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지킴이 Nov 28. 2023

4장 트라우마의 습격. 이천 년

이천 년     


  십 년 동안 러시아를 혼란 속에 방치했던 옐친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폭탄 테러범을 잡기 위해 지도력을 발휘한 건 전 KGB 출신 푸틴이었다. 푸틴은 체첸을 테러범으로 지목했다. 2차 체첸전쟁이 벌어졌다. 내 마음 상태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길거리의 사람들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어둡고 음울했다. 이렇게 무서운 테러가 공공연히 자행되는 나라의 국민인 그들이 가여웠다. 푸틴은 테러범들을 잡아들이고 빠르게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옐친은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다. 푸틴은 소련 해체 후 두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이천 년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연말이 되자 남편이 한국에 가자고 했다. 소위 Y2K 때문이었다. 밀레니엄을 앞두고 전 세계가 긴장했다. 컴퓨터가 2,000년을 인식하지 못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 사태를 러시아에서 맞는다면 속수무책일 터였다. 불안감에 다른 유학생들도 한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비행기를 탈 일이 무서웠지만, 러시아를 벗어나고 싶었기에 남편의 제안이 기뻤다. 

  공항에 우리를 데리러 오신 시아버님 차를 타고 시댁으로 갔다. 막내 남동생은 내가 시댁으로 가는 모습이 영 낯설었다고 말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아버지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방문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상태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동생 부부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표정만 봐도 힘들어 보였다. 막내 남동생도 아버지와 지내는 걸 버거워하고 있었다. 어서 논문을 마쳐 돌아와야 하는데 내 상태가 불안정했으니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마 동생들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동생들도 나를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이러려고 러시아에 간 것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어서 마음을 다잡고 빨리 학위를 받아 돌아와야 한다는 마음에 조급해졌다. 

  한국에서 한 달을 지낸 것이 마음의 안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다행히 Y2K는 별 탈 없이 지나갔다. 다시 러시아로 돌아온 나는 논문을 다 쓰기 전에는 다시 한국으로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하루하루 매일 논문 한 페이지를 쓰며 일 년을 보냈다. 지도교수님은 내가 논문을 장별로 써가면 “됐다”며 계속 쓰라고 격려하셨다. 교수님은 직접 내 러시아어 논문을 알파벳까지 꼼꼼하게 교정하셨다. 교수님은 페테르부르크 북쪽 외곽에 홀로 사셨다.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학문에 바친 분이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한 명밖에 없던 언니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친척이라곤 달랑 언니의 딸인 조카뿐이었다.

  쓸쓸한 인생이었지만, 교수님은 학문이 천직이라 그런지 늘 활달하고 에너지로 넘쳤다. 러시아 제자들도 있었지만 늘 내가 최고의 제자라고 말씀하셨다. 도스토옙스키 연구의 권위자인 교수님에게 그런 찬사를 듣는 건 영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저 외국에서 온 학생을 격려하시는 말씀이려니 여겼다. 독실한 정교 신자셨던 교수님은 정교에 대한 나의 이해가 깊다고 하셨다. “소냐는 거의 정교 신자”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카랑카랑한 그 목소리와 소년같이 장난기 있는 웃음을 띠던 회색 눈동자가 그립다.  

  2001년 봄에 나는 논문을 완성했다. 논문자격시험을 생애 마지막 시험으로 치렀다. 러시아어로 답안을 준비해 달달 외웠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를 보고 친하게 지내던 유학생이 “머리에서 김이 난다.”고 말했다. 지도교수님은 내 논문에 매우 만족하셨다. 논문을 인쇄하고 가을에 있을 논문심사까지는 몇 달의 시간이 덤으로 주어졌다. 러시아에서는 여름에 철저히 쉬기 때문에 어떤 학사일정도 진행되지 않았다. 

  이제 내 공부는 끝이 보였다. 그러나 남편의 논문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언제쯤 귀국할 수 있을지는 아직도 미지수였다. 그해 여름에 동생이 러시아로 출장을 왔다. 모스크바 출장을 오는 김에 하루 시간을 내서 페테르부르크로 우리 부부를 보러 왔다. 러시아에서 동생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한 적이 없었다. 나는 들뜨고 행복했다. 풀코보 공항으로 가서 동생을 마중했다. 동생도 흥분돼 보였다. 일요일이었고 우리에게는 시간이 하루밖에 없었다. 나는 미리 남편에게 이번에 꼭 동생에게 전도하자고 했다.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오겠냐고. 남편도 그러자고 했다. 

  집에 와 짐을 풀고 페테르부르크 관광을 시켰다. 딱 하루의 시간에 보여줄 수 있는 곳으로만 골랐다. 궁전광장으로 갔더니 동생은 “여기가 1905년 혁명이 시작된 곳이구나.”라며 감개무량했다. 한때 학생운동권이었던 동생에게 러시아 혁명의 발상지에 서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해군성을 지나 이삭 대 성당의 웅장한 외관만 보여주고 청동 기마상 쪽으로 걸었다. 네바강과 운하들을 연결하는 배를 타고 보이는 건물들을 설명했다. 남편은 연신 나와 동생의 사진을 찍어줬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름 정원을 갔더니 동생도 “여기 좋네.”라고 했다.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동생은 인쇄된 내 논문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바라는 건 없고 그저 누나가 러시아 문화 얘기 정도 해주면 족하다고 했던 동생이었다. 그러기에는 동생이 치러야 했던 대가가 너무나 컸다. 우리 부부가 신앙 이야기를 꺼내자 동생이 얼굴을 굳혔다. “너의 힘든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어떠니?” 동생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따라서 기도하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따라 하도록 했다. 나는 보통 그런 식으로 전도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날은 마음이 급해서 억지로라도 동생이 그 기도를 하게 만들고 싶었다. 동생은 한 마디씩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큰 한숨을 내쉬며 “더 못하겠어요.”라고 말했다. 깊은 고통이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누나 매형 오늘 나한테 왜 이러세요?”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동생이 폭포 같은 눈물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동생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이 파열되었다. 한 번도 그렇게 우는 동생을 본 적이 없었다. 늘 굳건하고 든든했던 바위 같던 동생이 촛농처럼 녹고 있었다. 그 눈물의 의미를 알기에 마음이 쓰라렸다. 나는 동생 옆에서 같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남편은 동생을 안아 주었다. 자신을 지키던 모든 방패를 내팽개치고 남편의 품에 안겨 동생은 한동안 실컷 울었다. 그렇게라도 울어서 동생의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무거운 짐이 벗겨진다면. 나는 가슴이 찢어지면서도 동생이 우는 게 오히려 반가웠다. 

  다음 날 아침 동생의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풀코보 공항에서 찍은 사진에서 동생은 부어있는 눈으로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동생이 한국으로 떠난 후 몇 달이 지났다. 동생은 집 근처에 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날 남편과 내가 무리하게 동생을 전도하려고 했던 게 헛되지는 않았나 보다. 내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아마 동생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동생이 눈물을 흘릴 때 아마 하나님의 손길이 동생의 마음을 어루만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몇 년 후 동생은 진짜 믿는 사람이 되었다.      


 돌아가야 해         


  2001년 10월 말 드디어 논문심사를 마쳤다. 3년 반 만에 끝내려고 했던 논문을 5년 만에 끝냈다. 러시아에서는 박사 학위수여식이 따로 없다. 논문심사를 마치면 그것으로 끝이다. 대신 자그만 파티를 열어 손님들을 초대해 자축한다. 박사 학위증도 양 손바닥을 합친 넓이 정도 되는 붉은 색 표지의 작은 증서가 전부다. 고생한 시간에 비해 결과로 보이는 물리적인 성과가 너무 소박했다. 어쨌든 마음은 홀가분했다. 러시아에 온 목적을 이룬 셈이었다. 거기에 덤으로 결혼까지 했으니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남편의 논문이 끝나길 기다리며 일 년 동안 선교사 자녀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2002년이 되었다. 그해 여름 우리는 러시아에서 붉은 악마가 되었다. 뜨거웠던 월드컵의 열기가 가라앉고 가을이 되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남편의 논문이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남편의 지도교수는 너무나 소극적이었다. 남편의 논문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도 모르고 의지도 없어 보였다. 나는 남편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나를 먼저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더 기다릴 수 없다고. 당시 내 머리는 온통 어서 한국에 돌아갈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빨리 가서 아버지를 돌봐드리고 동생들의 짐을 벗겨주어야 해’. 

  어느 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다. 긴 테이블보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왠지 그 테이블 아래에 무엇인가 들어있을 것만 같아서 슬쩍 테이블보를 들쳐 보았다. 그랬더니 거기에 몇 마리가 되는지 알 수 없는 뱀들이 서로 엉겨 붙어서 우글대고 있었다. 뱀을 제일 싫어하는 나는 “악”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깨었다. 뭔가 의미하는 바가 있는 꿈이었는데 해석을 할 수 없었다. 나중에야 그 꿈이 불안한 나의 내면을 보여주었다는 걸 알게 됐다. 한국에 가서 있을 일에 대한 경고였던 셈이었다. 

  남편은 나를 먼저 보낼 수 없다며 나를 업고 방을 빙빙 돌면서 울었다. 그리고 지도교수에게 찾아가 논문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지도교수는 만류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나는 분노했다. “무슨 지도교수가 그래? 당신 그 교수 밑에서는 절대로 논문 못 써. 나를 보내주든지, 당신이 논문을 포기하든지 결정해요.” 남편은 한 달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한 달 동안 남편은 기도하고 평소에 신뢰하던 분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대부분 아내와 함께 귀국하라고 조언해주었다. 남편은 함께 돌아가겠다고 결정했다. 결국 남편은 러시아에서 나 하나만을 얻은 셈이었다. 

  귀국을 결정한 우리는 서둘렀다. 짐을 정리해 주위에 나눠주고 그동안 샀던 책들을 콘테이너로 한국에 보냈다. 이미 지연을 비롯해 친했던 사람들이 러시아를 떠났다. 내가 귀국한다는 소식을 전하자 부산대학교의 한 교수님께서 내게 강의를 부탁하셨다. 남편의 거취가 불분명했지만, 아직 30대 중반이니 얼마든지 취직을 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했다. 한국만 가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 믿었다. 그때 내 나이 서른여섯. 한 해가 끝나가는 12월 19일 우리는 마침내 인천공항에 발을 디뎠다. 내가 러시아에 간 지 6년 반 만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4장 트라우마의 습격. 테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