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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 존스: 찾지 못할 뿐 사라진 것은 아닌 언약궤

by Joanne

딸 J의 시선



"인디아나 존스: 레이더스(Raiders of the Lost Ark)"는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고 생각되)는 영화다. 심지어 영화 자체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 유명한 주제곡은 어디에서든 한 번쯤 들어 봤으리라 생각한다. 듣기만 해도 신이 나는 명곡이기도 하다(혼자 뭔가를 찾을 때마다 흥얼거리게 된다).


“레이더스”는 해리슨 포드가 연기하는, 고고학 박사이자 모험가인 “인디아나 존스”라는 캐릭터가 처음으로 소개된 작품이다. 세계 2차 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의 1930년대가 배경인 이 영화에서 교수인 “인디”는 강단보다 ‘현장’을 더 선호하는, 고대 유물들을 연구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온갖 위험을 무릅쓴 채 그것들을 직접 찾아다니는 인물로 나온다. 그러던 중 미국 정보국 사람들이 그의 자문을 구하기 위해 은밀한 정보를 가지고 찾아오는데, 바로 독일 나치군들이 구약성경의 “언약궤,” 그러니까 모세가 호렙산에서 가지고 내려온 십계명이 새겨진 석판이 보관된 성궤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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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980년경 예루살렘을 침략한 이집트의 왕이 언약궤를 "타니스"라는 지역으로 옮겨 "영혼의 우물"로 불리는 비밀의 방 속에 보관했으나, 엄청난 모래 폭풍에 휘말린 타니스가 흙으로 뒤덮인 것으로 알려진다. 전세계에 분포된 여러 종교적 문화유산들을 찾고 있는 독일 나치군 소속 고고학자들이 타니스의 위치는 알아냈으나, "영혼의 우물"이라는 방을 찾기 위해서는 이집트 태양신 "라"의 지팡이 머리쪽 장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치군보다 먼저 언약궤를 찾으려는 미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된 인디는 언약궤의 행방을 연구했던 그의 전 스승 레이븐우드 박사를 찾아 네팔로 향하고, 그곳에서 레이븐우드 박사의 딸이자 전 연인인 “마리온(카렌 알렌)”과 재회한다. 그와의 관계에서 큰 상처를 입은 듯한 마리온은 - 정확한 내막은 설명되지 않지만 마리온이 ‘치를 떠는’ 것만 봐도 상당히 좋지 않게 헤어졌으리라 짐작된다 - 인디를 적대시하지만, 그를 쫓아온 나치군과 난투극을 벌이는 동안 얼떨결에 협조 관계가 된다. 인디와 마리온은 사망한 레이븐우드 박사가 남긴 태양신 지팡이 장식을 가지고 이집트 카이로에 위치한 독일군 발굴 현장에 도착하고, 그들은 나치군들과 나치 부역자이자 인디의 라이벌 고고학자인 “벨로크”를 마주한다.



나치군을 물리치고 언약궤를 찾기 위한 그들의 여정은 통쾌한 액션 활극 그 자체이다.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자로서의 자신의 장점을 모조리 털어 넣은 느낌이랄까? 시원시원한 액션 신과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흥미로운 스토리, 적절한 유머 감각 등등, ‘흥행성’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이해하는 감독 중 하나라고 할 스필버그 특유의 “crowd pleaser(관객을 즐겁게 하는 작품)”로 볼 수 있겠다.


실제로도 영화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이후 2, 3편이 각각 1985년과 1989년에 제작되었으며 2008년엔 ‘노년’의 인디아나 존스를 보여주는 4편이 개봉하기도 했다(곧 5편도 나올 예정인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3편인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Indiana Jones and the Last Crusade)” 외의 속편들은 그닥 취향이 아니었던지라 시리즈의 모든 영화들이 다 ‘재미있다’고 하긴 어렵지만, “인디아나 존스”라는 캐릭터 자체에 대한 애정만은 여전히 변함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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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해리슨 포드가 연기하는 인디아나 존스라는 캐릭터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물인데, “레이더스”보다 5년 먼저 개봉한 “스타워즈” 1편에서 연기한 “한 솔로”처럼 살짝 껄렁대면서도 그보다 더 어설픈 매력을 보여 준다(위장을 하겠다고 기껏 빼앗은 나치 유니폼의 사이즈가 너무 작아 당황하는 모습이나 ‘모험가’를 자처하면서도 뱀이 무서워 쩔쩔매는 모습 등등). 가죽 자켓 차림으로 특유의 모자를 쓴 채 채찍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있자면 세상에 저런 고고학자가 어디 있겠나 싶지만, 역사적 가치를 가진 유물들을 찾아내고 지키기 위해 너덜너덜해진 '꼴'로도 집요하게 목표물로 달려드는 모습에선 순수한 학구적 열정도 묻어난다(물론 다른 문화권의 유물들을 발굴하고도 미국 내의 박물관으로 가져가려는 그의 행동은 문화 제국주의의 정점을 보여 주지만, 1980년대 초에 제작된 영화 – 심지어 1930-4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 임을 고려해 이 부분은 조용히 넘어가도록 하겠다).


다만 이 영화 속에서 인디가 찾고자 하는 ‘유물’이 구약의 언약궤라는 점에서는 그의 이 순수한 ‘학문적 열정’이 씁쓸하게 다가오는 면이 있다. 영화의 초반부터 중후반까지 인디는 언약궤를 어떤 ‘역사적 유물’로, 혹은 기껏 해야 어떤 오컬트적 힘을 가진 ‘성물’ 정도로만 여기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자문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미 정보국 요원들에게 "언약궤"에 얽힌 배경을 말 그대로 ‘전설’ 취급하며 설명하기도 하고, 언약궤를 찾으러 가는 그를 걱정하는 동료에게 자신은 그런 ‘미신’을 믿지 않는다는 투로 코웃음을 치기도 한다.



사실 영화 자체에서도 "언약궤"가 어떤 ‘기이한 힘을 가진 물건’ 이상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듯하다. 나치군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앞세웠을 때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다는 성경 속 기록을 기반으로 언약궤를 ‘전쟁 무기’ 정도로 사용하려 들고, 비슷한 맥락에서 언약궤는 근처에 있는 동물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어떤 ‘소음’을 내보내거나 궤가 보관된 상자에 찍힌 나치군의 표식을 까맣게 태워 버리는 등의 ‘신비로운’ 모습들을 보인다. 하지만 그 원동력이나 이유 같은 것은 단 한 번도 설명되지 않고, "구약의 언약궤"라는 설정 외에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전무하달 정도이다.


이 글을 위해 영화를 다시 감상하면서 “레이더스” 속 "언약궤"가 기복신앙으로 변질되곤 하는 우리의 ‘신앙’을 대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작품 내내 그 누구도 언약궤의 힘의 진정한 원천에는, 그러니까 ‘하나님’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물론 나치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고고학자 벨로크가 언약궤는 “신에게 말을 걸 수 있는 라디오” 같은 물건이라며 흥분하긴 하지만, 여기에서 벨로크가 관심을 가지는 "신과의 대화"도 말하자면 ‘신적인’ 힘이나 지식을 얻게 될지 모르는 ‘기회’를 뜻할 뿐이지 진심으로 하나님과 개인적인 문답을 나누고자 하는 소망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하나님과 직통하는 "라디오"가 왜 굳이 필요한가? 하나님께선 이미 구약과 신약성경을 통해 우리가 그분과 ‘직접 대화하는 관계’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정확히 알려 주셨는데 말이다.



나치군들은 또 벨로크는, 언약궤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어떤 신령한 힘이 깃든, 소유하는 이에게 그 힘이 전이되는 ‘도구’ 정도로만 여긴다. 우리의 신앙이 기복신앙으로 변질되는 이유도 하나님을 ‘이해’하는 대신 ‘이용’만 하려 들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설 때 언약궤를 앞세우라 명하신 이유,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궤를 함부로 만졌다가 벌을 받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언약궤를 앞세움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에 대한, 말씀에 대한 ‘이해’가 없다 보니 그 말씀을 ‘이용’하려는 방식과 목적 또한 본질적으로 잘못될 수 밖에 없다. 사실 언약궤를 자신들의 전쟁 무기로 쓰고자 하는 나치의 계획처럼 아이러니한 것이 또 있을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랑과 보호를 베푸시기 위해 내리신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른 나라들을, 특히 유태인들을 짓밟는 데 사용하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힘'에 대한 이해 없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부적 쓰듯 이용하려는 모습, 또 사랑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차별과 증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용하는 모습과도 닮은 것으로보인다.






그래서 영화의 후반부, 나치군과 벨로크가 기어이 열어 본 언약궤에 십계명이 적힌 석판 대신 모래만 가득한 것은 약간의 ‘시적 정의’로 느껴진다. 그들이 실제로 쫓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허상’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듯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열린 언약궤에서 정체불명의 존재들이(뭔가 귀신 같기도 한데... 사실 감독도 어떤 정확한 존재를 염두에 둔 것 같지는 않다. 성경적인 존재들은 더더욱 아니고 말이다) 뛰쳐나와 ‘악인’들을 처단한 후, 언약궤를 연구하고자 하는 인디의 주장이 묵살된 채 성궤가 미국 정부에 의해 특급기밀로 분류되어 비밀 군사기지에 봉인되는 마지막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아니, 아무리 미국이라지만 저래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고. 하지만 또 한편으론 뭐,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 그분의 사랑과 은혜의 ‘현상’에 불과한 부차적인 것들(물질적 풍요, 명예, 성공 등)에만 집중하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처럼 아주 깊고 어둑한 곳에 대충 꾸겨 놓는 게 아닐까 자책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원제목이 “Indiana Jones and the Raiders of the Lost Ark”라는 사실도 조금 뜨끔하다.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 정도로 의역됐지만 “raider”라는 단어의 뉘앙스와 함축된 의미를 생각해 보면 잃어버린 성궤의 "약탈자들,” “침입자들,” 혹은 “도굴자들”로 직역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쫓는 마음의 의도가 항상 순수하지만은 못할지라도, 말씀의 ‘약탈자’로 불릴 일은 없기를 소망해 본다.




엄마 C의 시선



“Raiders of the Lost Ark(잃어버린 성궤의 추적자들)"라는 원제를 갖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레이더스”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던 이 영화는, “스타워즈(Star Wars)“ 시리즈로 잘 알려진 조지 루카스(George Lucas)가 각본을 쓰고 워낙 유명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연출을 맡았던 1981년 작입니다. 처음에는 “007 시리즈보다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자는 데에 의기투합을 한 두 사람이 단순히 재미있는 “B급 오락물”을 생각하며 기획했다고 하는데, 뜻하지 않게 다음 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편집상, 미술상, 음향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할 만큼 '예술성'도 인정 받게 되었고 흥행상으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주인공인 “인디애나 존스(Indiana Jones)”의 이름을 제목에 붙인 후속작이 시리즈 형태로 연이어 제작되었습니다. 자연스레 시리즈의 “1편”이 된 이 영화도 이후 제목을 “인디애나 존스와 잃어버린 성궤의 추적자들(Indiana Jones and the Raiders of the Lost Ark)“로 '길게' 바꾸었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소위 “어드벤처”물이라고 불리는 영화 장르의 고전이자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을 이 영화가 모험 어드벤처의 교과서 격으로 자리 잡으면서 점차 다른 '유사' 어드벤처 영화에서 여기에 나왔던 장면들을 패러디, 혹은 오마주의 형태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시작 부분에서 동굴에 보관된 황금 여신상을 가지고 나오던 존스가 자신을 따라 굴러 오는 거대한 바위에 쫓기는 장면이나 카이로(Cairo)의 시장통에서 칼로 자신을 위협하는 아랍인 무사를 향해 총 한 발로 ‘상황 정리’를 해 버리는 장면, 그리고 달리는 차 문이나 차 밑 부분에 매달려 떨어질 듯하면서도 끝까지 따라가는 것과 같은 장면들 말이지요. 인디애나 존스 특유의 중절모와 채찍 역시 학자이면서 '액션 영웅'이기까지 한 주인공들을 등장시킨 영화에서 트레이드마크 같은 이미지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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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대 배경은 생각보다 먼 과거라 할 만한 1936년으로, 고고학자인 인디애나 존스가 남아메리카의 열대 우림 속에 숨겨진 고대 사원의 신전에서 그곳에 있던 황금 여신상을 천신만고 끝에 찾아 손에 넣지만, 마지막 순간 억울하게도 프랑스 고고학자 벨록(Belloq)에게 - 돈을 위해 악역을 자처하는 - 유물을 빼앗긴 채 자신이 교수로 재직하는 미국의 대학으로 돌아와 강의를 하는 모습으로 도입 부분이 제시됩니다. 그런 그에게 정보국 요원들이 찾아와서 베를린으로 송출된 무선의 도청을 통해 취득한 암호의 해석을 의뢰하고, 그 내용의 분석으로 독일 정부가 잃어버린 성궤를 찾고자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를 발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존스는, 나치보다 먼저 성궤를 찾으려는 정부의 후원 아래 성궤를 연구하던 스승 에브너 레이븐우드(Ravenwood) 박사를 만나기 위해 그가 있는 네팔로 서둘러 떠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성궤”란 기독교인들이 잘 아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는 “언약궤(the Ark of the Covenant)”를 가리키는데, 가나안에 정착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에 보관하던 중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이 궤는 전설에 따르면 이집트 왕 시삭(Shishak)이 예루살렘을 침략했을 당시 자신의 나라 타니스(Tanis) 지역으로 옮겨 “영혼의 우물(the Wells of Souls)”이라는 비밀의 방에 감춰 뒀지만 하나님께서 내리신 진노 때문에 모래 폭풍에 매몰되고 말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설정입니다. 나치 독일이 그 궤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이유는 성궤를 손에 넣으면 자신들의 군대가 '무적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고, 성궤를 찾기 위해서는 태양신 지팡이(the Staff of Ra)에 부착되어야 할 - 레이븐우드 교수가 갖고 있던 - 메달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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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항로를 거쳐 도착한 네팔에서 이미 사망한 레이븐우드 교수 대신 그의 딸인 – 그리고 자신의 옛 연인이기도 했던 – 마리온(Marion)을 만난 존스는, 아버지의 메달을 가지고는 있지만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그에 대한 화가 풀리지 않아 도와줄 수 없다고 거절하는 마리온과 티격태격하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나치 토트(Toht) 일당과 총격전을 벌이게 되고, 간신히 상황을 벗어난 두 사람은 독일군의 발굴 현장이 위치한 카이로로 향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성궤가 있는 “영혼의 우물”의 위치를 알아낸 존스는 독사가 가득하던 그 우물에서 성궤를 찾지만, 탐욕 때문에 나치와 손잡은 벨록에게 다시 빼앗기고, 몸이 묶인 채 나치 일당과 벨록이 성궤를 여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하지만 성궤의 저주로 그들 모두가 죽음을 맞으면서 눈을 감고 있던 존스와 마리온만 살아남아 성궤를 되찾게 되지요. 그토록 힘들게 되찾은 성궤를 국가가 ‘빼앗아’ 미국 일급 기밀 군사 기지의 한 창고에 보관하는 것으로 영화의 내용은 마무리됩니다.


영화 제목은 물론이거니와 전체 내용에서 주목하는 대상이 하나님의 “언약궤”인 만큼 관객의 입장에서는 – 특히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대상의 '형태'와 '기능'에 대한 상상과 추측을 계속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영화가 개봉되었던 1981년 당시엔 하나님도 성경도 전혀 알지 못하던 제가 그 “성궤”라는 것을 “보물 상자” 비슷한 ‘신비로운’ 무언가로 머릿속에 그려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실상 “우상 숭배”와 “토테미즘(totemism)”적 사고 체계를 면면히 이어받은 '한국 문화 전승자’의 입장에서는 뭔가 ‘영험한’ 힘이 있는 물체인가 보다 정도의 짐작 밖에 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끄럽기도 한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기독교인 아닌 수많은 관객들이 예전의 저와 같은 관점으로 지금도 영화를 보고 또 “언약궤”를 이해할 현실에 대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이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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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의 언약궤도 하나님을 모르던 당시의 제가 상상하던 “성궤”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는 헐리우드 대규모 영화사들의 상당수가 유대 자본에 의해 움직일 뿐 아니라,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의 제작자인 멜 깁슨(Mel Gibson)을 맹비난했다는 유대인 연출자 스필버그와 각본 작가 루카스의 인식 등이 그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하는 대목으로, 구약성경만을 알고 믿을 그들이 언약궤를 마치 “요술 램프“와 같은 물건으로 상정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짐작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자신들의 진영에 들어오자 전쟁에 이미 승리라도 한 듯 환호성을 지르던 이스라엘인들(삼상 4:5-6)이나 오벧에돔의 집에 보관된 언약궤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축복하신다는 말을 듣고 ‘질투’의 염이 없지 않은 상태로 궤를 가져 왔을 다윗(삼하 6:11-12; 대상 13:14; 15:25)의 경우에 비유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궤를 보고 환호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이 영화에서의 독일군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환호 직후 곧바로 언약궤가 블레셋에 의해 탈취될 것임(삼상 4:11)과, 이후 다시 이스라엘로 반환되었을 때에도 ‘반가운’ 마음에 그것을 들여다 본 벧세메스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5만명 넘게 치시고(삼상 6:19), 이후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다(삼상 7:1; 대상 13:6-7) 다윗 성으로 옮겨 오려던 과정에서 움직이는 궤에 손을 댄 웃사를 죽이시기도(삼하 6:6-7; 대상 13:7-10) 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의 주님”이시기는 커녕 “잔인하고 무자비한 여호와”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구약을 읽는 사람들이 늘상 예로 들면서 '애용’하는 구절이며, 이 영화에서 하나님의 '진노'로 궤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설정이나 “성궤“를 만지고 연 사람들이 끔찍하게 죽는 장면이 삽입된 배경이기도 하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실상 민수기 4장 15절에서 “거룩한 물품들에 그들의 몸이 닿았다가는 죽을 것이다; 우리말성경 (they must not touch the holy things or they will die)”라는 경고이자 ‘약속’의 말씀을 이미 주신 바 있는데, 지난 편의 “신실하신 하나님”에서도 강조했었듯 하나님께서는 늘 “약속 이행“이라는 품성을 통해 스스로의 신실함을 증거하시는, “변화될 수도, 변화할 수도 없는” 존재이십니다. 그토록 명확한 약속의 말씀을 잊거나 간과해서 화를 자초한 것은 문제를 야기한 당사자들의 책임이지 주신 약속을 신실히 실행하신 하나님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갈 문제는 결코 아닐 겁니다. 또한 위의 두 사건은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 친밀함을 맺고 유지하는 일이 무척 주요한 기독교 이념의 근간이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의 “성스러우심,”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 신성하심의 특성을 잊거나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의 “reminder”였을 수도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법궤가 자신의 집에서 3개월을 머무는 동안 그 존재에 너무 익숙해졌을 웃사는 하나님의 성스러움에 무감각해졌을 수도, 혹은 자신들이 누렸던 은혜가 본인들의 '특별한 무언가'로 인한 축복이라고 생각하여 부지불식중 교만이 고개를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통해 언약궤에 대해 가져야 할 마음 자세는, 요단 강을 건널 때 백성들에 앞서 물을 가르는 역사에 함께했고(수 3:3-17) 여리고 성 정복 시 성벽이 무너지는 현장에 함께했던(수 6:4-20) 언약궤가 어떤 경우에는 두렵고 무서운 '죽음'의 자리에도 함께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궤“라는 물건 자체에 어떤 '영험한' 힘이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증거궤(the Ark of the Testimony)“라고도 불리는 - “증거판(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즉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말씀)이라는 “증거“를 포함하고 있는 - 이 언약궤가 하나님의 존재/임재를 상기시키는 '매개체'에 불과함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언약궤”라는 대상에 대한 우리의 접근방식은, 그곳에 담긴 “말씀”에의 경외와 함께 주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수 3:5)을 잊지 않게끔 돕는 “기념물(memorial)“로 이해한(수 4:6-7) 여호수아의 자세여야 하며, 힘들고 답답한 상황이 닥쳤을 때 점을 치기 위해 우림이나 둠밈처럼 사용하려던 사울의 태도(삼상 14:18)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언약궤를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에 숨겨 두신 이유도 아마 눈에 보이는 물체에만 집중하는 인간들에게는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우상”이 될 수 있어서일지 모르겠습니다. 이 성궤를 “하나님과 통신할 수 있는 무전기(transmitter: a radio for speaking to God)”로 묘사하는 벨로크에게 “하나님과 대화하고 싶은가”라고 묻던 존스의 말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고 계신 질문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특정한 물체, 특정한 장소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분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은, “말씀” 아닌 그 무엇에서도 해답을 찾으려 해선 안 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 숭배” 그 자체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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