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J의 시선
지난 몇 주간은 개인적으로도 무척 힘든 시간이었다. 어떤 ‘사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은 (다행히) 아니지만, 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한 이래 단연코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기 때문이다. 하고 있는 일에는 늘 자부심과 감사함을 느낌에도 ‘인권’을 다루는 분야의 특성상 감정적, 심리적 부담과 스트레스를 피하기 어렵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해심과 인내력, 심리적인 여유가 뭉텅뭉텅 깎여져 나가는 상황이다 보니 오늘날 세상의 혼란한 형국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 평소보다 고통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피로감과 무력감에 간신히 맞서며 싸우고 있을 현 상황에 대해 곱씹던 중 [Selma]라는 영화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정의나 의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숙명처럼 대면하게 될 고뇌와 고통을 탐구하는, 친절하진 않지만 다정한 작품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에이바 듀버네이(Ava DuVernay) 감독의 2014년 작 [Selma]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이야기, 더 정확히는 흑인 투표권 보장이라는 실절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가 다른 흑인 인권 운동가들과 함께 기획한 1965년 "셀마 몽고메리 행진"(Selma to Montgomery marches)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의 시작, 킹 목사(데이비드 오옐로워)는 흑인 인권 운동가로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지만, 노벨 평화상 수상이라는 그의 개인적 ‘성취’의 순간조차 흑인 교회에 가해진 테러로 사망하는 어린 소녀들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여전히 지난하고 끔찍한 싸움을 이어 가고 있는 그의 삶을 단적으로 엿보게 한다.
킹 목사와 그가 이끄는 남부기독교지도자본부(SCLC: 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의 리더들은 법적으로 보장된 흑인의 투표권이 남부에서는 여러 편법과 규제들로 인해 실질적 효력이 없다는 현실에 주목하며 당시의 대통령이던 린든 B. 존슨(톰 윌킨슨)과의 교섭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지만, 존슨 대통령은 비폭력 점진주의를 추구하는 킹 목사를 과격한 투사 말콤 엑스(Malcolm X)보다는 말이 통하는 - 혹은 ‘다루기 쉬운’ - 상대 정도로 대하면서 그와의 타협으로 정치적 이득을 볼 방안에만 골몰한다. 흑인 인권 문제를 ‘나중에’ 해결해도 좋을 사안쯤으로 취급하는 정부의 작태에 점점 지쳐 가던 킹 목사와 동료들은 대통령이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법률 제정에 계속 관심을 보이지 않자, 대중의 호응과 지지를 얻어 내는 방식으로 접근법을 바꾼 후 미국을 넘어 전 세계가 주목할 앨라배마 주의 소도시 "셀마"를 그 대상으로 선택하게 된다.
젊은 (편에 속하는) 흑인 여성인 듀버네이 감독은 내가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창작자인데, 이 영화에서 감독은 미국 흑인들에게 ‘성역’과도 같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정중하게, 그러나 주저함 없이 그려 낸다. 실제 킹 목사를 경계하며 감시, 사찰한 FBI 측이 제기했던 사생활 의혹들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는 점도 그렇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킹 목사의 인간적 고뇌, 다시 말해 그의 ‘외로움’과 ‘피로함’을 가차 없이 파고든다는 점이 더욱 그렇다. 이 대목에선 데이비드 오옐로워라는 배우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기가 어려운데, "연기 천재"라는 표현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나도 이 작품에는 정확하게 들어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게 될 정도이다. 영국인 배우인 오옐로워는 킹 목사 특유의 남부식 억양을 완벽하게 구사할 뿐더러 뛰어난 연설가였던 그의 카리스마를 폭발적으로 분출해 보인다. 더욱이 마틴 루터 킹 주니어라는 실존 인물을 스크린 위에 그대로 복제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는 감독과 배우들은 영화 속 킹 목사를 뚜렷이 ‘입체화’시키고, 이 작업은 앞서 말한 그의 아픔과 외로움, 피로함 등을 묘사하는 방식에 의해 작품을 한 단계 향상시킨다.
킹 목사의 뒷모습으로 시작하는 첫 장면이 보여 주듯 이 영화에는 인물을 조명하는 앵글로 그의 내면을 표현하는 방식이 자주 사용된다. 대중들 앞에서 연설할 때, 언론과 인터뷰할 때 등의 ‘공적’인 상황에서 그의 얼굴이 주로 정면에서 잡히는 것과 달리, 시위를 계획하고 연설문을 고치거나 내부의 불만과 의심을 마주하는 ‘사적’인 순간들에서 킹 목사는 뒷모습 혹은 옆모습으로 비춰질 때가 많다. 동전의 뒷면, 무대의 뒤편 같은 표현들로 비유되는 ‘뒷모습’이 대중에게 보이지 않는 은밀한 모습, 더 나아가 부정적 의미로서의 ‘내밀한’ 사정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처럼 킹 목사의 뒷모습 또한 영화에서 비슷한 상징으로 작용한다. 듣는 이를 전율케 할 만큼 유려한, 그리고 ‘확신을 가진’ 설교자이자 리더로서의 모습이 킹 목사의 ‘공적’인 얼굴이라면, 그의 숨겨진 뒷모습인 ‘사적’인 얼굴에서는 내면의 고뇌와 의심, 불안과 자기 회의가 그대로 노출된다. 빛과 어둠(명암) 또한 작품 속에서 비슷한 맥락으로 사용되는데, 킹 목사의 ‘공적’ 활동이 밝은 빛 혹은 환한 대낮 가운데 이루어진다면, 동료들과 충돌하고 아내와 갈등을 빚으며 자신의 선택을 신뢰하지 못하는 그의 ‘사적’ 방황은 어둠과 그림자 속에 자리하곤 한다.
‘공’과 ‘사’라는 용어를 쓰긴 했지만 이 영화는 킹 목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러니까 그가 어떤 아버지였고 어떤 남편이었는지 등의 사적 면모에는 별 관심이 없다. 아마도 이것은 그런 측면들이 인권 운동가로서 그의 행보와는 큰 관련성이 없어서일 것으로, 실제로 작품은 그가 어떤 ‘리더’였는지에 더욱 집중함으로써 킹 목사라는 실재 인물, 그리고 ‘흑인 인권 운동’이라는 특정 상황, 역사적 순간을 넘어 정의와 평등을 위해 몸부림치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여정을 기록하는 일에 성공한다. 자유를 위한 투쟁은 낭만적이지 않으며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마다엔 의심과 불확신, 무거운 책임감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야 할 동료들은 저마다의 이익과 야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같은 ‘진영’ 안에서 일어나는 신념과 의견의 충돌은 오히려 더 파괴적이고 치명적이다.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임에도 “주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며 친분 있는 흑인 가수에게 전화를 걸어 불 꺼진 부엌에서 홀로 찬양에 귀 기울이는 킹 목사의 뒷모습에는 수많은 동료와 지지자들 속에서조차 피해 갈 수 없는 그의 외로움, 확신(conviction)에 찬 연설을 하는 중에도 벗어날 수 없는 그의 두려움이 그대로 묻어난다.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행진하는 비폭력 시위에 참여했던 흑인 인권 운동가들이 앨라배마 주 경찰에게 잔인하게 탄압 당하는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장면을 다시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65년, 그러니까 60년 전의 상황을 단지 과거의 일로 느끼지 않게 된지는 이미 오래지만, 지금도 미국의 여러 주에서 법률과 제도를 교묘히 악용하며 흑인과 다른 소수 인종들의 선거권 행사를 방해하고 있는 현실, 다양성(diversity)과 포용(inclusion)의 가치에 대한 논의를 ‘불법’으로 간주하는 정부에 의해 흑인들이나 다른 소수 집단들이 일궈 낸 성취가 실시간으로 지워져 버리는 현재 상황이 화면에 겹쳐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헌법과 법치의 하한선을 깔아뭉개는 무도한 무리들이 끝 모를 증오와 폭력을 조장하고 있는 모국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이다.
몇 십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셀마’의 그날이 되풀이되고 있는 지금, 이 영화가 쉽거나 간단한 해답을 내놓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작품 속에서 킹 목사와 그의 동료들이 마주했던 가장 큰 장애물은 대놓고 흑인을 ‘인간 이하’ 취급하는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리스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 나아가 생명 그 자체가 좌우되는 문제 앞에서도 한가롭게 득과 실을 따지는 존슨 대통령으로서,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다는 의견엔 동의한다는 그는 하지만 ‘지금’은 시기상조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런 면에서 존슨은 더디고 조용하게 진행되는 최소한의 진보로 현상을 유지하려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이익과 특권을 지키는 일을 불평등한 구조에 짓이겨지는 이들을 구하는 사명보다 우선하는 세력을 대표한다. 이런 식의 무심한 관성을 상대하는 것은 노골적 증오와 차별을 처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복잡한 일이다. “아직은 정의를 세울 때가 아니다”라는 말만큼 의분에 차 행동하기 위해 나섰던 사람을 좌절시키고 발목 잡아 주저앉히는 것이 달리 있을까?
그럼에도 [Selma]가 단언하는 하나의 확신은 존재한다. 끝끝내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 기득권이 무릎 꿇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거대한 흐름을 탄생시키는 것은 결국 나란히 팔을 엮은 사람들의 유대와 연대라는 믿음이다. 영화에서 킹 목사의 외로움이나 피로함이 ‘해결’되지는 않지만, 그런 그에게는 언제나 곁을 지켜 주는 친구와 동료들,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을 믿지 못해 괴로워하던 감옥 안의 자신에게 성경 말씀을 읽어 주며 위로하는 동역자들이 있는 것이다. "피의 일요일", 많은 흑인들이 공권력의 발길 아래 무참하게 희생되지만, 그 참극을 목격한 사람들이 나라 전역에서 셀마로 찾아와 행진이 시작될 다리 위로 모인다. 그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던, 이 시위를 통해 얻을 ‘직접적’ 이익이 전혀 없는 백인들 역시, 오로지 고통 받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안전과 생명의 위험까지 각오하며 옆 사람과 팔을 엮고 행진에 나선다.
진부하게 들릴 수 있는 결론이지만, 정의를 위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우리를 지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당연해야 할 정의가 너무나 멀리 있는, 오지 않을 듯 보이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정의심, 혹은 분노만을 의지했을 때 양초의 심지가 타듯 결심과 헌신이 빠르게 닳아 버리는 경험을 여러 번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끝이 손에 잡히지 않는 싸움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비관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 얼굴도 이름도 모르던 누군가를 위해 나의 편의와 이익을 기쁘게 내려놓을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은 나와 팔을 엮은 그에 대한 사랑밖에 없을 것이다. "모두가 자유롭기 전까지는 아무도 자유롭지 않다"는 외침이 진심이 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상대와 나를 동일화할 수 있는, 나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상대에 대한 공감과 연민뿐일 테니까.
꿈쩍도 않는 기득권,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꼬이고 부패한 제도 앞에서 낙담하며 피로감을 느끼는 어두운 ‘뒷면’은 정의를 향한 여정 안에서의 불가피한 모습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빛을 향해 나아가도록 돕는 힘은 상대를 위하여 추운 광장으로 나가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만큼의, 그와 팔짱을 끼기 위해 다리 위로 뛰어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사랑’이라고 믿는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명언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을 최근 들어 자주 곱씹게 된다. 19세기 테오도르 파커 목사의 설교를 인용한 말로, “The arc of the moral universe is long but it bends towards justice” – “도덕적 역사의 행로는 길고 멀지만 결국 정의를 향해 휘어진다”라고 해석될 수 있을 듯하다.
도덕적 역사의 완성, 진정한 정의의 구현이 언제쯤 이루어질 것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 안에서 볼 수 있을지조차 확신하기 어렵다. 그러나 역사의, 사회의 방향을 정의 쪽으로 휘게 하는 것은 엮은 팔을 풀지 않은 사람들이 쌓아 낸 사랑의 무게일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그저 사랑하는 마음으로, 언젠가 찾아올 그날을 확신하며 외칠 수밖에. “Soon and very soon” – 곧, 그리고 반드시.
엄마 C의 시선
2014년도 개봉작인 “셀마”는 미국 남부 앨라배마(Alabama) 주의 작은 도시 셀마(Selma)에서부터 주도(主都)인 몽고메리(Montgomery)까지 이어짐으로써 후일 “셀마 몽고메리 행진(Selma to Montgomery marches)”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 마틴 루터 킹이 선봉에 서 흑인 선거권 보장을 외쳤던 - 인권 제창 행진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토크쇼의 여왕”으로 잘 알려진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와 할리우드의 유명 스타 브래드 피트(Brad Pitt)가 공동 제작했다는 사실로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이 작품은, 2015년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를 포함한 전 세계 영화제의 72개 부문 노미네이트, 52개 부문 수상이라는 기염을 토했으며, 2015년의 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수인 존 레전드(John Legend)와 래퍼인 커먼(Common)이 영화의 주제곡 “글로리(Glory)”를 열창하면서 더욱 큰 유명세를 얻기도 했습니다.
형식상의 투표권은 있지만 실제 선거인 등록이 거부 당하는 현실에 처해 있던 당시의 흑인들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60년 전인 1965년 3월 7일, 선거 차별 철폐를 외치며 셀마의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Edmund Pettus Bridge)를 지나는 행진을 시도하는데, 이 과정에서 앨라배마 주 경찰대가 끔찍하고도 무자비한 무력 진압을 자행하면서 이 사건은 미국 민권 운동사에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이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남게 됩니다. 이 같은 충격적 사건을 소재로, 그리고 마틴 루터 킹에 관한 첫 영화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미국 흑인 참정권 운동의 주요 전환점이 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관심으로 8년이라는 긴 시간을 준비했던 “노예 12년(Twelve Years a Slave)”의 제작자 디디 가드너(Dede Gardner)와 제레미 클라이너(Jeremy Kleiner) 등의 성실한 제작, “미들 오브 노웨어(Middle of Nowhere)”의 감독인 에이바 마리 듀버네이(Ava Marie DuVernay)의 뛰어난 연출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Marin Luther King Jr.) 목사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라는 ‘고무적’ 상황으로 첫 장면을 시작한 영화는, 그러나 곧 웃고 떠들던 천진난만한 흑인 소녀들이 교회 안에 매설된 폭발물에 의해 무참히 폭사 당하는 장면과, 투표권 행사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만 유권자 등록에서 가차 없이 거부 당하는 흑인 여성 “애니 리 쿠퍼(Annie Lee Cooper)”를 – 오프라 윈프리가 직접 연기한 – 차례로 보여 줍니다. 죄 없는 어린 소녀들의 참혹한 죽음에도 ‘백인’ 경찰들의 비호로 범인은 체포조차 되지 않고, 혹 재판에 넘겨지더라도 ‘백인’ 판사들에 의해 무죄 석방될 현실을 – “백인”이라는 말만 빼면 지금의 한국 상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 킹 목사는 지적하지만, 노벨 평화상을 받을 만큼의 지명도와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흑인인 그의 호소는 정치권에 가닿지 못한 채 번번이 좌초되는 상황을 반복하지요. 대통령을 포함한 고위 공직자들이 투표권 보장을 요구하는 자신의 뜻을 꺾기 위해 오히려 아내와 자녀까지 협박하자, 킹은 동료들과 함께 흑인 인권 문제가 강력히 대두되고 있던 남부 지역 셀마로 내려가 그들의 투쟁에 합류하기로 결정합니다.
1965년 2월, 찬송가를 부르며 비폭력 시위를 벌이던 흑인 주민 500 명을 상대로 무력 진압을 강행한 주 경찰이 17세 소년 “지미 리 잭슨(Jimmie Lee Jackson)”을 사살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한 달 후인 3월 7일 목사인 “제임스 베블(James Bevel)”의 주도로 600 명의 사람들이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행진하는 시위를 벌입니다. 하지만 몽고메리에 다다르기 위해 건너야 하는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 끝에서 무장 상태로 기다리고 있던 병력은 자신들의 해산 명령에 순응해 곧바로 후퇴를 시작한 민간인들에게 최루가스를 분사한 후 자신들은 방독면을 쓰고 뒤쫓아가 경악스런 폭력을 행사하지요. 이 행진에 대한 여론의 관심으로 CBS 뉴스에서 생중계 중이던 방송을 통해 7,000만 명의 시청자가 그 끔찍한 장면을 목도하는데, 현장에서 ‘구경’하던 100여 명을 포함한 백인들 가운데에는 소리치고 ‘응원’하며 더하라고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차마 눈을 뜨고 똑바로 보지 못한 채 흐느끼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았습니다. 이 참상 속에서 곤봉과 채찍으로 가격 당해 골절이나 두개골 손상을 입은 부상자가 속출하는, 말 그대로 “피의 일요일”이라 불릴 만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20세기 최악의 진압”이라는(사실상 ‘미국 내’로 한정지어야 할 표현이기는 하지만) 오명과 함께 흑인 인권 운동의 승리를 앞당긴 날로도 기억되게 된 “셀마 몽고메리 행진”은 총 3회에 걸쳐 진행되는데, 3월 7일 발생한 1차 행진의 끔찍한 상황에 분개해 전국에서 모여든 백인들의 합류로 2,500 명까지 늘어난 이틀 뒤의 2차 행진부터 마틴 루터 킹의 주도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나란히 팔짱을 끼고 사이사이에 함께 선 백인들을 본 주 병력이 퇴각을 결정했음에도 제자리에 머물며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킹이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서 동료들의 비난을 사게 된 후 – 그 이유에 대해서는 행진에 동참했던 백인 목사 “제임스 리브(James Reeb)”의 “기도하며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에 킹 목사가 순종했을 것”이라는 짐작성 언급 외에 다른 설명은 주어지지 않지만 – 이 리브 목사는 그를 “white nigger(하얀 검둥이)”라 부르며 역시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행진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연방법원의 판결을 받고 3차 행진을 진행해 마침내 몽고메리에 도착했던 그들은, 당시의 대통령이던 존슨(Lyndon B. Johnson)이 흑인 투표권 보장 법안에 결국 서명하면서 숱한 고난을 뚫고 실질적 투표권을 얻게 되지요.
교회로 되돌아가는 여정의 평화 시위 도중 경찰에 쫓겨 식당으로 대피했던 본인과 딸, 손자인 지미를 뒤쫓아 와선 무차별 폭행을 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지미에게 총까지 쏜 공권력에 어린 손자를 잃은 82세 할아버지를 찾아가 “달리 위로할 말이 없다”면서도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눈물 흘리셨을 것(God was the first to cry)”이라고 전한 킹 목사의 애도는 물론, 지미의 장례 예배 중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men and women of God)’을 향해 “우리 모두는 동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선포하며 “곧 투표권을 갖게 될 거라고 할아버지를 위로하던 착한 소년을 살해한 것은 방아쇠를 직접 당긴 해당 경찰만이 아니라 법으로 위협하는 백인 법관들, 편견과 증오를 부추기는 백인 경찰들, 성경을 토대로 설교하면서도 자신의 신도 앞에서 침묵하는 백인 목사들이기도 하다”라고 – 역시 “백인”이라는 말만 빼면 기시감을 피할 수 없게 하는 – 토해 내던 그의 사자후 역시 주님께서 대언시키신 말씀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두렵고 비장한 표정으로 걸음을 내딛는 흑인들끼리만의 행진보다 멀리에서부터 찾아와 동참해 준 백인들과 나란히 걷는 그들의 모습에 더욱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핑돌던 이유는, 자신에겐 이미 당연하게 여겨져 감사함도 잊으며 누리고 살던 권리이더라도 그것을 정당하게 얻지 못해 갈급해 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떨치고 일어나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용기, 진정한 ‘영성’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그 장면에서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각자의 형편과 처지가 다르더라도 서로의 기댈 어깨가 되어 준다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 아닐까 여기게 되는 장면이기도 했고 말이지요. 전설적 흑인 인권운동가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한 킹 목사의 삶을 다루고 있어 전기(傳記)나 다큐멘터리적 측면을 갖고 있음에도 이 영화의 제목이 “마틴 루터 킹” 아닌 “셀마”로 붙여진 것은, 그때 그곳에서 힘겨운 싸움을 함께 이겨 낸 ‘평범한 위인들’을 기억하겠다는 영화의 지향이 암시되는 단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제작에 참여하고 직접 배역을 맡아 출연하기도 했던 오프라 윈프리가 “셀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고 이들의 도움 덕분에 킹 목사의 업적도 존재할 수 있었음을 조명하는 작품”이라면서 - 이 영화를 대표하는 포스터가 킹 목사의 ‘뒷모습’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시사되듯 - 자신이 이 작품에 참여했던 이유에 대해 “과거를 되짚어 보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결코 판단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밝혔다는 소회와, 영화를 준비하던 긴 시간 동안 배우와 스탭들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향해 던지곤 했다는 “지금의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권리의 획득을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이 요구되었던 시대의 엄중함을 어떻게 해야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 역시, 같은 맥락에서 깊이 묵상해 볼 만한 주제일 것이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 위대한 영화에 대한 부족한 평을 마치면서 킹 목사가 종종 언급했다는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라는 – 지금의 우리에게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는 - 금언과, “국제 앰네스티” 창립 초기부터의 표어로 알려진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모인다면 특별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together ordinary people can change the world)”는 ‘이상’을 뇌리에 떠올려 봅니다. 다른 한편으론 선거권 투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에서 킹 목사가 했던 연설 내용인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거짓은 없습니다(No lie can live forever),” “하나님의 진리가 행진해 옵니다(His truth is marching on)”라는 선포를 통해 큰 위안을 얻습니다. 1963년 링컨 기념관에서 행해진 – 케네디 대통령(John F. Kennedy)의 취임사와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연설로 남게 된 – 그의 연설문의 제목처럼 저에게도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일어서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이 자명한 진리로 간주된다”는 신조의 진정한 의미를 실현해 낼 것이라는 꿈 말입니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this nation will rise up, live out the true meaning of its creed: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옛 노예의 후손들과 옛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 말입니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on the red hills of Georgia sons of former slaves and the sons of former slave-owners will be able to sit down together at the table of brotherhood).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불의의 열기에,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는 저 미시시피 주 마저도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로 변할 것이라는 꿈 말입니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n the state of Mississippi, a state sweltering with the heat of injustice, sweltering with the heat of oppression, will be transformed into an oasis of freedom and justice).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명의 어린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 받는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 말입니다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