 있었다. 나 자신에게도 자랑스러운 내가 되어야 했다. 포기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한 달 한국에 머무는 동안 그리움과 외로움에 굶주렸던 마음이 다시 채워졌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 따뜻했고 행복했다. 이제는 전보다는 잘 지낼 수 있으리라, 그래야 한다는 마음으로 다시 러시아로 향했다. 이번에는 결혼한 동생과 올케가 함께 나를 배웅했다. “아버님 저희가 잘 보살필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올케가 말했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 된 동생 부부를 보며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동생의 표정도 처음 내가 러시아에 갈 때와는 달랐다. 동생은 아버지와 가까운 곳에 신혼집을 얻었다. 막내 남동생이 아버지와 지내기로 했다. 나는 이제는 좀 안정되게 아버지와 동생들이 지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것이 누구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인지는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또다시 순진한 기대로 자신을 안심시켰다. 몇 년 후 그 기대는 엄청난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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