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J의 시선
“집으로…”는 한국의 맥컬리 컬킨(“나 홀로 집에”의 주인공)이라고 불릴 만큼 아역으로 유명해진 유승호 배우를 “국민 손자”로 만들어 준 작품이다. 지금까지 다룬 대부분의 영화들은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제작 연도를 찾아 보고 나서야 작품이 개봉한 후 벌써 몇십 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깜짝 놀라곤 했었는데, 재미있게도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는 2002년 작임에도 첫 개봉 이후 주인공인 유승호 배우의 성장 과정을 줄곧 ‘지켜보아’ 왔기 때문인지 평소만큼의 큰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듯 잘 알려진 작품이기에 줄거리를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한 데다, 영화 자체 또한 기승전결의 뚜렷한 직선적 플롯 대신 소소하고 단편적인 사건들로 형성된(episodic) 구조를 띄고 있기도 하다. 그래도 이어질 내용을 위해 짧게나마 요약하자면, 이 작품은 어느 여름 엄마 손에 이끌려 외딴 시골 마을 할머니 집에 맡겨진 7살 소년 상우(유승호 분)와 혼자 살고 계시던 외할머니(김을분 분) 사이의 어설프고도 애틋한 나날을 그리고 있다. 엄마에게 발길질을 서슴지 않고 낯선 할머니에게도 무의식적으로 손이 올라갈 만큼 버릇이 나쁜 상우에겐 치킨이나 게임기 같은 도시의 재미와 거리가 먼 초라한 시골집이 성에 찰 리 없고, 그런 아이는 자신의 불만과 분노, 짜증을 만만한 대상인 할머니를 향해 풀어 댄다. 게임기의 배터리를 사려고 할머니의 은비녀를 훔치거나 말을 하지 못하시는 할머니의 장애를 비하하는 낙서로 벽을 뒤덮는 등 상우의 행패가 도를 넘지만, 할머니는 그런 아이의 말썽을 묵묵한 사랑으로 받아 주실 뿐이다. 그렇게 함께 지내는 날들이 길어지면서 상우는 점점 더 할머니의 고단한 삶과 고요한 사랑을 이해하게 되고, 철이 들 듯 안 들 듯 애매하고 느린 성장의 과정을 시작한다.
유승호 배우와 같은 또래여서 더 그랬을지 모르지만, 어린 시절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상우의 캐릭터가 얼마나 얄미웠는지 영화관을 나설 때까지도 어떤 ‘의분’에 차 있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까지의 글을 통해 유추되었으리라 생각하듯 내가 세상에 대한 상당한 삐딱함과 반항심을 상시 휴대하고 다니는 사람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얌전하고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아이였던지라 상우의 버르장머리 없는 짓에 꽤나 질겁했더랬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는 상우가 대체로 귀엽고 안쓰럽다고 느껴졌는데, 물론 지금도 머리 한 번 쥐어박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끔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육아 난이도 최상급이다) 아이의 ‘위악’ 아래 감추어진 결핍과 외로움이 보이는 듯한 안타까움으로 인해서였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엄마에게 끌려 시골로 내려온 상우는 긴 여정에서 생긴 피로와 짜증을 풀기 위해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며 발길질과 주먹질을 퍼붓고, 상우의 엄마(동효희 분)는 상우만큼이나 짜증에 찌든 얼굴로 아이를 때리면서 상우의 잘못된 화풀이와 폭력을 그대로 되돌려 준다. 보다 성숙해야 할 어른이 아이에게 하는 행동이라는 면에서는 상우의 것보다 더 나쁘고 잘못된 대응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싱글맘으로 추정되는 엄마이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는 해도 지금껏 그녀가 아이를 어떤 방식으로 키워 왔는지 대략 짐작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게 자의와는 상관없이 할머니 집에 남겨진(좀 더 부정적으로 표현해 “버려졌다”고도 할 수 있는) 상우는 할머니가 차려 주신 김치와 나물 반찬 대신 도시에서 챙겨 온 콜라와 스팸을 고집하고, 나물을 캐고 바느질을 하는 할머니의 조용한 일상을 무시하며 시끄러운 로봇과 게임기에 몰두한다. 자극적인 음식과 장난감을 통한 즉각적 만족에 익숙한, 현대 사회의 큰 화두로 떠오른 “도파민 중독”에 빠진 듯한 상우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상우 엄마의 양육 방식에 대한 이전의 짐작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상우가 가지고 온 장난감과 간식들은 아이를 타이르고 설득하며 인내로 양육하는 부모가 안겨 줄 만한 애정의 산물이기보다, 순간순간을 모면하고 투정과 짜증을 잠재우는 데에만 중점을 둔 뇌물 쪽에 더 가까워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상우는 조용한 산골 마을의 풍경을 닮은, 삼삼하고 지루하지만 늘 흔들림 없는 할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뿐더러 그것에 응답하는 방법도 전혀 알지 못한다. 투정을 부리고 말썽을 피우는 식의 폭력과 분노의 언어로만 엄마와 대화하고 관심을 받을 수 있었을 상우로서는, 할머니의 곱고 순한 애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테고 말이다.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인, 치킨이 먹고 싶다는 손주의 수화에 읍내에 나가 사 온 닭으로 백숙을 끓여 주신 할머니에게 “왜 닭을 물에 빠트렸어”라며 엉엉 우는 상우의 (귀여운) 모습 역시 그런 맥락에서는 안쓰럽게 보인다. 손주를 위해 비까지 맞아 가며 먼 길을 다녀와 정성껏 음식을 차려 주신 할머니의 노고는 생각하지 않은 채 도시에선 쉽게 구할 수 있는, 말 그대로 “패스트” 푸드인 프라이드 치킨만 찾고 있는 상우의 모습은, 담백하되 진득한 진짜 사랑 대신 표피적이고 얄팍한 관심과 애정 부스러기에만 아이가 익숙해져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도시의 소음과 빠른 속도, 즉각적 자극과 쾌락으로 대변되는 엄마와의 얕고 불안정한 관계에서 벗어난 상우가 고요하고 잠잠한, 문자 그대로 “말이 없는” 할머니의 곁에 있게 되었다는 설정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을 듯하다. 자신이 건넨 짜증과 분노가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던 엄마와의 관계와 달리, 할머니는 세상의 모든 물방울을 흡수하는 거대한 바다처럼 상우의 온갖 투정과 잘못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신다. 그 무엇을 던져도 튕겨 내지 않는 태산 같은 사랑 앞에서 상우는 마침내 자기 편의만 생각하고 자신의 만족을 빼앗기지 않으려 아등바등하던 발버둥을 내려놓으며 서서히 상대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결국 이타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진짜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 여정을 표현하는 감독의 연출 문법 역시 무척 사랑스럽다. 영화 초반에는 할머니의 고무신보다 높은 위치에 자리하던 상우의 신발이 작품의 후반부에는 댓돌 위에 할머니의 고무신과 나란히 놓여 있는 장면이나, 처음에는 할머니의 부탁에 짜증을 내던 상우가 나중에는 할머니를 위해 먼저 바늘에 실을 꿰어 두는 모습,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할머니를 위해 “아프다”, “보고십다”처럼 할머니가 편지를 쓸 때 필요하실 표현들을 가르쳐 드리는 장면에서는 이 작품의 따스하고 다정한 시선이 특히 돋보인다.
여기에서 재미있었던 점은 [미술관 옆 동물원]이 ‘동거’라는 소재를, 남녀가 서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타적인 관계를 쌓는 과정으로 풀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할머니와 손주, 가족이되 남 같은 두 사람이 ‘동거’를 통해 관계를 시작한 후 이타적 사랑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집으로…]에서 이러한 변화의 토대가 되는 것은 할머니의 묵묵한 사랑과 포용이지만, 이 주제에 대해서는 굳이 더 깊게 다루지 않으려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 영화를 세상의 모든 외할머니들에게 헌정한다고 밝히는 이정향 감독이 실제로 자신을 키워 주신 할머니에 대해 느끼는 깊은 사랑과 미안함을 곳곳에 포진시켰을 만큼 할머니의 사랑이 이 작품의 주요 테마이기는 하나, 이미 많은 평론들이 그 사랑에 대해 훌륭히 다루었다고 생각되는 만큼 이 글에서까지 비슷한 관점을 택할 필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영화를 재감상 하는 동안 계속 눈에 들어온 것은 도리어 상우의 ‘철들기’ 여정이었는데, 이제 정신을 좀 차리나, 철이 좀 드나 싶다가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지지부진한 진행 구조가 상당히 흥미롭게 느껴졌다. 상우는 자신에게 백숙을 끓여 주기 위해 비를 뚫고 읍내에 다녀왔다 몸살감기에 걸리신 할머니에게 나름의 병간호를 하거나, 노상에서 힘들게 나물을 파는 할머니를 목격한 후 그렇게나 원했던 배터리를 사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등 무언가 느끼는 게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좋아하는 여자아이 앞에서 창피하다는 이유로 할머니를 마을버스에 타지 못하게 하고 할머니의 짐을 받아 주지도 않다가 할머니가 사 온 초코파이를 자신이 먹을 생각만 하는 등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버리지 못한다. 버스를 타지 못하게 한 자신 때문에 먼 길을 불편한 몸으로 걸어 오신 할머니를 본 뒤론 다시 정신을 차렸나 싶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여자애를 만나러 가는 길에 도시에서 신고 왔던 ‘멋진’(그러나 이미 작아진) 신발을 억지로 신으며 할머니가 힘들게 모은 돈으로 시장에서 사 주신 운동화는 발로 차 내는 상우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쟤는 왜 저렇게 철이 안 드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영화와 책, 전기물과 자서전 등 잘 정돈된 서술과 스토리텔링에 익숙해진 탓에 어떤 계기가 되는 큰 사건을 언제나 기대하는 듯하다. 이전과 이후, before와 after가 뚜렷하게 갈릴 수 있는 어떤 결정적 전환점 말이다.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허구적 구성에는 언제나 그런 계기가 있기 마련으로, 사실 이 영화가 조금 덜 세련된 작품이었다면 상우라는 인물은 백숙 사건, 혹은 마을버스 사건 같은 어떤 하나의 전환점 이후 철이 든 모습을 보이며 버릇없고 배려심 없던 예전과 뚜렷이 구별되는 행보를 보였을지 모른다. 할머니의 사랑에 완전히 감화되어 전과는 달라진 모습이 되는 주인공의 변화와 성장(어떤 면에서는 “자기 구원”으로도 불릴 수 있는)을 기대하는 관객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 작품 속에서 아이는 철이 든 것 같다가도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미끄러지고, 버릇없이 구는 것 같으면서도 그 안에서 조금의 변화와 성장을 보이는 등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 서사로 그려진다.
시골길의 구불구불한 도로처럼 두서없고 굽이치는 상우의 행보는 단순하지도 명료하지도 않은 – 하나의 사건이나 계기로 전후가 완전히 바뀔 만큼 간단치 않은 – 세상의 모습과 인간의 속성을 여과 없이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리고 미숙하며 버릇없는, 인간의 본래 모습 그대로를 보여 주는 상우는 조금 나아질 것 같다가도 다시 넘어지고, ‘나쁜 짓’을 반복하며 완전히 무너져 버릴 것 같으면서도 그 안에서 나름의 성장과 배려를 계속함으로써 인간 내면의 복잡함과 다면성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발짝 나아갔다가 한 발짝만 물러서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종종 한 발짝 나아갔다가 두 발짝 뒷걸음질하기도 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처럼 말이다.
새해를 맞아 지난 해를 되짚어 볼 때 감사의 마음이 드는 부분도 많지만 동시에 후회가 되는 일들도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올해엔 다르리라는 희망으로 새로운 다짐을 해 보기도 하지만 새해의 결심과 목표가 며칠 가지 않는다는 것이 ‘전 인류 공통’의 고민이기도 할 것이고. 사실 몇년 전만 해도 계속해서 제자리를 걷는 듯한, 때로는 퇴보하는 듯한 스스로의 모습에 상당한 좌절감과 죄책감을 느끼며 새해를 맞는 일에 별다른 문제의식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동안 더 나아졌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변해 가는 부분이 있다면, 인간의 이런 종잡을 수 없는 느리고 애매한 본질을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곧 성숙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화나 소설과 달리 우리에겐 ‘전’과 ‘후’가 완벽하게 갈리는 단 하나의 전환점이 없을 수도 있고, 어떤 계기를 지나고 나서도 다시 예전과 같은, 스스로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으로 퇴행하는 시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 내내 진행된 상우의 점진적 성장이 마지막에 가서야 할머니의 사랑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는 변화로 나타날 수 있었듯 우리도 그저 하루하루를 더듬거리며 걸어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늘 실수하고 실패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묵묵하고 꾸준한, 모든 것을 다정히 받아 주시는 사랑에의 확신이 있는 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하며 우리 모두는 자신의 ‘집’에 다다르게 되는 것일 테니까.
엄마 C의 시선
2002년 봄 개봉되었기에 이미 23년 전 공개된 작품임에도 여전히 영화 “집으로…”를 따뜻하고 가슴 뭉클한 감동과 함께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저희 딸이 주인공 “상우” 또래의 어린아이일 때 영화를 함께 보았던 저 역시 늘 마음 한구석에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이 작품을 이번에 다시 보면서, 감동적이고도 가슴 아픈 마지막 장면이 처음부터 머릿속에 떠올라 영화를 보는 내내 – 아직 상우가 할머니에게 심통을 부리던 도입 장면에서부터 – 괜시리 마음이 아프고 연신 눈물이 나더군요. 함께 투톱(!) 주인공을 맡은 할머니 역의 ‘주연 여배우’를 포함해 배역들 대부분이 실제로 산골 마을(충북 영동군 상촌면)에 사는 현지 주민이었던 데다가 제작진 대다수도 당시 영상 제작 경력이 짧았다고 하는데, 이런 점들이 오히려 영화의 감동에 순기능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이정향은 저희가 예전에 소개했던 “미술관 옆 동물원”의 연출자이기도 한데, 1998년 개봉된 그 작품에 이어 두 번째 연출작이 되기는 했으나 사실상 “집으로…”의 시나리오가 그보다 먼저 집필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외할머니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그리움의 표현이 곳곳에 배어 있어 감독의 자전적 작품이라고도 불리는 영화답게, 마지막 부분에 올라오는 엔딩 크레딧에는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께 이 영화를 바칩니다”라는 자막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지요. 1억 5천만 원이라는 소액의 제작비를 들이며 비상업 영화로 분류되었던 이 작품은, 대다수 영화 관계자들의 예상을 깨고 42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39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 39회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과 각본상, 기획상과 신인여우상(김을분 할머니) 등의 화려한 수상 경력까지 남겼습니다. 이후 해외 수출(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중국, 일본 등)에서도 성공을 거두었고 2019년 한국에서 재개봉 되기도 했지요.
이전에는 서로가 일면식도 없던, 더구나 말을 하지 못하고 글도 읽지 못하시는 산골의 77세 할머니에게 7살짜리 어린 아들을 맡기고 떠났던 엄마가 여름 한 철이 지난 후 다시 아이를 데리고 갈 때까지, 아무런 공통점이나 교집합의 요소가 없던 두 사람이 부딪히며 특별한 사랑을 쌓아 가는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단순 명료한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사건들의 재미와 감동으로 흥행적, 예술적 성공을 모두 이루어 낸 작품입니다.
몸에 꽉 끼는 옷에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산골에 온 젊은 엄마와 스팸을 먹을거리로, 게임기를 장난감으로 가지고 온 어린 아들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이들 모자는, 산골의 흙집에서 혼자 살고 계신 할머니와는 너무도 대조되는 외형과 분위기를 보여 줍니다. 전작인 “미술관 옆 동물원”에 이어 이 작품에서도 “이질적인 두 존재를 같은 공간 안에 ‘강제로’ 병치시키는 플롯”을 사용하고 있다고 평가 받은 이정향 감독이지만, 이 영화가 갖는 조금 다른 특성이라면 할머니와 어린 손자인 두 사람 모두가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무력하고 연약한 ‘마이너리티’로서의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러한 서로의 공통점 때문인지, 시끄러운 소음을 제조하는 게임기를 옆에 낀 채 콜라를 입에 달고 사는 습성에 젖어 있는 상우의 삶 속에 할머니가 한 발짝씩 들어오시기 시작합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떨어지는 낙수가 바위를 뚫는다” 등의 속담이 머릿속에 맴돌 만큼 아주 천천히, 그리고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의 ‘개입’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롤러스케이트를 방 안에서 타며 할머니 주위를 맴도는 상우의 행동이 할머니의 영역을 ‘침범’하는 그의 마음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감독은 설명하지만, 라면 봉지 안에 고이 넣고 끈으로 묶어 보관하던 사탕을 자신에게 건네주시는, 또 장에 가서 나물을 팔아 힘들게 번 돈으로 손자에게만 짜장면을 사 주고 당신은 물만 들이키시던 할머니의 사랑으로, 상우가 할머니의 영역을 침범하기는 커녕 할머니가 도리어 상우의 영역에 조금씩 침입 반경을 넓혀 가시는 것입니다 –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그리 하시듯 말이지요.
담담하고 잠잠한 할머니의 포용과 사랑에 상우가 점차 ‘물들어’ 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은, 그 마을 토박이이자 자신의 ‘연적’인(상우가 좋아하는 소녀 “혜연”이와 붙어 다니며 그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철이”를 골탕 먹인 후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버티고 선 – 자기보다 덩치가 큰 – 철이를 피해 도망가면서 가슴을 쓰다듬는 수화(手話)로 사과를 건네는 모습입니다. 영화의 시작 부분,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손자를 향해 할머니가 보이셨던 그 동작은 “마음이 아프다”, “네 뜻대로 못 해 주니 미안하구나”라는 의미를 가진 수화라고 하는데, 처음 그런 할머니를 봤을 땐 입에 담지 못할 비속어로 버릇없는 대응을 하던 상우가 할머니가 하셨던 방식 그대로 누군가와 소통을 시작한 것이지요. 수화를 배운 적 없는 상우이기에 정확한 의미는 알 수도 없었을 텐데, 할머니의 눈빛과 따뜻한 손짓만으로 그 뜻을 짐작해 자신도 적절한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가슴을 둥글게 쓰다듬는 그 동작이 “마음이 아프다”, “네 뜻대로 못 해 주니 미안하구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설명을 처음 들었을 때,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에 ‘곧이곧대로’ 응답해 주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인 듯 여겨져 가슴 뭉클했던 것이 저만의 확대해석 때문일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비속어로 – 너무도 ‘불경’스럽게 – 대응하는 손자에게 ‘속’도 없는 듯 “따라오라”고 다시 손짓하시는 할머니에게서도 저는 우리를 그처럼 대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람 사이의 소통이 반드시 ‘언어’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영화를 통해 새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폴 에크만이 표정과 움직임 같은 “비언어적 의사소통”의 중요성에 대해 연구한 내용도 그렇지만, UCLA 교수였던 앨버트 메라비언의 연구 결과로서의 이론 역시 첫인상에서 언어적 요소가 갖는 비중은 7%에 불과하다는(외모, 표정, 태도 등 시각적 요인이 55%, 목소리나 말투 등 청각적 요인이 38%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이 영화가 설정한 할머니의 장애가 그런 면에서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으리라 추측하게 되는 것은, 말씀을 못 하시는 할머니이기에 눈빛으로 더욱 간절히 전하는 진심이 마음 안에 깊은 인상과 여운으로 남았을 성우가, 이별을 앞둔 시점 간단한 글씨와 그림으로 소식을 알려 달라며 할머니에게 엽서 통신을 부탁하는 장면 때문입니다. 그러다 글쓰기를 배우기가 여의치 않으신 할머니의 상황을 깨달은 후 “아무것도 쓰지 않은 편지를 보내면 할머니인 줄 알고 달려오겠다”라며 생각을 바꾸는 그의 말에 관객들의 눈물샘이 자극되는 것도, 굳이 말이나 글로 하는 것만이 깊이 있는 대화법은 아니라는 영화의 메시지가 가슴을 울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깊은 기도도 꼭 ‘말’로, ‘소리’ 내어 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닐지 모릅니다. 우리 마음속에 스치는 생각까지 모두 알고 계시고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쓰지 않은 편지를 보내도 받아 읽고 곧장 달려오시는 분이니까요. 입장을 바꾸어, 그런 하나님과 늘 교제하는 사람이라면, 역시 ‘소리’로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는 귀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배터리가 없어 게임을 못 하게 되자 전에는 관심조차 없던 주변의 경관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자연과 더불어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늘면서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맑고 순수한 동심이 되살아났던 상우처럼, 우리도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들에 마음을 닫은 후 주님께서 보내 주시는 편지와 엽서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만 그분의 ‘집으로’ 더 자주 달려갈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