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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6장 아버지와 마지막 한 달

아버지와 마지막 한 달

 

  해외 출장 중인 큰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친구가 일하는 대림역 부근의 병원으로 아버지를 옮겼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바로 아버지를 그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다시 아버지를 앰블런스에 태우고 그 옆자리에 앉았다. 파주에서 대림동까지는 차로 한 시간 넘게 걸렸다. 8월 말이었는데 아직 무더위가 물러가지 않고 있었다. 하늘은 푸르렀고 길가의 나무들은 힘찬 생명의 약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가는 내내 턱을 위로 올려 앰블런스의 좁은 창을 통해 밖을 바라봤다. 눈에 들어오는 하늘과 구름, 나무의 꼭대기를 보며 아버지는 곧 떠날 세상과 작별의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장엄한 순간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한 인간이 다시는 보지 못할 세상과 무언의 이별을 하는 장면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과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했다. 

  이인실 병실에 들어갔는데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병원 원장인 동생의 친구가 배려를 해줘서인지 아버지가 있는 동안 옆 병상에 환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진의 친구는 아버지를 성심껏 보살피겠노라고 말했다. 호스피스 병동처럼 모시겠다고. 아버지에게는 치료가 아닌 완화요법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고통을 최대한 경감시키는 게 입원의 목적이었다. 나는 간병인을 구했다. 도저히 내가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목욕시키고 머리를 감겨줄 자신이 없었다. 남편이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야 겨우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 수 있었다. 처음 온 간병인은 조선족 여성이었는데 하루 일하고 나서는 아버지가 까다롭다며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다행히 두 번째 온 간병인은 나이가 칠십이 넘은 분이었는데도 체력이 좋고 경험이 많아 노련했다. 아주머니는 본인이 드실 반찬을 다 챙겨 갖고 와서 냉장고에 넣었다. 

“염려 말아요. 내가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드릴 테니.”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항상 아버지 옆을 지킬 믿음직한 간병인이 생기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나는 낮에는 병원에 있다가 저녁에 양평동에 있는 동생의 집에 가서 잤다. 주말에는 대전 집에 다녀왔다. 

  아버지는 처음 며칠은 우유니 바나나니, 요구르트 같은 가벼운 음식을 드셨다. 그러더니 곧 모든 음식을 거부했다. 그나마 요구르트라도 떠서 아버지 입에 넣어드릴 때의 작은 만족감마저 사라졌다. 간호사가 와서 매일 팔의 이곳저곳에 주사를 찔러넣어 영양제와 수액, 진통제를 투여했다. 평소에는 통증을 호소하지 않던 아버지는 주사를 맞을 때마다 “아야, 아야” 소리를 냈다. 주사가 아픈 양반이 어떻게 암 통증을 견디는 것일까. 간호사는 통증이 너무 심해서 아버지가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는 한 번도 아프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모른다.

  문제는 통증이 아니었다. 곧 아버지의 섬망 증세가 나타났다. 아버지는 낮에도 자다가 갑자기 눈을 뜨고는 “저놈 잡아라, 저놈.” 하면서 공중에 대고 마구 욕을 퍼부었다. 

“아버지, 왜 그래? 누구한테 그러는 거야?”

“저놈, 저놈이 소를 훔쳐 간다. 나쁜 놈.”

“무슨 소?”

아버지가 횡설수설하는 말을 종합해 보면 북한에 있을 때인지 피난 때인지 누군가 집에서 물건과 가축을 훔쳐 간 모양이었다. 그 기억이 꿈에 나타나 몇 번씩이나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곤 했다. 피난 시에 있었던 일은 아버지의 기억 속 가장 어두운 곳에서 기어나와 아버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자꾸만 기저귀를 잡아 뜯었다. 갑갑한지 기저귀를 끄집어내서 갈기갈기 찢었다. 그리고 숨을 편히 쉬라고 코에 끼워준 초록색 끈이 달린 호흡기를 자꾸만 떼어냈다. 얼마나 답답하면 그럴까 싶으면서도 간병인 아주머니와 나는 그럴 때마다 아버지에게 호통을 쳤다. 한번은 갑자기 방 한구석을 쳐다보면서 소리쳤다.

“저 뱀 잡아라, 뱀.” 

“아버지, 뱀이 보여?”

“응, 큰 뱀이 여러 마리. 잡아!”

나는 근심에 휩싸였다. 뱀이 보이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아버지 마음에 괴로움이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대학 시절 내게 복음을 전해주었던 선배에게 연락했다. 이미 아버지는 나를 따라 교회에 다녔다. 여러 번 복음을 들었고 예수님을 영접하겠노라고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신앙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선배가 찾아왔다. 선배는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해본 경험이 많았다. 쉬운 말로 아버지에게 다시 한번 예수님을 전했다. 아버지는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았다. 휠체어에 앉아 “네, 네.”하며 응답했다. 순순히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따라 했다. 그 기도를 따라 했다고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온누리교회 담당 목사님에게 전화를 드려 아버지가 세례를 받으실 수 있는지 여쭤봤다. 목사님은 준비해 올라오겠다고 하셨다.

  목사님과 교회 자매님들 몇 분이 대전에서 올라왔다. 병상에서 세례를 주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아버지는 순순히 믿음을 시인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제 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성경책을 아버지께 읽어드렸다. 그리고 찬송가를 불러드렸다. 아버지는 성경보다 찬송을 불러주는 걸 더 좋아했다. 찬송 소리가 끊어지면 “찬송가 불러”라고 말하곤 했다. 찬송가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안정되는 모양이었다. 찬송가를 들을 때 아버지의 눈에 가끔 눈물이 맺혔다. 그런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영혼의 금선이 건드려진 것일까. 나는 아버지 정신이 또렷하다 싶을 때마다 반복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말해줬다.

“아버지, 무서워요?”

“아니, 안 무서워.”

“장하다, 아버지. 하나도 무서워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아버지 맞이하러 오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응...”

천국에 대해 들을 때 아버지는 절박하게 그 소망을 붙잡는 것 같았다. 나는 죽어가는 사람에게 천국에 대해 말해주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위안도 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생명나무 치유 사역에서 만난 한 자매님이 전화해서 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나누라고,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라고 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들려주라고 했다. 나는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나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아버지에게 해 드렸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죽음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이 연약한 아버지가 과거에 나를 그렇게 두려움으로 몰고 갔던 사람이 맞을까. 아버지를 용서하긴 했지만, 사랑하지 못했던 시간이 안타까웠다. 한번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우리한테 미안하지 않아요?”

“뭐가 미안해?”

“술 먹고 무섭게 한 거.”

“안 미안해.”

“왜 안 미안해요?”

“다 술 때문인걸...”

기대하진 않았지만, 아버지는 정말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과나 용서를 구하는 말을 바라진 않았다. 그저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을까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끝까지 자신의 양심을 마주할 수는 없었던 아버지. 이제 양심이 깨어난다면 그 고통을 어찌 감당할까 싶었다. 

“난 아버지 다 용서했어요. 마음 편히 가지셔도 돼요. 아셨죠?”

“그래.”

한 가지 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아버지, 아직도 대통령 되고 싶어요?”

“아니.”

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드디어 그 오랜 망상에서 벗어난 아버지. 죽음 앞에서 아버지는 마침내 망상을 내려놓았다. 아버지의 마음은 이제 홀가분해졌을 것이다. 

  한번은 병원에 도착하니 병실이 비어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니 간병인 아주머니가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워 병실로 돌아왔다.

“어디 갔다 오세요?”

“아버지 모시고 시장 한 바퀴 돌고 왔어요.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몰라. 더 있다 가자고 하시는데 너무 힘드실까 봐 왔지. 아이처럼 좋아하시더라고.”

“그러셨어요? 힘드셨을 텐데 감사해요.”

“아버지가 너무 좋아하셔서 또 나가야겠어.”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점점 체력이 약해져 다시 밖에 나갈 수 있는 상태로 회복되지 못했다. 시장을 돌면서 아버지 눈에 보였던 세상은 어땠을까. 다시는 볼 수 없는 세상과 마지막으로 놀다 오셨구나. 그리 돌아다니길 좋아하셨으니 그 순간만큼은 행복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게도 자주 휠체어를 태워달라고 했다.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도는 것을 좋아했다. 몇 바퀴를 돌아도 아버지는 “한 번 더, 한 번 더”를 연발했다. 아버지는 탐욕스러울 정도로 눈으로 사람들과 사물을 집어삼켰다. 1층 로비에서 밖이 내다보이는 현관 앞에 휠체어를 세우면 초점 잃은 눈으로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았다. 마치 세상을 향해 구애하는, 사랑에 목마른 사람처럼.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렇게 아버지는 조금씩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 

  이 주일 정도 병원을 오 가던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동생의 집에서 잠을 자는 것이 아무래도 편치 않았다. 아버지도 좀 더 편안한 곳에서 계시게 하고 싶었다. 나는 대전 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을 알아봤다.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한 번 더 아버지를 이동시켜야 했다. 죽어가는 말기 암 환자를 몇 번이나, 그것도 서울에서 대전으로 옮기는 게 무리였지만 나는 강행했다. 사실 아버지가 한 달 넘게 사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가까이서 아버지를 돌볼 수 있어야 했다. 다행히 간병인 아주머니도 대전까지 따라오셨다. 참 감사한 분이었다. 아버지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껴 잘해 주고 싶어 하셨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앰블런스를 타고, 나는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왔다. 아버지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지낸 곳은 대전 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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