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C의 시선
제목만으로도 학창 시절 국사 수업 시간에 배운 “황산벌 전투”를 다루는 내용이리라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한국 영화 “황산벌”은 2003년 개봉되었던 “역사 코미디 물”입니다. ‘역사’와 ‘코미디’라는 두 개의 장르는 같은 카테고리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생경할 뿐 아니라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라는 생각까지 들 만큼 공존하기 힘든 성격을 가진 개념임에도, 이 작품 안에서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그리고 유쾌하게 녹아들어 서로 잘 어우러진 흥미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냈습니다. 황산벌 전투라는 사건이 각각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지역 간에 벌어진 실제 전쟁이었다는 사실에 착안함으로써, 기초가 되는 역사적 토대 위에 재미있는 변주들을 가미한 독특한 코미디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전에 올렸던 저희의 포스팅(“라디오스타”와 “동주”)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듯 이 영화의 연출자 이준익은 “사도,” “왕의 남자,” “즐거운 인생,” “아나키스트,” “소원,” “간첩 리철진” 등등의 수많은 역작들을 만들어 낸 감독으로, 다양한 장르를 자랑하는 작품들의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만큼 각각의 영화마다 나름의 개성과 특색을 살리는 다채로운 연출 방식을 선보이며 이미 역량을 인정 받은 창작자이고, “앙상블 캐스트(ensemble cast)”로 분류될 수 있을 정도의 - 여러 명의 출연 배우들이 거의 비슷한 비중의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 이 작품에서 박중훈, 정진영, 김선아, 이문식, 이원종, 이호성, 류승수, 우현, 오지명 등 연기력이 담보된 다수의 연기자들이 서로 ‘앙상블’을 이뤄 펼치는 연기를 즐길 수 있다는 것 또한 이 작품의 커다란 매력 중 하나입니다.
전체적 분위기는 가볍고 유쾌하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은 사실상 ‘심각하고 엄중한’ 이 영화는 “삼국시대”라고 일컬어지는 한국 고대사 시기의 3개국(고구려, 백제, 신라) 간에 분쟁이 한창이던 660년도를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백제의 침공으로 딸을 잃은 이후부터 원수처럼 여기게 된 의자왕을 치기 위해 당나라 고종에게 도움을 요청한 신라 왕 김춘추는 “나당연합군”의 조직에 힘입어 백제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당나라 사령관인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서해 덕물도에 도착한 후 대장군인 김유신이 소정방과의 협상자로 파견되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입장에서조차 고분고분하지 않은 김유신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소정방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군량미를 정해진 기간(7월 10일)까지 덕물도로 수송하라는 무리한 명령을 내립니다.
물량의 준비를 위해 주어진 기간이 시간적으로 촉박하다는 것도 문제지만, 5만 명에 달하는 신라군들이 당군의 점거지 덕물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김유신과 숙적 관계인 백제 장군 계백의 본거지 황산벌을 뚫고 지나야 한다는 결정적 난관이 눈앞에 놓이게 됩니다. 이런 한편으로, 당나라 군함이 덕물도에 닻을 내린 것에 잔뜩 긴장하면서도 이 같은 당군의 움직임이 고구려를 향한 것이리라 애써 자위하던 백제의 의자왕과 중신들 또한 신라군이 이동해 탄현으로 오고 있다는, 즉 그들의 목표 대상은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큰 불안감에 휩싸이지요. 그럼에도 의자왕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장수들은 병사 차출 명령에 불응하며 자신들의 군사를 내어 주지 않고, 결국 궁지에 몰린 의자왕은 용맹한 장수이자 자신의 충신인 계백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백제의 운명을 예감한 계백은 배수진을 치겠다는 각오로 가족들까지 자신의 손으로 죽인 후 5천 명의 결사대를 조직해 황산벌에 진을 치지만, 곧 그의 10 배에 달하는 5만 명의 신라군들이 황산벌에 다다릅니다. 이러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죽기를 각오한 계백과 그의 군사들의 기개 덕분에 전세는 의외로 백제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데, 이런 백제군들의 저지로 소정방이 명령한 7월 10일의 하루 전까지도 군량미 전달이라는 임무 이행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신라 장군 김유신은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화랑들이 적진으로 들어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케 하는 최후의 ‘전략’까지 동원합니다.
이런 비인간적 ‘전술’로 신라군의 사기가 어느 정도 진작된 가운데, 갑옷을 절대 벗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갑옷과 속에 입은 옷을 꿰매 붙이기까지 했던 백제 병사들은 비에 젖은 진흙을 투석기에 올려 던져 대는 상대군의 공격을 받자 무거워진 몸 때문에 움직이기도 어려운 속수무책의 상황에 처하고, 결국 갑옷을 벗고 싸움에 임했음에도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처지에 이르게 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채 신라군과 맞서 싸우던 계백은 마지막 순간 자신의 사병 중 하나인 “거시기”를 전투가 한창인 전장에서 놓아 주어 무의미한 죽음을 피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그렇게 풀려난 거시기가 고향에서 홀로 농사 짓던 어머니에게 돌아가 눈물의 상봉을 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게 됩니다.
이처럼 ‘역사’와 ‘코미디’라는 두 개의 장르를 결합해 만들어진 “황산벌”을 바라보던 개봉 당시 역사학계의 입장은 양극단으로 나뉘었다는데, “역사를 단순한 코미디로 희화화했다”는 반응과 “잘 만들어진 훌륭한 역사물이다”라는 각기 다른 해석 사이에서 전자에 상당수 몰려 있던 개봉 당시의 평가가 – 코미디적 성격을 부각시킨 초반의 홍보와 희극 연기에 뛰어난 배우들의 열연의 결과인 – 시간이 지날수록 후자쪽으로 비중을 옮겨 가는 추세인 듯합니다. 물론 지나친 각색으로 실상을 왜곡하는 일은 피해야겠지만, 역사라는 학문 역시 과거의 특정 사건을 고착화, 정형화하는 방식으로가 아닌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재해석하는 나름의 시각이 중요한 분야이기 때문이리라 짐작되기에, 그러한 측면을 바탕으로 이 작품이 관객에게 제시하는 여러 메시지 중 핵심적인 몇 가지를 요약해 살펴볼까 합니다.
첫째로 이 직품은 “언어”가 갖는 보이지 않는 힘과 의미를 전체적 맥락 안에서 가시화하고 있습니다. 웃음 뒤에 자리한 나름의 진지한 메시지와 기존 사극들의 전형적 클리셰를 비트는 형식으로 인정 받게 된 이 작품의 독특함은 상당 부분 출연 배우들이 사용하는 ‘방언’에 기인하는데, 이 영화를 처음 관람했을 때 학부 시절 뛰어난 개그 감각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던 동아리 선배(당시에는 ‘서클’이라고 불렀지만)가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이 “황산벌”과 동일한 시대적 배경을 갖는 과거의 영화나 드라마들이 모두 표준어를 대사로 사용하는 ‘엄숙한’ 분위기로만 일관되고 있다는 사실의 ‘모순’을 지적하던 그 선배가 계백 장군이 사용했을 전라도 방언, 화랑 관창이 썼을 경상도 방언을 흉내 내며 실감나게 대사를 읊조릴 때마다 그처럼 예리한 지적과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흥미를 느낀 많은 사람들이 종종 주변으로 모여들곤 했었으니까요.
웬만한 명사나 대명사는 모두 “거시기”로 대치시키는, 영화 안에서 웃음 포인트로 작용하는 전라도 방언의 묘미 역시 우리의 실제 삶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어휘력이 부족하거나 기억력이 약화되어 뭔가를 설명할 때마다 “그거 있잖아, 그거…”라고만 말해도 척척 알아들을 만큼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영화 안의 대사처럼 “거시기,” “뭐시기”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히 이해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 즉 언어란 특정 공동체 내의 결속을 가능하게 하고 더욱 두텁게 강화해 가는 약속 혹은 암호 같은 도구라는 점을 영화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언어권과 문화권이 다른 사람들 간에 의사소통이 어려운 일이야 당연하달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같은 언어권과 문화권 내의 사람들 사이에도 충분히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거나 서로의 ‘코드’가 맞지 않는 경우라면 같은 말로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의사소통’에 장애가 발생하는 경우를 적잖이 목격하게 되니 말이지요.
둘째로 이 작품에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역사적 ‘영웅’들을 평범한 ‘한 인간’으로 그려 냄으로써 – 즉 그들의 “영웅 신화”를 비틀어 보임으로써 – 재미를 추구하는 동시에 과거 역사에 대해 고정관념처럼 가지고 있던 ‘엄숙주의적’ 편견에 경종을 울립니다. 김춘추, 김유신, 계백, 연개소문 등의 인물을 국사책에서 배우던 시절에는 그들도 우리처럼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쉽게 떠올리기 어려웠지만, 당시의 그들이 했을 법한 생각, 범했을 법한 실수를 상정하는 이 영화는 ‘그때의 그들’을 ‘지금의 우리’가 더욱 가까이에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또한 ‘죽어 있던’ 그들이 ‘살아 숨쉬듯’ 느껴질 수 있도록 서사를 이끄는 일에 성공합니다. 황산벌로 출정하기 전 자신의 가족을 직접 살해할 만큼 ‘구국의 일념’에 불타는 계백과 그 ‘귀한 뜻’을 받들어 순순히 목숨을 내놓은 것으로 숭앙되던 그의 아내가, 영화 안에서는 “호랭이는 죽어서 꺼죽을 냄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냄긴다고 혔다”라며 죽음을 강요하는 ‘비정한 남편’과 “호랭이는 가죽 땜시 뒤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뒤지는 거여”라며 반항하는 ‘가여운 아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서지요.
마지막으로 성골(聖骨), 진골(眞骨), 6두품, 5두품, 4두품 등으로 엄격히 ‘등급’을 구분한 신라의 골품 제도(骨品制度)가 대변하는, ‘귀족’이라는 허울에 대한 조소와 비틀기가 또한 보는 이들의 주의를 환기합니다. 백제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자살특공대”의 임무를 띄고 적진으로 향할 화랑들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과 그의 아들 “반굴”이 서로 상대방이 죽어야 “약발이 더 잘 먹힌다”고 우겨 대는 장면이나, 장군인 “김품일”이 자신의 아들 “관창”에게 “정신 바짝 차리고 폼나게, 비장하게, 장렬하게” 죽어야 한다고 을러대는 모습에서는 실소를 넘어 기가 막힌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과장되게 표현하기는 했겠지만 이와 유사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당시의 상황과, 아버지가 지시한 그대로 “나는 신라대왕 김춘추의 사위인 전 대야성주 김품석의 아우이신 현 신라 좌장군 김품일의 아들 화랑 관창이다”라며 적진으로 뛰어들어 결국 목숨을 잃고 마는 ‘한 젊은이’를 생각하다 보면,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평민들은 절대 하지 않았다는 근친혼(近親婚), 족내혼(族內婚)까지 서슴지 않았던 그들이 그토록 지켜 내려 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지에 대해 비통한 마음까지 갖게 됩니다.
오래도록 남는 “호랑이의 가죽”처럼 자신의 “이름”을 그토록 남기고 싶어 하던 계백도 전사하고, 아버지와 큰아버지, 할아버지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자신을 그들에게 동일화하던 관창 역시 숨진 전장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름도 성도 분명치 않은 “거시기”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에 많은 생각이 오고갑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우리라면, 같은 아버지의 자녀가 사용하는 ‘같은 언어’로 소통하며, ‘영웅적 능력’에 대한 요구나 ‘특별한 계층’에의 구분 없는 세상에서 각자가 추구할 바, 진정한 삶의 목표를 점검하는 희망의 새봄으로 함께 걸음을 옮겨야 마땅하겠지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춘래불춘래(春來不春來)”라는 말처럼 “봄은 왔으나 아직 봄이 오지 않은” 형국이 사랑하는 내 조국에 펼쳐질까 두렵고 걱정스럽기만 하던 시간을 몰아내 주심으로, 밝음과 따스함이 구석구석을 채우는 새봄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딸 J의 시선
다시 돌아온 봄을 마음껏 만끽한 지난 며칠이었다. 물론 뭐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세상인지라 그 이후 짧은 시간 동안에도 별의별 어이없는 소식들이 다양하게 들려오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눈물 흘리며 얼싸안는 모습 속에서 벅차오름을 느끼던 순간의 여운은 쉬이 퇴색되지 않는다. 해방감과 책임감, 기쁨과 엄숙함이 동시에 휘몰아치는 이 시기에 대체 어떤 영화를 다루어야 할지 끙끙대던 중 이준익 감독의 2003년 작 [황산벌]이 퍼뜩 떠올랐다. 아직 남아 있는 과제들에서 눈을 떼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런 만큼이나 우리의 웃음과 행복도 야무지게 챙겨야 하는 지금의 상황과 잘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제목 그대로 [황산벌]은 서기 660년 신라군과 백제군 사이에서 일어났던 "황산벌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원종)과 신라의 김춘추(이호성), 백제 의자왕(오지명), 그리고 당나라의 고종(김육룡)이 정상회담 자리인 양 모여 앉아 서로에게 막말을 퍼붓는 첫 장면에서부터 드러나듯, 코미디에 중점을 둔 "퓨전 사극"이라고 할 이 영화는 그럼에도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역사적 흐름을 꽤나 충실하게 재현해 낸다. 영화의 시작 시점, 고구려, 신라, 백제 사이의 갈등은 최악을 향해 치닫는 중으로, 고구려와 손잡고 압력을 가해 오는 백제의 도발에 직면한 신라가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음으로써, 삼국 간의 싸움에 외세까지 끌어들여진 상황이다. 결국 당나라와 신라가 함께 백제를 침공하는 결정이 이루어지고, 이로 인해 신라는 나당연합군의 총사령관인 "소정방"이 이끄는 십여만 명의 군사를 지원 받게 된다.
비굴해 보일 만큼 당나라 군사에게 몸을 낮추는 김춘추와 달리 신라를 ‘약소국’이라고 깔보는 소정방의 오만한 행태 앞에서 대장군 김유신(정진영)은 격분하지만, 그들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한 현실적 어려움에 직면해서는 막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된다. 보급품 없이 출정한 당나라 군대의 군량미를 대신 조달해야 할 신라군이 육로를 통해 당군과 합류하려는 상황 가운데, 자신을 대하는 태도도 꼿꼿하기만 한 김유신에게 분노한 소정방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기일 안에 보급품을 배달하라고 신라군에게 명령한다. 뿐만 아니라 전쟁 이후 백제의 영토와 왕족(특히 의자왕)의 처우를 신라에 위임하겠다는 애초의 합의와 달리, 신라군이 기일을 어겨 도착하면 당나라가 직접 백제의 운명을 결정하겠다는 선언으로 소정방은 김춘추를 당혹케 한다. 그 결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에겐 정해진 시간 안에 백제의 영토를 뚫고 당군과 합류해야 하는 임무가 부과된 반면, 백제 측에는 어떻게든 신라군을 막아 보급품 배달을 저지할 경우 당나라와 직접 교섭할 수 있는 기회가 발생한다.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 싸우거나 이익만 챙기는 조정에 신물이 난 의자왕은 우직한 충신 계백(박중훈) 장군을 황산벌로 급파해 신라군의 전진을 막도록 하고, 5만 군사를 이끌고 황산벌에 도착한 김유신은 5천 명의 ‘결사대’로 그들을 저지하는 계백과 대치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앞서 말했듯 코미디적 요소가 강한 이 작품 속에서도 특히 영화의 초중반부에 그런 특성이 집중되어 있는데, 일단 딱딱하고 고상한 서울 ‘표준어’를 썼던 이전의 시대극과 다르게 각 나라의 지리적 위치에 따라 신라군은 경상도 사투리, 백제군은 전라도 사투리를 맛깔스럽게 사용하는 것이 무척이나 재미있고도 중요한(지금은 영화 개봉 당시만큼의 참신함이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설정으로 작용한다. 또 배경 음악으로 락 뮤직이 사용된다거나 패러디적 장면들이 등장하고, 신라와 백제 간의 초기 전투들이 랩 ‘디스’ 전을 연상시키는 욕설 배틀, "연고전"(혹은 "고연전")의 모습과 비슷한 응원단 싸움으로 묘사되는 등, 당시의 상황과 의도적으로 동떨어지게 배열한 장치들이 영화 안에 재기발랄함을 더해 준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단순한 ‘코미디’로 분류하는 것이 못내 아쉬운 이유는, 중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가며 더욱 진중한 주제들을 다루는 이 작품이 (개인적으로는) 볼 때마다 새로운 생각 거리를 던져 주기 때문이다. 실제의 역사적 전투에 관한 시대극을 만들면서도 반전주의적 시선을 놓치지 않은, 또한 어느 한 ‘영웅’에 집중하지 않고 농사 짓다 얼결에 끌려온 백성들처럼 평범한 이들의 관계와 입장에도 카메라 렌즈를 머물게 했던 감독 덕분에, [황산벌]은 ‘역사’ 영화, 혹은 ‘전쟁’ 영화로 제한되지 않으면서 ‘인간’에 관한 다양한 고찰을 제안할 수 있게 된다.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며 흥미롭게 느껴졌던 부분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는 작품 자체를 관통하는 테마로 볼 수 있을 ‘희생’, 더 정확하게는 강자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희생’이라는 측면이었다. 일단 전쟁 자체를 국가 혹은 기득권이라는 ‘강자’가 상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일반 국민들에게 억지로 떠안기는 희생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그 외에도 이 영화 내에서는 ‘강자’가 자기보다 약한 누군가를 착취하며 희생을 요구하는 구도가 계속해서 되풀이된다. 우선 분량이나 중요도에 있어 이 작품의 ‘주연급’에 해당하는 계백과 김유신에게서 그런 ‘강자’와 ‘약자’의 입장이 동시에 나타나는데, 그런 면에서는 이들을 영화 속에서 가장 입체적으로 표현된 인물들이라 정의할 수 있겠다.
먼저 계백은 충성심 강하고 과묵한, 임무를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은 물론 가족의 목숨도 바치길 주저 않는 전통적 ‘남성성’의 정석처럼 보일 수 있지만, 김유신이 비난하듯 사실은 정치를 모르고 융통성도 없기에 지도자로서는 무책임하다고 해야 할 인물이다. 자신의 주군인 의자왕으로부터 황산벌로의 출정을 - 사실상 ‘죽음’이라는 희생을 - 명령 받자 이에 복종하는 과정에서 그는 적군에게 잡혀 치욕을 당하느니 명예롭게 죽으라며 아내와 자식들을 베어 버리는 식으로 자신의 가족에게도 똑같은 희생을 강요한다. 아군 숫자의 열 배가 되는 신라군을 상대해야 하는 계백의 궁극적 목표는 승리가 아니라 ‘명예’로서, 이를 추구하느라 그는 “죽기 전까지 갑옷을 벗지 말라”는 비실용적 명령을 부하들에게 내리게 된다. 죽음도 각오했다는 자신의 신념과 헌신을 증명하기 위한 그의 아집이 결국 백제 군병들을 끔찍한 패배로 내몰아 원치 않던 희생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반면 영화 속 김유신은 ‘정치’와 ‘전쟁’ 모두에 능통한 책략가로, 뒤틀린 ‘이상주의자’이자 단순무식한 계백과 달리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실용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한다. 하지만 명예나 명분 대신 ‘실리’를 추구한다는 차이를 제외하면 김유신 또한 계백보다 더 옳거나 훌륭하다고 보기 어려운데, 이는 그가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작은 희생’을 일삼는, 그러니까 ‘효율성’을 빌미로 사람의 목숨을 도구처럼 소비하는 비정함을 지녔기 때문이다. 김유신은 소정방의 오만함과 옹졸함에, 당나라에게서 얻어 낼 이익에 눈이 팔린 김춘추의 비굴함에 분노하며 당군의 보급품 배달이나 하게 된 신라군의 신세를 수치스럽게 여기지만,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고 황산벌에서의 전투를 이기기 위해 어린 화랑들의 죽음을 강요하는 모순적 태도를 보이고 만다. 다시 말해 계백과 김유신은 강자가 약자를, 그 약자가 더한 약자를 착취하며 희생을 요구하는 잔인한 수레바퀴, 자신의 목표와 목적을 위해 자기 ‘아래’에 있는 누군가를 이용하는 기득권의 이기심과 비인간성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과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며 흥미롭게 느낀 부분을 연결시켜 생각해 보고 싶은데, 강자와 약자 사이 힘의 불균형과 희생의 강요를 상징하는 도구이자 [황산벌]의 ‘명대사’라고도 부를 수 있는 (ㅎㅎ…) “거시기”가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의자왕이 계백을 불러 황산벌로의 출정을 명할 때 의자왕의 정확한 대사는 “계백아… 니가 거시기 혀야겄다”이고, 이때 계백은 무슨 소리냐고 되묻지도 않은 채 “거시기 하려면 일찍 자야제”라며 물러나 복종한다. 이후에는 계백이 부하들을 상대로 “거시기”라는 표현을 쓰면서, 죽을 각오로 싸울 것을 종용하고자 “우리의 전략적인 거시기는 머시기헐 때까지 갑옷을 거시기 헌다”고 말한다. 물론 이 대사들은 ‘거시기’ 한 단어로 모든 대화가 가능한 전라도 사투리의 특색을 이용한 유머이며, 영화 안에서 김유신이 밀정을 통해 계백의 명령을 전해 듣고도 ‘거시기’란 단어의 뜻을 유추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는 장면들이 재미있게 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처럼 다양한 의미의 ‘거시기’라는 말이 이번엔 왠지 씁쓸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은, 외부인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관련자들은 바로 이해하는 이 표현이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고 희생을 요구할 때 자신의 의도와 책임을 뭉뚱그려 두루뭉실하게 전하는 비겁함과 악랄함의 상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의자왕이 계백에게 "거시기 해라"라는 불분명한 명을 내릴 때 그 안에는 "왕을 위해 목숨을 바쳐라"라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음에도 그는 그런 직접적인 요구를 입 밖에 내어 구체화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미안하고 민망해서 대충 넘어간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또한 결국은 자신의 의지가 관철될 것임을 확신하는 강자의 여유 혹은 기만으로 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이로 인해 계백은 "콩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수준을 넘어 눈치껏 자기 자신을 갈아 넣고 희생해야 할 뿐 아니라 그러한 착취와 파멸에 대한 책임마저 스스로 져야 하는 입장으로 옮겨 간다. 왕이 그에게 "대신 죽으라"는 말을 하지 않은 이상 계백의 죽음은 왕의 책임이 아니며, 그러한 마지막은 왕의 불공평하고 강압적인 요구를 거부하지 못한 강제적 순종의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 기꺼이 ‘자임한’ 종착점이 된다. 차가운 힘의 논리와 불평등의 한계 안에서 이리저리 휩쓸리고 이용 당하며 억울한 피해를 입은 사람 가운데 그 고통의 이유마저 스스로가 짊어져야 했던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후 계백이 부하들에게 똑같이 “거시기”를 – 그러니까 죽음을 – 강요했듯, 영화 내내 강자가 약자에게 쓰는 “거시기”는 대부분 부정적인, 상대의 희생을 상정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는 전라도 사투리를 쓰지 않는 신라 진영에서도 비슷하게 재현되는데, 김유신과 그의 장군들이 ‘약자’인 평민들, 혹은 자식들에게 쓰는 언어와 표현이 백제 군의 “거시기”와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음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김유신은 백제를 향한 신라군의 살의를 끌어올리기 위해 몇몇 부하들을 풀어 뜬소문을 퍼트리거나 악감정을 부추기고,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신정근)은 아들인 화랑 반굴을 어떻게든 사지로 내몰기 위해 “마음 같아선” 자기가 자식 대신 죽고 싶지만 자신은 “죽으봐야 약발이 안 멕힌다”는 명대사(?)로 설득한다. 이런 방식을 통해 약자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책임질 필요 없는 착취를 원하는 기득권의 언어는, 자신의 잘못과 악의를 숨기며 도리어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려는 거짓과 기만, 비겁함에 그 바탕을 두게 된다.
그럼에도 영화는 강자의 비열한 언어에서 끝나지 않는다. 강자가 쓰는 “거시기”가 거짓인 반면, 이 영화 속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쓰는 언어는 늘 진실을 전하는 것이다. 속내를 감추고 의도를 모호하게 표현하는 왕족이나 장군들과 달리 일반 병사들은 투박한 언어로 진심을 드러내며, 자신의 불만과 두려움, 그리고 즐거움까지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 황산벌 전투가 백제군의 패배로 끝나 가는 가운데 계백과 몇몇 장군들이 요새 안의 마지막 대피처로 숨어들 때 평민인 군사 한 명(이문식)도 얼떨결에 이들을 따라 들어오고, 그를 본 계백이 병사의 이름을 묻자 그는 이 상황에 이름은 알아 무엇하겠느냐며 “그냥 거시기로 불러 달라”고만 대답한다. 사투리를 이용한 유머의 연장선으로 보였던 이 대목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반전을 불러오는데, 그를 살려 보내길 원했던 계백의 노력 덕에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재회한 병사의 이름이 실제로도 "거시기"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거짓을 일삼던 기득권과 달리 이 평범하고 힘 없는 약자는 끝까지 진실만을 말했다는 사실이, 그럼으로 추수를 앞둔 그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설정이 꽤나 뭉클하게 다가온다.
이렇게 작품 속에서의 의미 있는 회복, 즉 ‘정의’는 이 진실된 약자 “거시기”를 통해 결국 이루어진다. 마지막 순간, 명예 하나를 쫓느라 자신의 가족마저 직접 살해했던 계백은 거시기가 하는 말을 듣다가 아내의 유언을 기억해 내고, 그렇게 집착적으로 갈구하던 명예 대신 ‘이름도 모르는’ 평범한 병사 ‘거시기’를 탈출시키며 “죽을 때 죽더라도 뭔가를 남겨야” 한다면 “난 자네를 남기고 싶네”라고 선언한다. 여태껏 자신의 부하들과 병사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던 희생의 고리를 끊고 한 생명을 구해 내며 ‘회복’이라는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다. 이후 계백은 김유신에게 패배해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의 끝을 목도하고 이 모든 희생을 통해 이룬 ‘승리’에 괴로워하던 김유신도 당나라 군 앞에서 신라인으로서의 자존심을 확인한 이후 ‘회복’을 경험한다. 도주를 포기하고 패배를 인정한 계백의 선택은, 그에게 출정을 명했던 의자왕이 아들들로부터 “우덜이 죽으면 약발이 안 먹혀라”라며 자결을 종용 받는 수모까지 당하도록 만드는데, 이처럼 아버지가 아들의 희생을 요구할 때 쓰였던 언어가 다시 아들이 아버지의 희생을 강요하는 상황에 재등장하면서, 어떤 시적 정의(poetic justice)의 구현처럼 느껴지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모호하고 빈곤한 기득권의 언어, 자신의 죄과와 책임을 숨기기 위해 소리를 높이는 강자의 비논리적인 언쟁에 너무 많은 이들이 고통 받고 있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의 언어에 진실이 담겨 있다는, 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확신과 믿음이 나를 지탱해 준다. 결국 강자의 아집과 비인간성을 뚫고 승리와 회복을 불러 오는 것은 평범한 이들이 용기 내어 말하는 진실뿐임을 믿기에. 유난히 추웠다는 지난 겨울, 광장에 모인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놓지 않았던 그 진실의 언어가 결국은 봄 햇살 가득한 날 온 나라에 울려 퍼진 것처럼, 또한 제국과 왕조들이 하나둘 스러지고 기세등등하던 권력가들도 모두 잊혀져 간 그 긴긴 시간 동안 민중은 여전히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이 땅을 풍요롭게 만들어 온 것처럼 말이다. 어느 누가 거짓과 기만을 통해 상대를 착취하고 짓밟으려 애쓸지라도 추수를 기다리는 들판은 결국 진실을 붙잡은 이들의 몫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