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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Jul 19. 2024

어 퓨 굿 맨: 소수정예의 가치가 회복될 날을 기다리며

딸 J의 시선



롭 라이너(Rob Reiner) 감독의 1992년 작 [A Few Good Men]은 정확히 1년 전 나라를 지키던 한 청년의 귀한 목숨이 안타깝고 어이없게 큰물에 휩쓸려 간 비극과 연관되며 최근에도 많이 주목 받고 있는 작품이다. 여전히 명확한 규명이나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유사한 내용의 영화를 다루는 것이 너무나 처연한 일일 수 있어 주저되는 점도 없지 않았지만, 최근 미국 대법원이 전 대통령의 면책 특권에 관해 내린 결정 등 세계 각국에서 강자의 논리를 법적, 상식적 규율과 원칙보다 우선시하는 행보가 목격되는 이때 한번쯤 짚고 넘어갈 만한 의미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씁쓸한 마음으로 제헌절을 맞는 지금 더욱 생각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악명 높은 관타나모 만(Guantanamo Bay)에 위치한 해병 기지에서 이등병 "윌리엄 산티아고"가 동료인 일병 "해럴드 도슨"과 이병 "로든 다우니"에 의해 가혹행위를 당하다 사망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두 해병이 기소되자 해병대 고위 간부들은 로스쿨을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지금껏 담당한 사건들을 모두 ‘합의’로 해결해 온, 법정 경험이 전무한 새내기 군법무관 "다니엘 캐피" 중위(톰 크루즈)에게 변호를 맡긴다. 여느 때처럼 건성건성 사건에 임한 캐피 중위는 산티아고 이병이 부대에 적응하지 못하던 천덕꾸러기였다는 점, 또 그가 ‘전출’을 부탁하려고 정치인, 군 감찰부 인사 등 군 내외 인물과 기관들에 여러 차례 편지를 쓰는 과정에서 관타나모 기지 안의 어떤 문제에 대해 폭로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 사건을 원한에 의한 살인이나 과실치사일 것으로 단정한다. 이에 따라 군검사 "잭 로스" 대위(케빈 베이컨)와 타협해 최대한 낮은 형량을 받아 내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하려 하지만, 사건의 수상함을 감지하고 관심을 갖게 된 해군 소속 수사관 겸 내무부 특별검사 "조앤 갤러웨이" 소령(데미 무어)이 다우니 이병의 변호인으로 선임되면서 그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모범적이고 열정에 찬 갤러웨이 소령과 그와는 다르게 껄렁하고 불성실해 보이는 캐피 중위는 사사건건 의견을 달리하며 부딪히게 되는데, 도슨 일병과 다우니 이병이 상관의 명령 때문에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확신으로 그들을 성실히 돕고자 하는 갤러웨이 소령과 달리 캐피 중위는 오직 자신이 ‘증명’할 수 있는 사실에만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수사 목적으로 방문한 관타나모 기지에서 사령관 "네이선 제셉" 대령(잭 니콜슨)과 어딘가 석연치 않은 만남을 가졌던 변호팀은, 제셉 대령이 기지 내의 치부를 외부에 폭로하려 한 산티아고 일병의 행보에 분개해 그에 대한 "코드 레드"(Code Red), 즉 ‘버릇을 고치기 위한’ 비공식적 구타와 ‘얼차려’를 명한 장본인이며, 도슨 일병과 다우니 이병은 그 명령에 따라 행동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별 물증 없이 심증뿐인 상황인 데다 사건의 책임자인 제셉 대령이 백악관 국가안보위원회(NSC) 위원으로 내정된 ‘대단한 인물’이라는 점을 우려한 캐피 중위는 사건을 재판까지 끌고 가는 일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군검사와의 합의로 가장 적은 형량을 제안 받는 데 성공했음에도 자신들은 명령을 따랐을 뿐 "잘못한 것이 없다"는 주장을 이어 가는 도슨 일병과 다우니 이병의, ‘쉬운 길’을 ‘어렵게’ 돌아가려는 모습에 캐피 중위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광적일 정도로 해병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며 명예와 규율을 목숨보다 중요시하는 도슨 일병과도 마찰을 빚는다. '이기지 못할 싸움'에 줄곧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다 변호인 자리까지 사임하려던 그는, 마지막 순간 마음을 바꿔 갤러웨이 소령과 선배 군법무관 "샘 와인버그" 중위와 함께 도슨과 다우니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게 된다.  





이 영화는 제 6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했으며(그 외의 세 개 분야에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될 만큼 객관적으로 훌륭하다는 인정을 받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도 완성도와 작품성을 높게 평가하는 이 영화가 "애런 소킨"(Aaron Sorkin)의 각본으로 제작된 작품이라는 사실은 가장 뚜렷한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정확히 말해 애런 소킨이 쓴 동명의 연극 각본을 그 자신이 각색했다는 것인데, 그래서인지 감독인 롭 라이너보다는 원작자이자 각본가인 소킨의 영향이 작품 안에서 훨씬 더 두드러진다(물론 소킨이 각본을 맡은 영화들 대부분이 감독보다 작가의 특성을 더 강하게 드러낸다고 생각되긴 하지만 말이다). 미국 대통령과 참모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웨스트 윙]을 통해 한국 관객에게도 잘 알려진 작가이자 프로듀서인 애런 소킨은 “소킨 식”(Sorkinesque) 각본 혹은 작품이라는 형용사가 공공연하게 사용될 정도로 헐리우드 영화사에 큰 획을 남긴 인물이다. 특히 ‘말’로 이루어지는 ‘대사’의 중요성을 잘 아는 창작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도 속사포처럼 휘몰아치는 대사, 즉 행동이나 액션이 아닌 ‘말’을 통해 인물들 사이의 갈등과 긴장이 최고도로 끌어올려진다.


이 영화를 특별히 중요하고 의미있는 작품으로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법’과 ‘힘’에 관해 깊이 성찰해 볼 만한 화두를 던지기 때문이다.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며 흥미로웠던 - 동시에 약간 서글펐던 - 사실은, 영화 초반 갤러웨이 소령과 캐피 중위가 대립각을 세우는 동안 나의 의견이 캐피의 그것과 대부분 일치했다는 점이다. 갤러웨이의 열정과 정의감은 훌륭하고 본받을 만 하지만, 산티아고 일병의 사망을 둘러싼 ‘진실’이 무엇이든 법정에서 ‘증명’될 수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캐피의 일침이 가장 현실적인 판단이기 때문이다. 변호사라는 직업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법적 효력을 가진 증거를 사용해 의뢰인의 무죄를 ‘입증’할 확률, 다시 말해 재판에서의 승소 확률이 낮을 경우 무작정 의뢰인의 무죄를 외치며 법정으로 향하는 것은 오히려 직무유기에 해당하는 일일 수 있다.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갤러웨이의 '순진한' 이상보다는 군검사를 반협박해서라도 최대한 가벼운 형량을 협상하는 캐피의 실용주의가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직업윤리에 부합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캐피와 변호팀은 결국 재판을 통해 싸우기를 택하고, 이 결정은 ‘법적’인 시각에서는 그닥 현명하지 않을지언정 윤리적, 도덕적으로는(그리고 결과적으로도) ‘옳은’ 선택이 된다. 현직 변호사가 하기에는 ‘불경스러운’ 표현일 수 있겠지만 사실 현 사회의 법은 ‘진실’과 ‘정의’를 가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도구이니 말이다.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 유능한 변호인 군단을 선임할 수 있는 실질적 불평등 외에도 증거를 채택하는 방식, 증인의 신뢰성을 평가하는 기준, 인과관계를 수립하고 ‘법적’ 책임과 죄를 묻기 위해 충족시켜야 하는 요건 등등 오늘날의 법에 내재하는 한계와 부당성을 오히려 변호사가 된 이후 더욱 뼈저리게 깨닫는다. 약자를 보호하는 최소 장치인 법마저 결국은 강자들의 세계관과 이해관계 속에서 탄생했다는 제약과 한계가 존재하기에, 이처럼 ‘법적’ 승리의 확률이 희박한 상황에서 ‘법’의 판단을 받고자 법정으로 향하는 변호팀의 결단은 아이러니하게도 법이 갖는 제약적 원리, 강자가 규정하는 ‘합리성’과 ‘정당함’에 대한 본질적 거부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결국 변호인단이 재판에서 ‘승리’하는 요인이, 여러 정황 증거들을 끼워 맞추며 ‘입증’의 방식을 통해 드러낸, 캐피 중위가 중요시하던 ‘법적 사실’이 아니라 갤러웨이 소령과 두 해병이 그렇게나 바랐던 ‘완전한 진실’이라는 설정도 의미 있게 다가온다. 반복되는 실수와 미숙함으로 자신들의 변론에 큰 구멍이 뚫린 뒤 캐피 중위는 그때까지 외면했던 최후의 수단, 즉 제셉 대령을 증인으로 세우는 초강수를 결정한다. 배심원들 앞에서 표정 하나, 손짓 하나 조심하며 ‘세일즈맨’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동료 변호사들을 다그치듯 전략을 세우던 그가 이번에는 제셉 대령이 진실을 말하도록 만들겠다는, 허무할 만큼 간단한 계획만을 제시한다. 실제 심문 중에도 캐피와 제셉의 대치에는 별다른 전략적 구성이 보이지 않으며 - ‘엘리트’인 자신을 향한 제셉 대령의 반감과 피해의식을 캐피 중위가 살짝 건드리긴 하지만 - 결국 둘의 말싸움은 ‘진실’을 알 권리를 내세우며 희생자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요구하는 캐피에게 제셉이 대응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뿐이다. 군인에게 필수적인 ‘군기’를 잡기 위해 ‘마땅히 할 일’을 했다고 믿는 제섭 대령은 자신에 대한 공격을 참지 못하고 본인이 코드 레드를 ‘지시’했음을 제법 당당히 시인하는데, 그렇게도 원하던 결과를 얻은 이때 캐피 중위의 얼굴에 스치는 경악, 또 법정 전체에 내려앉는 충격 섞인 침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법적’ 논리와 문법을 벗어난 진정한 ‘진실’의 공개가 불러온 파장, ‘정의’와 ‘진실’마저 지배하고 관리하던 강자의 제도가 단번에 붕괴되는 순간으로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권력자가 ‘스스로’ 죄를 시인해야만 진실이 밝혀진다는, 힘을 가진 당사자가 ‘자멸’하지 않는 이상 단죄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씁쓸한 현실을 반영하는 결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통과 신음은 존재하는데 그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현시대를 생각하면 자신이 지은 죄를 직접 인정하며 몰락하는 제셉 대령의 최후는 어딘가 과격하게(radically) 희망적인 면도 있다. 그것이 비록 자신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한, 착각과 오만에 근거한 자백일지라도, 스스로가 한 일을 인정한 권력자와 주저 없이 일어서서 그를 체포하는 군검사 로스 대위의 모습이 꽤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평상시 ‘법’과 ‘권력’의 구조가 가진 자의 이해관계에 의해 약자들과 ‘대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진실’과 ‘정의’의 실상이 뚜렷하게 드러났을 때만큼은 같은 목적과 의도를 확인하며 나란히 서기를 바라는 것이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으로 치부되어야 한다면, 그런 세상은 참으로 슬픈 곳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제셉 대령의 자백은 마침내 도슨 일병과 다우니 이병에게까지 변화를 불러온다. 제셉 대령의 극적 증언 이후 두 해병은 살인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지만 군인으로서의 "직무유기"(conduct unbecoming)라는 죄목에 관해서는 유죄가 판결 되어 불명예제대를 선고 받는데, 군 내의 규율과 상명하복 원칙을 거의 종교적으로 신봉하며 산티아고 일병의 죽음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듯하던 도슨 일병이 이때 처음으로 본인의 잘못과 ‘책임’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도 자랑스러워하던 해병대 정신의 본질은 규율이나 복종이 아니라 "약자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었다고 말하며 산티아고 일병을 지켜 주는 일에 실패함으로써 군인의 의무를 저버렸다는 사실을 시인하면서, 영화 내내 상대적 ‘약자’로 보이던 도슨 일병과 다우니 이병이 자신들도 누군가에게는 ‘강자’였으며 폭력과 억압을 휘두른 ‘가해자’였음을 깨닫는 순간을 맞는다.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는 약자들의 처절한 외침이 책임자의 자백과 인정으로 이어질 날을 여전히 꿈꾸며 기다린다. 법과 제도가 사회를 통제하는 도구로만 쓰이는 대신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모두의 발 아래 든든한 기반이 되어 줄 순간 또한.  모두가 죄인인 세상에 천국이 도래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죄를 숨기고 부인하지 않으며 각자가 허물을 인정하고 책임을 자임함으로써 위에서 아래로, 또 옆에서 옆으로 전하고 남긴 상처들을 치유하기 시작하는 일이리라 믿는다.  


  


엄마 C의 시선 



1992년 개봉된 “어 퓨 굿 맨(A Few Good Man)”은 “웨스트 윙(The West Wing),” “대통령의 연인(The American President)” 등 정치색 짙은 드라마와 영화들의 각본을 집필한 애런 소킨(Aaron Sorkin)이 실화를 바탕으로 썼던 동명의 희곡을 각색하여, “프린세스 브라이드(The Princess Bride),”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When Harry Met Sally),” “미저리(Misery)” 등의 문제작들을 연출한 롭 라이너(Rob Reiner)가 감독을 맡아 제작된 법정 영화입니다. 동료 해병대(USMC) 대원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두 해병 대원의 군법회의 과정과 이들을 변호하는 군법무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199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편집상, 남우조연상, 음향상 부문에 후보작으로 올랐고 같은 해 MTV 영화 & TV 시상식에서 베스트 영화 작품상(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이자 미국의 적국인 쿠바 섬 내에 위치한 해병 기지 “관타나모(Guantanamo)”를 지리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에 상당수의 인물들이 – 사실상 군인들이 –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주인공 격이라고 할 수 있을 대표적 인물로 “대니얼 캐피(Daniel Kaffee) 중위,” “네이선 제셉(Nathan Jessep) 대령,” “조앤 갤러웨이(JoAnne Galloway) 소령”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전직 법무장관인 군법무관 캐피 중위는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후 임관하여 기지에 부임한 촉망 받는 법률가임에도 일에 대한 큰 열정 없이 대다수 사건을 합의(out-of-court settlement) 방식으로 해결하며 운동에만 몰두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해병대 기지의 사령관인 제셉 대령은 본인의 임무에 대한 자부심으로 철저하게 무장된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군인으로, 그의 이런 특성이 애초 영화의 중심 소재인 사망 사건을 촉발합니다. 한편 해군 소속 수사관이자 변호인으로 파견된 갤러웨이 소령은 이들과 달리 정의와 이상을 추구하는 법무관이며, 이번에도 협상을 통해 사건을 적당히 마무리하려는 캐피 중위와 대립하면서 원칙적이고 도덕적인 방식으로 문제 해결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그의 죽음이 영화의 중심축이 되는 “산티아고(William Santiago) 이병”은 지병을 갖고 있는 데다 동료 병사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하는 소위 “관심 병사”입니다. 하필 해병대 내에서도 가장 ‘군기’가 세고 훈련이 힘든 관타나모 기지에 배치된 그는 부대 생활에의 적응이 힘들자 감찰부, 상원의원 등 군 내외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전출을 요청하는데, 내부의 문제를 외부에 알리며 절차를 무시하는 듯한 그의 행동에 분노하던 사령관 제셉 대령은 소대장인 “켄드릭 중위(Jonathan Kendrick)”에게 “코드 레드(Code Red)”를 지시하며 ‘버릇을 고쳐’ 놓으려 합니다 - “코드 레드”란 한국 군대 안에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비공식적 구타와 ‘얼차려’를 가리키는 말이지요. 산티아고 이병의 문제를 본인의 희망대로 전출을 통해 해결하자고 건의한 – 자신의 부지휘관이자 해군사관학교 동기이기도 한 – “마킨슨(Matthew Markinson) 중령”의 의견을 묵살했던 제셉 대령은, 막강한 권력의 “국가안보회의” 위원으로의 영전이 예정된 상황에서 발생한 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의 명령에 따라 코드 레드를 실행했던 켄드릭 중위 소대의 두 병사, “도슨(Harold Dawson) 일병”과 “다우니(Louden Downey) 이병”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가도록 조치합니다.  


자신에게 이 사건이 맡겨지자 타고난 ‘법 감각’을 가진 캐피 중위는 골치 아플 것이 뻔한 법적 분쟁을 피하기 위해 검사 측인 법무장교 “로스(Jack Ross) 대위”와의 타협을 시도하지만, 자신이 가진 막강한 힘으로 치밀하게 증거를 인멸하고 “전출 명령서”나 “관제탑 근무일지” 같은 공문서들을 조작한 제셉 대령의 본모습을 알게 되면서 갤러웨이 소령과 힘을 합쳐 진실을 밝히는 법정 다툼에 나서기로 결심합니다. ‘현실주의자’에 해당할 캐피 중위와 ‘이상주의자’라고 불릴 만한 갤러웨이 소령,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완급(緩急) 조절’의 역할을 담당하는 “와인버그(Sam Weinberg) 중위”까지 포함된 변호인단의 노력으로 결국 제셉 대령과 켄드릭 중위는 구속 수감되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상관의 명령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군인의 본분이라 여김으로 결국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된 두 해병의 살인 혐의가 무죄로 판명되기는 하지만, 명백한 불법 명령조차 거부하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동료를 죽음으로 내몬 그들의 무책임한 행위에는 불명예제대라는 퇴출 명령이 내려지지요.





무척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보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32년 전 미국에서 만들어졌던 영화가 대체 어떻게 지금 한국에서 “현재진행형”인 사건들을 정확히 ‘종합’해 놓은 듯한 내용을 담고 있는가, 시대와 국가를 초월하며 유사한 사건이 계속 발생될 만큼 역사는 왜 ‘반복’을 거듭할 뿐 ‘진보’를 하지 못하는 것인가 라는 고통스러운 확인이었습니다. 진급을 앞둔 시점에 자신의 실책을 숨기고 속이며 부하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는 물론, 몸이 약하거나 정신적으로 강인하지 못한 병사에게 소위 “얼차려”라는 명목으로 가해지는 폭력 행위, 그에 더해 그 모든 일들은 군대 내에서, 군인으로서 ‘겪어 내야’ 하는 당연한 과정인 양 일말의 책임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지휘관들의 태도를 보면서 말이지요. 자신의 행위가 진정한 ‘애국’인 양 착각하는 제셉 대령과 달리 양심의 가책을 피할 수 없었던, 제셉과 해사 동기이면서도 중령이자 그의 부지휘관이던 마킨스가 – 그런 사실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해병대 문화에 약샥빠르게 ‘적응’하지 못했는지를 알 수 있는 – 군사재판에서 증언을 해야 할 상황에 놓이자 해병대 내의 비리를 폭로하는 대신 사건 발생을 막지 못한 자신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에서도 여러 가지 착잡한 생각들이 끊임없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변호 임무에 가담하고 싶지 않아 하던 와인버그 중위에게 갤러웨이가 “왜 그렇게 그들(코드 레드를 실행한 두 병사들)을 미워하느냐”고 묻자 와인버그는 “그들은 약한 상대를 괴롭히고 고통을 줘 죽음에 이르게 했으며 그런 짓을 한 이유도 단지 그가 ‘빨리 달리지 못하는’ 군인이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실제로도 제셉 대령의 명령대로 코드 레드의 실행을 지시했던 켄드릭 중위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대목이나, 막상 위기에 처하자 자신들을 보호해 주기는 커녕 도리어 도리어 책임을 떠넘기는 군 수뇌부에 환멸을 느끼며 재판 과정에서 깨닫게 된 진실(‘군인으로서의 명예’보다 ‘인간으로서의 양심’이 더 중요하다는)로 인해 점차 변화를 보이는 두 병사가, 그 이전엔 잘못을 시인하고 증언에 임하도록 설득하는 캐피 중위를 경멸하며 자신들의 그릇된 신념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면서, 잘못된 ‘신념’으로 무장하는 일은 차라리 신념이 없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잘못되고 왜곡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위험하며 타락의 길로 쉽게 이를 수 있다는 사실과도 맥이 닿아 있는 측면이겠지요.   





그럼에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 해병 대원으로서의 ‘직무유기’ 부분에 대한 죄가 인정되며 불명예제대 처분이 두 병사에게 내려지자 도슨 일병의 말을 무조건 따르던 다우니 이병이 자신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며 변호인에게 따졌을 때, 사실상 분명한 잘못이 있음을 인정한 도슨이 “스스로를 위해 싸울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대신 싸워 주었어야 옳았다(We were supposed to fight for people who couldn’t fight for themselves)”라고 말하는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자세인 - 장면에서는 작으나마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셉 대령이 자신의 죄를 (홧김에) 시인함으로써 다행히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의 결말이 그다지 기쁘지만은 않았던 것은, 우리의 실제 삶에서도 자신의 ‘앞길’에 대한 두려움 없이 힘 있는 상관의 죄를 소신껏 파헤칠 수 있는 법조인들이 정말로 존재할까,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서 죄지은 당사자들이 권력의 비호 없이 제대로 죗값을 치르는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에 대해 강한 의문이 들기 때문이었으니까요. 


법정에서 계속되던 캐피 중위의 심문에 화가 치솟은 제셉 대령이 “너는 그 ‘진실’을 감당할 수 없고, 또 진실을 알고 싶지도 않을 것 (You can't handle the turth... You don't want the truth)”이라고 말하면서 상대방을 “내가 제공하는 ‘자유’라는 담요 속에서 잠들고 깨어나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모습에서 그의 독선과 아집을 명확히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현재의 자신이 있기까지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움을 베푼 타인들의 사랑과 희생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만 옳다고 여기고 본인이 타인에게 베푼 도움만 기억하는 사람은 자신의 뿌리 자체를 부인하는 격이 될 것이고, 그처럼 부패한 가치관, 낡은 문화가 기성세대에게 만연해 있다면 다음 세대의 ‘밝은’ 미래란 결코 기대할 수 없는 꿈에 그칠 테니까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다수의 희생을 불러온 사건의 피해자들이 주로 젊은 세대인 것처럼 말입니다.     





영화의 제목인 “A Few Good Men”은 “소수정예”라고 하는 관용구적 의미도 있지만 미 해병대가 자신들을 일컫는 슬로건으로도 쓰이는 말입니다. 해병대의 모병 광고에 “We're looking for a few good men”이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까요. 사실 저는 한국 해병대가 표방하는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었다면 나는 해병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구호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 문장에서 “해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자리에 “기독교인/크리스천”이라는 말을 넣고 마음속으로 혼자 선포를 해 보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 즉 “A Few Good Men” 중의 하나임을 모든 기독교인들이 잊지 않기를 바라는 동시에, 부디 한국의 해병 대원들이 “A Few Good Men”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기하며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는 날이 하루속히 올 수 있기를 또한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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