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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수 Aug 03. 2018

'비접촉'이 불러온 '사이버 트러블'

접촉과 비접촉의 차이가 청소년 사이버 트러블을 만든다.

요즘 비정상 '접촉'으로 인해 세상이 시끄럽다. 원래 '접촉'이라는 행위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무엇보다 '접촉'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감성적 소통을 대변해왔고, 국가와 국가 간에서도 외교적 신뢰를 상징하는 의미로 작용을 해왔다.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도 이 '접촉'은 심오한 의미였다. 우리는 따뜻하고, 튼튼하고 또 서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마음의 언어였다. 맞다. '접촉'은 '고귀'한 것이었고, '순수'한 것이었다.


그러한 '접촉'이 지금은 낯선 모습으로 변해 있다. '사전적 해설' 또 다른 의미를 한 줄 추가시켰고, 사회적 합의에서도 조금씩 적절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차이'를 대변하는  <불편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안타깝지만 단어가 한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안타까워도 어떻게 하겠어? 순응해야지.라고 혼잣말을 해볼 수밖에 없다.


'접촉'이 고귀하고 순수했던 것은 '접촉'이 지금까지 좋은 의미로서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과 접촉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스치는 것과 만지는 행위를 뛰어넘어 그 이상의 교감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문적인 강렬한 의사소통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접촉은 단순한 '터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람을 보고 있다는 건 '시각적 접촉'에 해당하고, 또 이야기를 듣는 것 또한 '청각적 접촉'에 해당한다. 조금 더 넓은 의미로 우리가 '마주'한다는 것은 서로의 공기를 통해 그 자체만으로도 가까운 접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포괄적 '접촉'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의 감수성을 읽을 수 있는 동물적 감각을 가지게 만든다. 보면서 숨길 수 없는 부분까지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를 마주하는 데 있어서 감정을 완벽하게 숨길 수 없다. 그래서 '접촉'하는 순간에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를 신경 쓰고, 과정안에서 '예의와 배려'를 갖추려고 노력한다. 물론 싸움. 욕설. 비난. 시기. 원망. 등 그렇지 못한 '접촉'도 있다.


최근 학계에서 '디지털 역기능'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사이버 폭력'이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청소년 스마트폰 보유율이 90%에 도달했고, 초등학생의 스마트폰 보유율이 50%를 넘어섰다. 수치로 보면 대한민국 청소년은 평균적으로 매일 2시간 이상은 스마트폰 세상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하루 평균 2시간은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다. 그만큼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스마트폰이라는 '비접촉 세상'에 일찍 발을 들여놓았고, 그 '비접촉 세상'에서 그들만의 또 다른 삶을 보내고 있다. 마치 스마트폰만 있으면 '내 삶은 최고다'라는 표정을 간직한 채 말이다.


스마트폰 세상.

그러니까 사이버 공간에서의 호흡과 행동은 청소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청소년 못지않게 스마트폰을 상시 사용하고 있는 '나'로서도 사실 착각적인 오류를 범하는 행동들을 스스로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한편으로 "대체 청소년들은 어떨까?"라는 즉흥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사이버 공간은 '접촉' 이 없는 공간이다. '접촉'이 없다 보니 어떤 현상들이 발생할까? 나는 그 연결점을 '학교폭력'이나 '소년법' 같은 청소년들의 비행과 범죄 행동으로 연결시켜 본다. 즉, 사이버 공간은 접촉이 없는 공간이다 보니 앞서 말한대로 상대를 향한 기본적인 소양이 필요없다는 착각에 빠진다. 좀 더 심하게 표현하자면 이 놈의 사이버 공간은 대체 '윤리'와 '규범'은 찾아야 찾아볼 수도 없는 마치 '무법지대'와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지금의 법은 청소년들의 수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많은 '법'을 알고 있고, 염두에 두고 있지만 사실은 '법'의 영향력은 이 비접촉 공간이라는 사이버 공간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제 역할을 하고 있다면 청소년들의 언어폭력,명예훼손,모욕,명의도용,성희롱...등 수많은 잘못된 행위들이 사이버 공간으로 집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정보통신망법'을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나마 조금 안다고 글에 힘을 주는 친구는(여기에서 안다는 친구는 대부분 모르고 법을 위반했거나 피해를 입었던 청소년을 말한다.) 이렇게 하면 잘못된 것이더라. 그래서 '정보통신망법'이라는 법에 걸리더라. 고작 이 정도일 뿐이다.  


'접촉'과 '비접촉'이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예를 들면 이렇다. '접촉'의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스스로 최소한의 윤리의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분노가 치밀고 화가 나더라도 지금까지 학습된 도덕적 가치관 때문에 지금까지 참고 견딘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에서 '비접촉' 공간은 다르다. 상대의 실물이 내 앞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향한 분노를 참는 데 망설임이 없다. 맞다. 충동적이기 딱 좋은 환경이다.


실물의 부재. 즉, 직접적이지 못하다는 건 용기면에서 그 용기를 쉽게 허락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청소년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용감해진다. 그들의 사이버 활동을 보고 있으면 마치 투구를 쓴 전사의 모습을 닮았다. 오죽하면 '키보드 워리어'라는 말이 나왔을까?


현상은 갈수록 더욱 심해질 것이다. 우리가 사이버 공간을 만들고 이를 허락했을 때는 당연히 이러한 상황까지도 우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법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관계 형성의 순수한 역할만을 기대하며 만들었을 것이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오히려 더 강한 '법'과 '규범'을 만들면 되겠지...라팔짱을 끼며 안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쩌지. 이미 사이버 공간은 위험수위가 넘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청소년 '트러블'보다 앞으로 다가올 '트러블'이 솔직히 더 걱정이다.

  

당장 '타계책'이 절실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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