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C의 시선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는 2000년 개봉되었던 영국 영화로, “디 아워스(The Hours)”,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 등 작품성을 인정받는 영화들을 연출한 스티븐 달드리(Stephen Daldry)가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한국에서는 2001년 초 개봉되었다가 2017년 재개봉되기도 했을 만큼 나름대로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영국 로열 발레단 댄서인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각본이 쓰여졌다는 말도 있었으나 시나리오를 쓴 리 홀(Lee Hall)이 영화를 준비하던 과정에서 만난 발레리노 필립 모슬리(Philip Mosley)의 성장담을 스토리에 조금 참고한 정도라고 합니다. 이 영화의 내용이 2010년판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와 중학교 2학년/고등학교 2학년 영어 교과서에 실린 일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지요.
73회 미국 아카데미상에서는 감독상, 각본상, 여우조연상 등의 3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는 데 만족해야 했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 제이미 벨(Jamie Bell)은 2001년(54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에서 같은 해 후보에 올랐던 “글래디에이터(Gladiator)”, “캐스트 어웨이(Cast Away)” 같은 쟁쟁한 영화의 주연 배우들(러셀 크로우, 톰 행크스)을 제치고 최연소로 남우주연상 수상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제는 성인이 된 제이미 벨이 이름만으로는 조금 생소할 수도 있겠지만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에서 주인공 격인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를 믿고 따르는 “에드거” 역으로 출연한 배우이기에 한국 팬들에게도 얼굴은 제법 알려져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발레와 탭댄스에 뛰어난 소년을 찾았다는 이 영화의 오디션에서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했던 그는, 영화 속 내용처럼 실제로도 '남자'가 발레를 한다며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곤 했다고 합니다.
겨우 11살의 나이에 일찍 엄마를 여의고 잉글랜드 북부의 탄광촌에서 광부인 아버지와 형, 치매기가 있는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빌리”는 무심한 아버지와 형 대신 아침마다 할머니께 달걀과 토스트를 챙겨 드릴 만큼 착한 아이입니다. 방을 함께 쓰는 어린 동생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는 형 “토니”에게서 따뜻한 배려를 받지 못하는 데다,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생각을 철칙으로 삼고 있는 아버지 “재키”의 뜻에 따라 하루 50펜스씩 내고 체육관에 다니며 복싱 연습을 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지요. 그러나 발레 강습소가 사용하던 자리를 파업 광부들이 차지하면서 복싱 체육관의 한 구석으로 옮겨 와 진행되던 발레 강습을 빌리가 자연스레 접하게 되었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자신 안에 숨겨져 있던 적성과 재능을 깨닫도록 하며 결국 가정 내에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발레 교사인 “윌킨슨” 부인의 적극적 도움과 아버지의 어려운 결심으로 마침내 빌리가 외진 탄광촌 마을을 떠나 자신의 꿈을 이루는 내용으로 영화는 끝을 맺지만, 그런 결말에 이르기까지 빌리에게는 무척이나 길고 힘든 과정이 요구되었습니다. 유난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남자다움을 생명처럼 여기는 형이라는 두 개의 벽에 더하여,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더욱 크고 높은 또 하나의 벽까지 넘어서야 했으니까요. 이런 벽들을 모두 넘어설 수 있었던 데에는, 비록 ‘발레 수업’을 포기해야 했음에도 ‘춤추는 일’만은 포기할 수 없었던 빌리의 끈질기고 굳건한 자세가 가장 큰 견인차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빌리 스스로의 굳건함 못지않게 현실의 난관을 타개하는 데에 실질적 도움이 되어 준 것은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변화된 생각이었습니다. 비록 자신도 가정적으로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사방의 몰이해에 둘러싸여 해결책을 찾지 못하던 빌리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윌킨슨 선생님의 사랑이 중요한 단초가 되었음이 그 첫 번째 예입니다. 저의 어린 시절만 해도 여자아이는 소꿉놀이나 인형 놀이, 남자아이는 칼 싸움과 전쟁놀이 하는 것을 불문율처럼 여기는 문화 •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음에 비교하면 이제는 그런 식의 고정관념을 비웃을 만큼 변화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직업은 물론 취미 분야에서까지 일정한 남녀의 구분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발레를 하고 싶다는 소년의 ‘꿈’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해 받기 어려운 ‘망상’이 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분야에 대해 잘 알고 또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른(윌킨슨 선생님)이 보여 준 “누구든지 발레를 할 수 있다”는 열린 생각이 아니었다면 빌리가 가졌던 굳건한 의지는 오히려 그에게 큰 상처만 남기고 말았을지 모르지요.
탄광 마을 특유의 고착된 관념과 가치관을 극복하고, 게다가 아끼며 간직하던 아내의 목걸이와 시계를 전당포에 맡기면서까지, 아들의 발레 공부를 위한 뒷바라지를 결심하며 과감히 ‘생각’을 바꾸는 용단을 내린 빌리의 아버지가 실제로 그 꿈을 실현시키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임도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런던이 어떤 곳이냐고 묻는 빌리에게 한 번도 고향 “더럼(Durham)”을 떠나 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고 대답하고, 나라의 수도인데도 못 가 본 거냐고 빌리가 다시 묻자 “런던에는 탄광이 없으니까”라는 대답을 건넬 만큼 평생을 좁은 틀 안에 갇혀 살아온 그가, 아들을 위해 그 억센 틀을 스스로 깨겠다는 결단을 용기 있게 내렸던 것이니 말입니다. 영화가 제작된 당시보다는 세상이 많이 바뀌었을 오늘날에도 부모 세대의 사람들이 자녀 세대를 통해 새롭게 깨치고 변화해 나가야 할 부분은 여전히 많을 줄 압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딱딱한 잣대로 섣불리 판단하려 들기보다 젊은 사람들에게 배우며 그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유연함으로 ‘휘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어른들이 더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예전의 영화나 TV 프로그램 등에서 다루어지던 소재이기에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기만을 바라지만, 간호사인 남성이 결혼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다루거나 의상 디자이너, 헤어 디자이너 등의 직업을 가진 남성을 성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인 양 희화화하는 내용들을 접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 편견을 깨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오늘날의 단계에 이르렀음에도 그처럼 편협한 생각을 계속 버리지 못하는 태도는, 각 사람에게 저마다 다른 은사를 주셨으며(롬 12:4-5; 고전 12:12) 어떠한 차별이나 편애도 없으신 하나님(신 10:17; 욥 34:19; 행 10:34; 롬 2:11; 갈 2:6; 엡 6:9; 골 3:25; 벧전 1:17)의 뜻에 맞지 않는 비성경적 자세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태 속에서 특정 분야의 직업에 ‘사람’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는 위태로운 미래를 목전에 두고 있는 이때, 적어도 ‘인간들’끼리만은 서로 똘똘 뭉침으로써 불필요한 구분과 소모적인 논쟁을 양산하지 않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딸 J의 시선
[빌리 엘리어트]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 중 하나인 제이미 벨이 2000 대 1의 경쟁을 뚫고 캐스팅되면서 아역으로 처음 데뷔했던 작품이다. 가장 근래 개봉한 [스파이더 맨] 시리즈의 주인공 톰 홀랜드 또한 이 영화를 각색한 뮤지컬 "Billy Elliot the Musical"에서 주연을 맡으며 연기 활동을 시작했는데, ‘성공’의 기회를 얻기 어려운 작은 시골에서 태어나 끝내 자신의 꿈을 이뤄 내는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이 현실에서도 두 아역 배우의 등용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꽤 흥미롭게 느껴진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주인공 빌리(제이미 벨)는 고단한 현실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11세 소년이다. 영화의 시대 배경인 1984년, 빌리는 영국의 북동쪽 지역인 ‘더럼’ 주(County Durham)의 탄광촌에서 무뚝뚝한 아버지 재키(게리 루이스)와 동생을 '쥐 잡듯' 잡는 나이 차 많은 형 토니(제이미 드레이븐), 정신이 온전치 않아 눈을 뗄 수 없는 할머니와 함께 산다. 가족의 정서적 기둥이던 어머니를 잃은 후 그들의 삶은 점점 더 황폐해지고 있는 데다, 설상가상으로 1984-85년 당시 실제로 일어난 광부들의 파업(UK miners’ strike)에 아버지와 형이 둘 다 참여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도 함께 겪고 있는 중이다.
암울하기 짝이 없는 현실임에도 이 어린 소년의 삶이 '다행히' 그렇게 각박하지만은 않다. 영화의 첫 장면은 빌리가 형의 레코드를 몰래 틀어 놓고 마치 하늘을 날듯 껑충껑충 뛰며 춤을 추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때 빌리가 입고 있던 총천연색의 옷을 포함하여 이후 카메라에 비춰지는 빌리 가족의 좁은 집에도 촌스러울 정도의 샛노란 페인트로 상징되는 어떤 ‘색’과 ‘활기’, ‘생동감’이 있다. 이 아이는 광부로 일하느라 새카만 '재'와 '흙'이 익숙한 아버지나 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사람임을 암시하고 있는 듯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어려운 형편에도 아들이 마을 회관에서 복싱을 배우게 하는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빌리는 체육관 한 귀퉁이에서 여자 아이들이 배우고 있는 발레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된다. 아버지가 복싱 연습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러 왔을 때는 링 위의 상대 소년에게 주먹을 날리지 못하고 ‘춤추듯’ 피하기만 하다가 결국 얻어맞기나 하고 말이다. 발레를 "여자애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빌리 스스로도 애써 외면하려 해 보지만, 연습장 주변을 기웃거리는 모습을 본 발레 선생님 윌킨슨 부인(줄리 월터스)에게 이끌려 얼떨결에 발레 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빌리의 재능을 알아 본 선생님은 엄격한 빌리 아버지 몰래 개인 교습을 해 주며 아이가 런던에 있는 국립 발레 학교(Royal Ballet School)의 오디션을 볼 수 있도록 주선하기까지 한다.
영화의 초중반 내내 빌리는 일정한 ‘전통’과 사회적 ‘상식’에 어긋나는 인물로 그려지면서 구시대적 편견과 성 역할 개념에 계속 부딪히게 된다. 빌리가 사는 마을에서 남자 아이는 복싱(혹은 축구, 레슬링)을 하고 여자 아이는 발레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해서 아이가 춤을 출 때 얼마나 행복한지 관객에게는 뻔히 보일 정도인데도 빌리의 아버지는 아들이 발레를 한다는 사실에 기절초풍한다. 흔히 말하는 ‘마초’ 중에서도 ‘상마초’인 빌리의 아버지 재키는 다시는 발레 할 생각을 말라며 으름장을 놓지만, 빌리는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대들면서 발레와 춤, 좀 더 근본적으로는 "온전한 나 자신이 될 자유" 쫓기를 멈추지 않는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이 작품은 아버지와 형으로 대변되는 가부장적이고 전통적인 ‘남성성’과, 빌리가 대표하는 유연하고 자유로운 ‘정체성’ 사이의 충돌을 동작과 움직임(motion) - 더 정확히는 physicality(완벽히 번역하긴 어렵지만 "신체 활동성" 혹은 "육체적 활동"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 을 통해 표현해 낸다. 빌리는 춤을 출 때뿐 아니라 걸을 때나 뛸 때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움직임을 유지하지만, 아버지와 형의 동작은 대부분 ‘공격성’과 ‘격렬함’으로 일관된다(파업 현장에서의 경찰과의 무력 충돌, 가족들 간의 싸움에서 보이는 폭력성 등). 대물림된 가난, 그리고 탄광업이라는 직종에 내재된 위험과 고됨에 익숙해진 아버지와 형이 몸과 육체적 움직임을 불만, 분노 등 부정적 감정들의 ‘폭발’에만 사용하는 반면, 빌리는 자신의 몸과 육체적 활동 능력을 감성과 영혼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쓰는 것이다.
빌리를 포함한 어린아이들이 발레를 배우며 우아한 동작을 연습하는 ‘움직임’이 시위 중인 파업 노동자들이 완전 무장을 한 경찰들과 서로 밀고 밀리며 싸우는 ‘움직임’에 겹쳐 보이는 장면에서도 이러한 '다름'은 시각적으로 대비되고 있는데, 여기서 춤을 추는 빌리는 점프를 하거나 피루엣을 도는 등 여러 가지 '방향’의 정교한 움직임을 보이는 반면, 아버지와 형을 포함한 탄광 노동자들은 앞으로 가거나 뒤로 밀리는 정도의 단순한 움직임만을 보여 준다. 이런 모습들을 자유롭고 폭넓은 생각과 의식을 가진 빌리와 좁은 관점 안에 갇혀 있는 아버지와 형을 대비시키기 위한 장치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비밀리에 국립 발레 학교 오디션을 준비하던 빌리는 시위를 하던 형이 탄광 노동자들을 진압하는 경찰에게 잡혀가는 바람에 결국 오디션 날짜를 놓치게 된다. 그로 인해 윌킨슨 선생님이 빌리의 집에 찾아오고, 동생이 발레를 배운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리는 형 때문에 선생님과의 관계는 파국을 맞는다. 그 뒤로 이어지는 장면은 앞서 다룬 ‘움직임’의 차이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들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빌리는 형과 선생님이 얼굴을 붉히고 소리 지르며 싸운 기억을 머리에서 지우기 위해, 그리고 발레를 하고 싶다는 자신의 외침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가족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춤을 춘다. 감정 표현에 미숙한 아버지와 형이 분노와 짜증, ‘힘’과 ‘공격성’에 근거한 움직임만을 보여 주고 있다면, 빌리는 자신의 부정적 감정들을 춤이라는 ‘아름답고 우아한’ 움직임으로, 다시 말해 '예술'로써 승화시키게 된 것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여러 중요한 장면들 가운데에도 이 장면이 특히 빌리의 성장, 아이의 내적 강함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빌리의 아름다운 ‘움직임’이 가족들의 단순하고 폭력적인 ‘움직임’과 대비될수록 아버지와 형이 안쓰럽게 여겨지는 측면도 있다. 아이의 꿈을 훼방 놓는다는 점에서는 전통적 ‘악역’의 위치에 선 인물들이라고 해야겠지만, 빌리의 ‘움직임’과 동작들이 정교해지고 우아해질수록 그의 형과 아버지가 얼마나 제한된 삶을 살고 있는지 더욱 선명한 대비가 이뤄지는 것이다. 복합적 의미의 인물인 빌리의 아버지가 발레를 하는 아들에게 착잡한 심정을 갖는 이유에서도 엿보게 되는 사실들이 있다. "여자애들이나 하는" 발레를 좋아하는 아들을 ‘남자의 수치’ 정도로 생각하는 듯도, 빌리의 성적 정체성을 의심하는 듯도 하지만, 사실 근본적 원인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춤추는 행위를 통해 ‘전통적 남성성’을 거부하는 빌리의 모습을 가부장제 전통 안에서 가장이자 가족의 부양자인(혹은 '그래야만 하는') 자신의 힘과 권력에 대한 거부 혹은 도전으로 여겨서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광부들의 파업 과정에서 수입을 잃으며 경제적 능력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아내가 죽은 뒤 가정을 제대로 꾸리지 못해 ‘가장’으로서의 정체성도 흔들리고 있는 빌리의 아버지 재키는, ‘경제적 부양 능력’과 ‘가족 내의 권위’라는 가부장적 체계의 대표 특성들이 사라지며 혼란을 겪는 기성세대의 남성들, 경제적이고 물리적인 ‘힘’으로 대표되는 ‘남성성’과 ‘남자다움'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세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던 중 언제나 교착 상태일 것만 같던 아들과 아버지의 신념이 마침내 접점을 만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집으로 찾아온 발레 선생님이 형과 크게 다툰 이후 발레를 포기한 듯하던 빌리는, 더 이상 참기 어려워진 크리스마스날 텅 빈 체육관에서 혼자 춤을 추다 불빛을 보고 찾아온 아버지와 마주치게 된다. 잠시 당황해 보였지만 곧 다시 정색하는 그는, 마치 반항하듯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자유롭게 춤을 춘다. 반항의 몸짓인 동시에 제발 나를 제대로 봐 달라는 애원이기도 할 아름다운 춤이 끝나고,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체육관을 나간다. 언뜻 차가워 보이는 반응이지만 아버지는 그 길로 윌킨슨 선생님의 집으로 향하고, 빌리의 꿈을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결국 그 체육관에서야, 수없이 말리고 협박했음에도 아이의 열정이 사그라들기는커녕 더 불타오르고 있음을 깨닫고 난 뒤에야 빌리를 ‘제대로’ 보게 된 것이다. 발레가 어떻고 남자가 어떻고, 그런 외적 판단을 차치한 채 새로운 눈으로 아이가 춤추는 것을 ‘처음’ 본 순간이었을 테다. 자식에 대한 사랑, 아이 자체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이 그 순간 그의 견고하던 고정관념, 의심과 걱정들을 기어이 깨부순 도구가 되어 주었겠지만. 직접 만들어 낸 일정한 틀 안에 갇힌 자신이나 큰 아들과 달리 자유롭게 움직이고 춤추는 아이를 보며 그 자유를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도 하고.
그리고 마초적 남성성 그 자체였던 아버지는 빌리를 뒷바라지할 돈을 벌기 위해 참여하던 파업을 멈추고 동료들을 ‘배신’할 마음까지 먹는다. ‘자존심’에 죽고 살았던 그로서는 뼈를 깎는 고통이자 수치심이었을 텐데 말이다. 큰 아들 토니가 아버지를 막기 위해 달려오자 아버지는 토니를 붙잡고 우는데, 여기에서의 그의 대사가 무척 마음 아프다. 빌리는 "아이일 뿐이니" 빌리에게 ‘기회’를 - 자신들은 갖지 못했던 - 주자는 것이다. 사실 빌리의 아버지가 갑자기 발레를 좋아하게 되었다거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거나 하는 상황은 당연히 아닐 것이고, 어린 아들이 도대체 왜 그렇게 춤을 추고 싶어 하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었으리라는 생각 또한 들지 않는다. 다만 자식에게, 그러니까 다음 세대에게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는, 자기 자신을 '검열'하며 제한하는 일에서 조금은 더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작동했을 듯하다. 그저 사랑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는 그런 마음 말이다.
결국 빌리는 오디션 참석을 위해 아버지와 함께 국립 발레 학교로 향하고, 아들과 아버지는 처음으로 나란히 앉으며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춤을 출 때 어떤 느낌이냐는 면접관들의 질문에 “하늘을 나는 새가 된 기분이다”라고 대답한 빌리는 마침내 오디션에 합격한다. 무척이나 감동적인 결말임에도 영화는 빌리의 이 대단한 성취를 그닥 유난스럽게 다루지 않는다. 빌리에게는 이제 꿈을 이룰 수 있는,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열렸지만 탄광 파업이 끝내 실패하며 동네는 침울해지고, 아버지와 형을 포함한 노동자들 모두는 결국 아무것도 얻어 내지 못한 채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 탄광 속으로 ‘내려가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빌리의 오디션 합격보다 아버지의 변화, 아들과의 관계 회복이 한층 더 중요한 성취이자 성공임을 영화가 말하고 있는 듯도 하다. 합격 소식을 들은 후, ‘나란히’ 앉아 있던 빌리와 아버지는 서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소리 내어 웃고, 장난치면서 풀밭을 뒹굴기도 한다. 아버지는 처음으로 아들을 안아 주는데, 언제나 ‘아래’에서 위로 아버지를 올려다 보던 빌리가 이 장면에서는 아버지의 ‘위’에 올라와 있다. 비슷한 결로, 런던을 향해 혼자 떠나는 빌리가 버스 정류장에서 배웅을 받는 장면에서 또한 그의 눈높이는 아버지나 형보다 위에 있다. 그 무뚝뚝하던 아버지가 아들을 아기 안듯 꼭 껴안고, 까칠하게 굴던 형은 버스 창문 사이로 동생을 올려다보며 보고 싶을 거라고 말한다. 빌리 자신이 가족들보다 더 나은 삶, 더 높은 위치에 다다를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하겠지만, 기성세대가 편견과 아집을 버리면 다음 세대를 자신들보다 더 높이 올려 줄 수 있다는 격려로도 이해하게 되는 장면이다.
그리고는 십여 년이 지난 미래, 아버지와 형은 성인이 된 빌리의 발레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런던으로 향한다. 무대 뒤에서 준비를 하다가 그들의 도착 소식을 듣고 웃음짓는 빌리와 달리 아버지는 시작 전부터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백조의 호수” 공연이 시작되자 빌리가 무대에 올라 높이 뛰어오르고, 아버지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조용히 숨을 들이키는 장면에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영화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애틋하고도 아름다운 장면이다. 아이가 자유롭게 비상하도록 해 주려고 오랜 관념과 아집을 버린 아버지에겐 그 무엇보다 확실하고 만족스러운 결말일 테니 말이다. 공연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하는 길, 그동안 제한되고 수평적인 움직임만을 보이던 아버지와 형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등장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빌리가 더 자유로운 삶을 누리도록, 더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그들 역시 고정된 관습을 따라 탄광 안으로 ‘내려가기’만 하던 삶을 넘어 결국 함께 위로 ‘올라가게’ 된 것은 아닐지.
빌리 엘리어트라는 인물 자체의 서사도 물론 감동적이지만, 아버지와 형의 변화와 희생이 그보다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는 것이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보며 느끼는 감상이다. 그저 아이가 시골을 떠나 도시로 상경해 성공할 수 있도록 물질적 지원을 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빌리의 꿈과 소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아이의 ‘움직임’을 제한하려 들던 가족이 결국 그 아름답고 자유로운 움직임을 제대로 직시하게 되었다는 것. 또한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겨 왔던 상식과 고정관념, 혹은 주위의 이목보다 아이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우선시하게 되었다는 것. 그를 통해 분노와 폭력을 위해서만 움직이던, 한정된 방향 안에서 밀고 밀리며 땅속으로 내려가기만 했던 그들의 제한된 삶 또한 높은 곳으로 올려지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자유로운 움직임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
여러모로 과도기에 있다고 할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 서로 다른 신념과 각기 다른 세대 사이의 수많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사랑과 이해뿐이라는, 다소 교과서적인 답변으로도 해석되는 결말이지만, 이미 완벽한 사랑과 이해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으로서 조금은 위로를 얻는 느낌이다. 결국은 우리 모두 함께 더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