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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4장 트라우마의 습격. 라도가

라도가     


  1998년에 나는 서른두 살이었다. 왜 하필 그해에 시작됐는지 모르겠지만 각종 신경증 증상이 연이은 파도처럼 이 년 동안 나를 덮쳤다. 그해 여름, 지인들과 함께 페테르부르크에서 세 시간 동안 자동차를 달려 라도가 호수라는 곳을 갔다. 러시아에는 큰 호수가 몇 개 있는데 바이칼, 라도가, 오네가 호수 등은 바다로 분류될 만큼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20여 명의 사람이 배를 타고 일박이일 여정으로 라도가 호수 안에 있는 섬에 가는 여행이었다. 평소 배 타기를 좋아했던 나는 설레고 흥분했다. 

  호숫가에 20명 정도 태울 크기의 고깃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인은 선배 부부와 나, 또 다른 여자 유학생, 그리고 선배의 지인인 남성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모두 러시아인이었다. 배가 출발하기 전, 라도가 호수는 평온하고 잔잔해 보였다. 서늘한 전형적인 러시아의 여름 날씨였다. 나는 배에 올라 신이 나서 2층 갑판 앞쪽으로 갔다. 바람을 맞으며 배가 전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섬까지 가는 데는 세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그런데 배가 출발한 지 십여 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배가 높게 솟구치더니 다시 푹 가라앉는 느낌이 찾아왔다. 이게 뭐지,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거칠어진 파도가 눈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배는 양옆으로 사정없이 요동치고 갑판에 물이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공포에 사로잡혔다. 

  “배를 돌려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여행을 주선한 선배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선배도 긴장한 표정으로 선장에게 가서 의견을 물었다. 러시아 선장은 손을 내저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항해를 계속했다. 노련한 선장의 판단이니 믿음이 갔을까. 처음에 놀랐던 다른 사람들은 이내 안정을 찾았다. 십 대 남자아이들은 심지어 재미있어하며 배 앞머리에서 넘실대는 파도를 즐겼다. 나이 든 사람들은 어지러움을 느껴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 혼자만 극도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 몸을 가눌 수 없어 간신히 기어서 선실로 들어왔다. 조그만 창밖을 살펴보니 주변에 다른 배들은 보이지 않았고 온통 넘실대는 물뿐이었다. 아무리 멀리 보아도 육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배를 삼킬 듯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는 파도를 보며 동생들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여기서 물에 빠져 죽는 건 아닐까. 동생들을 다시는 못 보게 되는 건 아닐까. ‘타국에 와서 호수 한가운데서 이렇게 죽기는 싫어, 하나님, 살려주세요.’ 그 기도만 반복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별 호들갑을 다 떤다고 생각할 것 같아 공포심을 숨기고 가는 내내 두려워 떨었다. 그런 상태로 끔찍한 세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섬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내 얼굴은 완전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내일은 어떻게 하지?’ 그 걱정에 여행을 즐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조금 시간이 지나자 마음이 진정되었다. 작은 섬 주변의 물은 언제 파도가 쳤냐는 듯 잔잔하기 그지없었다. 러시아 사람들 뒤를 따라 숲으로 가 버섯을 땄다. 자연에서 건강하고 싱싱한 먹거리를 직접 채취하는 것이다. 몇 시간 동안 서늘한 숲에서 거닐며 버섯을 따다 보니 조금 즐거운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 사이 몇 명의 남자들은 호숫가에서 물고기를 낚았다. 저녁에는 러시아식 꼬치구이인 샤슬릭을 숯불에 구워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백야였다. 페테르부르크보다 더 북쪽이어서 그런지 한밤중에도 하늘에 파란색 물감이 엷게 칠해져 있었다. 이야기와 노래가 이어지며 러시아의 여름밤이 무르익어갔다. 내일이 걱정되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짜 러시아의 삶에 녹아든 기분이 들었다.

  다음날 직접 딴 버섯과 잡은 생선으로 수프를 끓여 먹었다. 식사하는 도중 한 여자가 선장에게 “어제 긴장되지 않았나요?”라고 물었다. 선장은 솔직히 긴장했다며 출발 

전에 출항을 자제하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오늘은 괜찮나요?”라고 내가 물었다. 선장은 미소를 띠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떠날 시간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방망이질했다. 나는 파도가 세지 않은지 호수의 먼 곳을 바라보았다. 파도가 보이긴 했지만, 배들이 다니는 걸로 봐서 어제보다는 파도가 덜한 모양이었다. 나는 돌아가는 세 시간 내내 배 앞쪽에 앉아있었다. 전날보다 약한 파도가 쳐서 배가 흔들렸다. 앞쪽에 앉으면 배의 흔들림이 덜 느껴졌다.

  그 후로 나는 지금까지 절대 배를 타지 않는다. 강에서 잠시 유람선을 탈 때조차 긴장한다. 먼바다에 배를 타고 나가는 건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때 나는 내가 좀 비정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배에 있던 사람 중에서 왜 나만 그렇게 극심한 공포를 느꼈을까. 그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공포증이라는 정체 모를 괴물과 계속 마주쳐야만 했다.    

 

결혼과 비행공포증의 시작  

   

  그해 가을 나는 남편과 연애해 사 개월 만에 결혼을 결정했다. 남편은 고대에서 알고 지냈던 믿는 형제였다. 나름 로맨틱했던 유학지에서 남편과의 연애 이야기는 이 책의 주제를 벗어나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우리는 결혼식을 하기 위해 1999년 1월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내가 러시아에 가 있는 동안 막내 남동생은 아버지와 함께 신림동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동생의 차를 타고 내가 모르는 곳으로 가려니 기분이 묘했다. 집은 전보다 훨씬 작았다. 방 두 개와 그 사이에 싱크대 하나 정도만 있는 구조였다. 육십이 넘은 아버지는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숱이 많았다. 결혼한다는 말에 아버지는 “우리 선화가 결혼하는구나.”라며 기뻐했다. 남편은 연한 갈색빛이 도는 근사한 양복을 차려입고 신림역으로 왔다. 남편의 집과 너무나 비교되는 우리 집을 어떻게 생각할까. 충격을 받지나 않을까 싶었지만,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작은 안방으로 들어섰다. “아빠, 사위 될 사람이에요. 절 받으세요.” 우리는 나란히 아버지에게 절을 했다. 아버지는 남편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합격!”이라고 소리쳤다. “아니, 아무 말도 안 해보고 벌써 합격이에요?” 나는 핀잔을 주듯이 말했지만, 늠름한 모습의 사윗감을 보고 만족하는 아버지 모습에 속으로는 흐뭇했다. “너무 쉽게 합격 돼서 좋겠다.” 남편에게 웃으며 말하니 “그러네.” 했다. 남편은 나름 긴장을 했었다고 했다. 술을 많이 마신다고 해서 아버지가 좀 무서울지도 모른다고 긴장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나이가 드셔서인지 전보다 험악한 인상이 옅어졌다. 몇 년 전까지 그렇게 무서워했던 아버지였다는 게 실감이 안 날 정도였다.

  결혼에 대한 설렘과 기쁨도 잠시 나는 그동안 몰랐던 아버지 얘기를 동생들에게 듣게 됐다. 동생들은 편지에 늘 아버지가 잘 계신다고 썼다. 내가 삼 년 후면 돌아오니까 그때까지 참으면 될 줄 알았던 거였다. 그런데 막상 내가 결혼하고 러시아에 더 오래 남게 되자, 동생들은 기쁘면서도 당황스러워했다. 막내 남동생은 아버지와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들어 지친 상태였다. 아버지가 술을 먹고 고주망태가 되어 쓰러져 있으면 사람들이 파출소에 신고했다. 그러면 파출소에서 동생에게 연락이 와서 데리러 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결혼한 동생 부부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 돈을 달라, 반찬을 해오라고 보챘다. 느닷없이 동생 집에 들이닥쳐 올케에게 욕을 하고 추태를 부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동생은 자세한 이야기를 피했지만 조금만 들어도 어땠을지 짐작이 갔다. 동생의 얼굴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런 상황에 결혼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역시 내가 없었기 때문에, 동생들이 감당해야 했던 희생이 너무 컸다. 결혼했으니 동생 부부가 잘 감당하리라 기대했던 게 얼마나 순진하고 이기적인 생각이었나. 나 자신이 밉고 후회스러웠다. 앞으로 또 몇 년을 그렇게 지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카페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엉엉 울다가 의자 위에 쓰러져 한동안 일어나지를 못했다. 남편은 조용히 내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남편은 울음을 그치고 멍한 얼굴로 고개를 떨군 나를 달랬다. 그렇다고 결혼을 안 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결혼하고 차차 해결책을 찾아보자고 했다. “해결책이 어디 있어? 내가 와야 하는데...”

   내가 돌아와서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해결책도 있을 수 없었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 못처럼 박혀서 몇 년 동안 빠져나가질 않았다. 결국 나는 예정대로 결혼식을 치르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하지만 남은 기간 내내 어서 돌아가 동생들과 아버지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단 하루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엄청난 채무를 지고 도망친 사람이 되어 버렸다. 마음의 짐이 너무 무거웠지만 어떤 것으로도 가볍게 할 도리가 없었다. 아마도 그 부채감이 러시아에서 내가 발병하게 된 이유였던 것 같다. 

  우리는 돌아가는 길에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했다. 뮌헨과 퓌센, 로텐부르크가 우리의 진짜 신혼여행지였다. 여행을 마치고 페테르부르크행 비행기를 탄 것은 저녁 일곱 시 경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페테르부르크까지는 세 시간 남짓 걸렸다. 비행기가 페테르부르크 도착을 한 시간 정도 남겨두었을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승무원이 커피를 가져다줬다. 커피잔을 드는 순간 갑자기 비행기가 요동을 치기 시작하더니 커피가 내 옷에 쏟아졌다. 승무원도 당황하여 흘린 커피를 치우고 곧 자리에 가 앉았다. 모두 벨트를 매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처음의 쿵 하는 충격 후에 한동안 비행기는 심하게 흔들리며 비행을 계속했다. 라도가 때와 같이 다른 사람들은 별 반응 없이 그대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러나 나는 커피가 쏟아질 때 너무 놀랐다. 처음으로 비행기 안에서 공포를 맛본 나는 그때부터 좌불안석이었다. “여보, 나 무서워...” 남편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내 손을 잡아주며 괜찮다고 했다. 그때부터 도착할 때까지 내 심장은 계속 쿵쾅거렸다. 나는 제발 속히 도착하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하고 나서도 놀란 가슴이 쉬 진정되지 않았다. 

  비행공포증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후부터는 비행기를 타는 상상만 해도 겁이 났다. 꿈에서도 비행기를 타는 꿈을 자주 꾸었다. 그 후 어쩔 수 없이 비행기를 타야 할 때는 죽을 맛이었고, 비행기가 흔들리기만 하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떨었다. 그것이 비행공포증이란 것을 안 것은 몇 년 지나서였다. 비행기를 탈 때 항불안제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약을 한 시간 간격으로 여섯 번 정도 먹어야 안정됐다. 일시적인 과다복용으로 그날 있었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비행공포증만 없었더라면 지구 어디까지 가려 했을지 모를 일이다. 배와 비행기를 자유롭게 타지 못하는 것은 내 생활에 큰 불편을 주었다. 이제는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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