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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Dec 21. 2024

스크루지: ‘승리의 노래’로 기억될 올해의 캐럴

딸 J의 시선



빌 머레이 주연의 1988년 작 [스크루지](“Scrooged”)는 나에게 크리스마스 때마다 떠오르는 무척 친숙하고 ‘친밀한’ 영화 중 하나이다. 물론 작품 자체가 뛰어나거나 큰 여운을 남겨서라기보다는 어릴 적 - 그러니까 OTT나 ‘스트리밍’이라는 시청 모델이 존재하기 전 -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여러 TV 채널에서 돌아가며 ‘틀어 주는’ 영화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보기엔 그닥 적합하지 않은 이 블랙 코미디를 왜 그렇게들 자주 방영했는지 약간의 미스테리이기도 하다. 솔직히 ‘명작’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영화지만,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태도와 철학에 관한 여러 생각을 불러오는 발판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번 포스팅의 작품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영화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스크루지]는 찰스 디킨스의 1843년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A Christmas Carol), 즉 "스크루지 영감"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스크루지"의 대리역인 "프랭크 크로스"(빌 머레이)는 IBC라는 방송국의 최연소 사장으로, 원작의 "에비니저 스크루지"(Ebenezer Scrooge)처럼 돈과 물질적 성공에만 집착하는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인물이다. 야심 가득한 그는 영화 안에서도 [크리스마스 캐럴]을 각색해 공연하는 “스크루지”를 크리스마스 당일 생중계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쏟아붓고, 시청자들의 주목을 끈다는 명분으로 프로그램 광고에 자극적인 폭력과 비행기 폭발 장면을 넣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 광고를 보던 노인이 너무 놀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뉴스가 곧 전해지지만, 자신의 의도대로 ‘홍보’가 잘 되었다며 기뻐하는 프랭크의 모습은 마치 그려 낸 듯한 ‘악인’ 그 자체이다. 자신의 광고 아이디어에 반대 의견을 제시한 방송국 간부 "엘리엇"을 크리스마스 이브에 가차 없이 해고한 그는 엘리엇이 사옥에서 쫓겨나는 장면을 즐겁게 지켜볼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잃지 않은 거의 유일한 인물인 동생 "제임스"의 파티 초대를 몇 년째 무시하면서 동생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고작 IBC의 로고가 박힌 수건 한 장을 보낸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괴팍한 투정을 받아 주며 고생하는 비서 "그레이스"가 - 원작의 부하 직원 "크라칫"(Cratchit) 격인 - 아들을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야근을 시키기까지 한다.  





그렇게 ‘인간성’이 결여된 모습으로 온갖 진상과 패악을 부리던 프랭크는 사무실에 홀로 남겨진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이미 몇 년 전 사망한 자신의 옛 상사 "류 헤이워드"의 방문을 받게 된다. 죽은 사람이 ‘되돌아왔다는’ 믿겨지지 않는 상황에 얼이 빠진 프랭크에게 류는 자신처럼 돈과 명예만 쫓으며 주변에 베풀지 않는 삶을 이어 가다간 후회할 것이라 경고하면서 앞으로 세 ‘크리스마스 유령’이 프랭크를 찾아올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프랭크는 악몽을 꾼 것이 분명하다며 애써 이 충격적인 경험을 잊으려 하지만, 류의 말대로 ‘과거’와 ‘현재’, ‘미래’의 크리스마스를 주관하는 세 ‘유령’(정확하게는 spirit, 혹은 ‘초월적 존재’로 번역하는 것이 더 맞을 듯하다)을 연달아 만나게 된다. 그들이 비춰 주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주변인들의 상황을 자세히 이해하게 된 프랭크는 점차 자신의 이기적인 태도를 참회하며 변화하기 시작한다.


크리스마스의 세 ‘유령’을 만난다는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 [스크루지]는 원작인 [크리스마스 캐럴]의 기본적 골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원작을 기발하게 뒤틀거나 재해석했다기 보다는 배경을 현대로 옮기며 새로운 요소나 볼거리를 ‘첨가’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실제로 이 영화를 객관적 ‘작품성’이나 ‘완성도’와 별개로 꽤나 ‘볼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도 일단 화려한 캐스팅과 여러 카메오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일과 성공에 집착하는 프랭크의 모습에 실망해 헤어지게 된 그의 전 연인 "클레어"로는 [레이더스](“Raiders of the Lost Ark”)에서 여자 주인공 "마리온"을 연기했던 배우 카렌 알렌이 반갑게 등장하고, 남편과 사별한 후 아이들을 홀로 키우고 있는 비서 "그레이스" 역에서는 뛰어난 배우 알프리 우다드의 젊은 시절을 엿볼 수 있다. 프랭크의 사장 "라인랜더" 역은 할리우드의 전설 로버트 미첨이 맡았으며 “육백만불의 사나이”로 유명한 리 메이저스가 자기 자신으로, 그리고 재즈의 선구자 마일즈 데이비스가 거리에서 연주하는 음악가로 깜짝 출연하는 등 몇십 년 전의 ‘대스타’들을 만나는 재미도 상당하고 말이다(지난 6월 다루었던 [엄마는 해결사](“Throw Momma from the Train”)에서 무시무시한 엄마를 실감나게 연기한 배우 앤 램지가 노숙인으로 잠시 출연하기도 한다).





‘볼거리’로 따질 때 주인공 역할의 빌 머레이를 빼놓을 수 없는데, 어느 정도 ‘원맨쇼’가 될 수 밖에 없는 이 영화의 초중반부를 그는 본인 고유의 매력으로 거의 ‘멱살 잡고’ 끌어가다시피 한다. 지나칠 정도로 ‘나쁜 놈’ 캐릭터인 프랭크 크로스가 무표정한 조소 아래 가늠할 수 없는 감정과 서사를 숨기는 빌 머레이의 힘(어딘가 ‘오버’스럽고 불안정한 연기를 하는 중에도 관객의 발 아래에 단단한 토대를 쌓아 두는 배우 자체의 설득력) 덕에 복합적이고 흥미로운 인물이 되는 것이다. 그의 전작 [고스트버스터즈](“Ghostbusters”)를 포함한 여러 작품들에서도 보여지는 빌 머레이의 ‘악동’ 같은 매력, 짜증나는 행동을 해도 미워할 수 없는 어떤 ‘귀여움’ 또한 관객들이 ‘악인’인 프랭크에게 공감하며 애정을 느끼도록 만드는 장점이다.


하지만 작품의 초중반에서 빛을 발하던 배우의 매력은 영화가 중후반을 넘어가며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프랭크라는 주인공의 감정적 설득력이 도리어 악인의 ‘회심’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해야 할 서사를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가족을 무시하고 주변인들을 착취하며 누가 봐도 ‘나쁜 놈’으로 사는 와중에도 빌 머레이가 연기하는 "프랭크"는 그닥 ‘악해’ 보이지 않고,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는 그의 후회와 참회는 생각보다 의미 있게 다가오지 못한다.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 프랭크가 자신이 기획한 생방송 프로그램에 난입하며 사랑과 베풂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마지막 장면도 진심으로 감동스럽다기 보단 급작스러운 태세 전환, 혹은 영화가 끝나기 전 급히 쑤셔 넣은 ‘교과서적’ 답변에 가깝게 느껴지고 말이다(물론 빌 머레이와 제작진이 이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 대해 엄청나게 고뇌했다고 전해질 만큼 실제로 연출하기 쉽지 않았을 대목임은 인정한다).  





이 영화가 - 그리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각색한 다른 여러 작품들이 - 아쉽게 느껴지는 까닭은 출간 후 거의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원작 소설의 주제와 메시지가 여전히 중요하고 시기적절한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에비니저 스크루지"의 서사가 사랑이나 인정이 무엇인지 모른 채 주변에 생채기를 내며 살던 ‘악인’의 진심 어린 참회와 변화를 다룬다는, 다시 말해 현실에선 보기 힘들지만 모두가 소망하는 인류애적 ‘판타지’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엄청난 죄와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은 커녕 뻔뻔하기만 한 인물들의 무도함이 특히나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는 요즈음 상황에서 더욱 절실한 희망이자 ‘이상’이리라는 생각도 든다. 


다만 원작의 궁극적 바람을 어느 ‘특정 악인의 감화’ 그 자체로서보다 개인의 안녕과 이익만을 추구하던 이기심이 주변과 사회를 돌보고 사랑하는 이타심으로 변화하는 ‘범사회적 현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이미 그 기적을 목도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위험과 두려움을 감수하고 직접 군용차를 막아섰던 사람들, 얼음장 같은 추위를 뜨겁게 데우기 위해 모여든 불빛들을 보며 ‘’에 집중하던 시선이 ‘사회’로 향하는, ‘타인’이었던 이들이 ‘우리’가 되는 그 황홀한 광경에 전율을 느꼈다.





유년 시절, 가족의 지독한 가난으로 어린 나이에도 공장에서 일을 하며 당시 영국 사회의 참혹한 차별과 홀대를 경험했던 작가 찰스 디킨스가 구현해 낸 세상이 이기적이고 악한 구두쇠에 대한 ‘응징’이나 ‘처벌’이 아니라 ‘이해’와 ‘교감’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다시 곱씹어 본다. 너무나 많은 죄와 악행이 흐지부지 잊혀지고 수용되는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남겨진 몫은 ‘내’가 아닌 ‘우리’로 사는 일, 사회가 외면한 누군가가 혼자 굶주린 채 추위에 떨거나 군홧발에 함부로 밟히지 않도록 엮인 팔짱을 풀지 않는 의지일 것이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타인과 사회를 향해 되찾은 관심과 사랑이 흔들리지 않는, 넓어진 시야와 변화한 마음이 굳건히 유지되는 따뜻한 크리스마스가 되었으면 좋겠다.           




엄마 C의 시선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A Christmas Carol)”을 각색, 변주하여 만들어진 여러 작품들 중 하나인 “스쿠르지(Scrooged)”는 노장 감독 리처드 도너(Richard Donner)의 연출로 제작되어 1988년 개봉했던 미국 영화입니다.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 “데이비드 코퍼필드(David Copperfield),”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 등의 명저를 남긴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에 대해서는 특별한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고, 1970-80년대에 특히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제작했던 리처드 도너는 “슈퍼맨(Superman)” 시리즈와 “리썰 웨폰(Lethal Weapon)” 시리즈는 물론 “오멘(The Omen),” “구니스(The Goonies),”“컨스피러시(The Conspiracy Theory)” 등 한국에도 잘 알려진 수많은 영화들을 연출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을 감독입니다.


마음씨가 고약하고 돈에만 관심 있는 구두쇠이자 고리대금업자로서, 무정하고 냉혹하기로 유명해 이웃들이 말을 걸기는 커녕 거리에서 마주쳐도 피해 다닐 만큼 메마른 인간성을 가진 “에비니저 스크루지(Ebenezer Scrooge)” 영감을 주인공으로 하는 디킨스의 원작 “크리스마스 캐럴”은, 단 하나뿐인 직계 가족이며 – 사망한 여동생 “팬(Fan)”의 아들이기에 – 늘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을 보이는 조카 “프레드(Fred)”조차 구두쇠 근성이 부족하다면서 못마땅하게 여기고 쌀쌀맞게 대하던 그가,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 오래전 사망한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였던 “제이콥 말리(Jacob Marley)”의 유령과 다른 3명(?)의 영혼을 만난 후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직면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 즉, ‘구원’을 받는다는 – 내용을 담고 있는 소설이지요.





원작의 줄거리를 살짝 비튼 이 영화에서 현대판 “스크루지”에 해당하는 주인공은 TV 역사상 최연소 사장이 되었다는 방송국 IBC의 대표 “프랭크 크로스(Frank Cross)”로, 돈과 성공에만 모든 관심이 집중된 그는 크리스마스라는 의미 있는 날조차 특집 방송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의미 있는’ 기회로 여기는 인물입니다. 성탄 프로그램에 마약 중독, 비행기 테러, 핵 폭발 등의 장면이 포함된 광고를 넣으라고 지시한 그는 그런 광고를 내면 안 된다며 반대 의견을 제시한 직원 “엘리엇 로더밀크(Eliot Loudermilk)”를 크리스마스 전날 거리낌 없이 해고해 버립니다. 유일한 가족인 동생 “제임스(James)”에게도 성탄 선물로 회사에서 제작한 수건 한 장을 보낼 뿐이고 아들을 병원에 데려 가야 한다고 사정하는 비서 “그레이스(Grace)”까지 성탄 전날 퇴근을 미루게 만들지요. 


그런 그가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던 성탄 전야, 7년 전 사망했던 회사 상관 “류 헤이워드(Lew Hayward)”의 환영이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업무적인 면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관용(charity), 자비(mercy), 친절(kindness) 등의 자세를 갖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답습하지 말라는 그는 프랭크에게 “아직 시간이 있다”면서 ‘구원’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경고를 건넵니다. 그의 예고대로 다음날 정오 택시 기사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첫 번째 유령(과거의 삶을 보여 주는)을 만나고, 요정의 외양을 하고 나타나 그가 미처 깨닫지 못하던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현재 모습을 보여 주는 두 번째 유령을 만난 후, 다시 기괴한 모습의 세 번째 유령이 자기로 인해 삭막한 인성을 갖게 된 사랑하는 여인 “클레어(Claire)”와 허망하게 죽어 시신이 된 자신의 미래를 보도록 하면서 프랭크는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전혀 다른, 류의 환영이 권고하던 삶의 방식을 선택하게 됩니다. 





찰스 디킨스의 초기 소설은 하류층이라 불리던 가난한 이들을 향한 동정과 제도의 악습에 대한 고발을 통해 사회의 실상을 증언한다는 특성으로 정의되곤 하는데, 이 영화의 원작인 “크리스마스 캐럴”이 ‘권선징악’의 교훈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산업화의 물결이 도래하던 출간 당시 ‘구태의연’한 발상이라는 비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루한 옛날식 사고와 가치를 반영하는 듯한 이미지의 한자어 “권선징악(勸善懲惡)”이 단순히 시대에 뒤진, ‘고색창연’한 개념일 수는 없습니다. 사자성어에 구성되어 있는 글자들의 뜻 그대로 “선한 행동을 권하고 악한 행위를 징계한다”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 정신 안에 장착(built-in)해 두신 윤리 의식, 즉 ‘객관적 가치 기준’을 그대로 반영한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하나님의 원리가 무시되며 전도(顚倒)되고 있는 듯 보이는 오늘날의 세상에서도 실제로 이 원칙이 구현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단지 ‘악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할 무능하고 부패한 위정자의 종말을 접하게 된 오늘날 한국의 상황에서도 그 같은 하나님 안에서의 진리, 역사 속의 진리를 온 국민이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덕분’에 그러한 진리가 구현되는 놀라운 장면을 함께 목격한 전 세계의 사람들도 다시 한 번 불변의 진리를 되새기게 되었고 말이지요. 10월 초 저희가 포스팅한 “부당거래”의 영화평에 언급되었던 “내가 악인의 세력이 커져 그 본토에 심긴 푸른 나무처럼 번성하는 것을 보았지만 그는 곧 사라져 없어졌습니다. 내가 그를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말성경 (I have seen a wicked, ruthless man, spreading himself like a green laurel tree. But he passed away, and behold, he was no more; though I sought him, he could not be found; ESV)”라는 다윗의 말(시 37:35-36)이나 “주님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들이 갑자기 놀라운 일을 당하고, 공포에 떨면서 자취를 감추며, 마침내 끝장을 맞이합니다; 새번역 (Surely thou didst set them in slippery places: thou castedst them down into destruction. How are they brought into desolation, as in a moment! they are utterly consumed with terrors; NKJV)”라는 아삽의 말을 작금의 상황에 적용해 보면, 그 한 치의 오차 없는 불변의 진리에 두려움과 전율이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원작자인 디킨스가 의도하거나 의식했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스크루지의 이름(first name)인 “에비니저(Ebenezer)”로 인해 성경에 등장하는 낯익은 명칭(에벤에셀)과의 연관성을 추론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 3번 등장(삼상 4:1:5:1; 7:12)하는, “도움의 돌(Stone of Help)”이라는 뜻의 “에벤에셀(Ebenezer)”은 사무엘상 7장에서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우리말성경 (Thus far the Lord has helped us)”라는 의미를 가진 명칭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영영 ‘구원’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던 스크루지가 더 늦기 전에, 그리고 결정적 기회를 놓치지 않고 회심할 수 있었음은 어떤 사람에게든 또 어느 곳에서든 함께하시며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었다는 사실로 생각이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극적으로 변화되는 프랭크의 태도가 너무 작위적이고 현실성이 없다고 지적하는 영화평도 존재하긴 하지만, 자신의 미래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의식이 있는 채로 관 속에서 뜨거운 불에 들어가 화장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장면 때문인지 – 그 장면을 보는 관객들도 당사자 못지않은 생생함을 느낄 만한 – 그러한 극적 태도 변화가 저에겐 결코 부자연스럽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소설과 영화의 내용처럼 삶을 대하는 태도가 극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급변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겠으나, 예전의 글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극적(劇的)’이라는, 즉 ‘dramatic’ 하다는 말 자체가 ‘극(drama)’에나 나올 만한 일이라는 뜻이기에 그런 이상적 상황이 구현될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은 것이 현실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부당거래”의 부제를 “당장의 부당함에 절망하지 말자”라고 붙여 글을 쓸 때만 해도 ‘아주 먼 훗날’에나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던 일이 한순간, 삽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계획은 정말 우리의 예측 불허한다는 사실, 이 영화의 프랭크처럼 자기 삶의 극적 반전을 결단하고 즉시 실천하지 않을 경우 “징악(懲惡)”으로 규정되는 처벌이 머잖아 닥칠 수도 있다는 사실 역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외국에 나가 살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는 말도 있지만 K-Pop, K-Food 등 세계적으로 인정 받으며 유명세를 타는 문화 예술, 생활 전반의 분야들에 큰 자부심을 느끼던 즈음, 통치자와 그 가족의 상식 밖 행위들이 해외 언론에 연일 보도되어 국격이 추락하고 은근한 비아냥까지 감지되며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고통스럽던 시간이 꽤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멀리 있기에 더욱 답답하고 안타깝던 최근 발생한 전대미문의 사건은, 우리 국민의 놀라운 단결력과 수준 높은 사회 의식이 일궈 낸 승리 덕분에 도리어 커다란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을 선사하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이번 글을 빌어 전 세계가 한목소리로 칭찬하는 한국 민족의 저력에 든든함과 자긍심을 표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정의’를 향한 사랑으로 대한민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모든 분들께 영화 속 주제곡의 노랫말, “Put a little love in your heart, and the world will be a better place (모두가 마음 안에 작은 사랑을 담는다면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될 것입니다)”라는 구절로 감사의 인사를 대신하고 싶습니다.  


Scrooged! The Movie - Put a Little Love in your Heart - End Scene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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