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나이프가 이긴다, <나이브스 아웃>
건장한 소년 하나가 잠에 취해 있다. 바닥에 벗어놓은 길고 화려한 예복을 보아하니,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는 귀한 아들임이 분명하다. 후경의 곡식단들은 그가 꾸는 꿈을 암시한다. 그에게는 열 명의 배다른 형이 있는데, 형들이 묶은 곡식단이 그가 묶은 곡식단에 절을 하는 꿈을 꾸고 있다. 그는 신이 나서 형들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돌아오는 것은 미움과 비웃음이었다. 더럽고 땀이 밴 복장으로 매일같이 양을 치러 다니는 형들 눈에는 좋은 옷만 입고 양도 안 치고 아버지 옆에 붙어 후계자처럼 구는 동생이 좋게 보일 리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해와 달과 열한 개의 별이 그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고, 가족들에게 자랑을 하다가 아버지에게마저 '우리 모두가 땅에 엎드려 너에게 절하라는 것이냐'라는 핀잔을 듣게 된다. 결국 그 꿈이 화근이 되어 형들은 자신들의 혈육인 동생을 죽이려다가, 대신 이집트로 가는 상인에게 돈을 받고 팔아넘긴다.
그는 애굽(이집트)의 바로(파라오)의 친위대장 보디발 장군의 집에 노예로 팔려가서, 갖은 고생 끝에 애굽의 총리대신에까지 오르는 입지전적 인물 요셉이다. '외국인 노동자'였을 요셉의 타향살이는 어땠을까?
이 질문에 영감을 주는 영화적 인물이 있다. 바로 미스터리 영화 <나이브스 아웃 Knives out>의 여주인공 '마르타'이다.
'인적이 드문 교외의 대저택에서 85세 생일날 숨진 채 발견된 베스트셀러 추리작가의 이야기'를 그린 미스터리 영화 <나이브스 아웃 Knives out>. 흡인력 있는 스토리와 치밀한 구성 때문에 당연히 원작 소설이 있을 것만 같지만, 놀랍게도 이 영화는 라이언 존슨 감독이 직접 각본과 연출, 제작에까지 참여한 오리지널 '라이오넬 존슨' 작품이다.
감독은 이 이야기를 10년 전부터 구상해 왔으며 추리소설가 '애거사 크리스티'와 스릴러 거장 '히치콕'을 결합해 새로운 스타일의 추리 영화를 의도했다는데, 그것을 입증하듯 빈틈없는 전개, 능수능란한 플래시백의 사용과 완벽에 가까운 씨 뿌리기와 거둬들이기, 소위 백 퍼센트 '떡밥 회수율' 등을 자랑하고 있다.
양을 치는 형들을 만나러 갔다가, 하루아침에 낯선 외국으로 끌려간 요셉이 비참하게 노예 생활한 보디발 장군의 저택이 이러했을까. 처음에는 고생을 했지만 요셉의 지혜와 충정심을 주인 보디발이 곧 알아보고 그를 저택의 살림을 총괄하는 총무로 발탁한다.
요셉처럼 주인공 마르타(아나 디 아르마스) 역시 외국인 노동자이다. 추정컨대 불법체류자로 숨죽이고 사는 부모와 달리 마르타와 여동생은 미국 국적을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거짓에 대한 생각만으로 구토감을 느낀다는 '마르타'는 타고난 정직함과 영리함 덕분에 저택의 주인이자, 베스트셀러 대부호 작가인 할란 트롬비(크리스토퍼 플러머)의 간병인으로서 신망을 받고 있었다.
85세 생일, 온 가족이 모여 할란의 생일을 축하하지만, 다음날 아침 가정부 프란(에디 패터슨)은 목을 긋고 자살한 할란의 시신을 발견한다. 유능한 사립탐정 블랑(다니엘 크레이그)이 의뢰를 받고 이 저택에 찾아오면서 사건은 해결되는 듯하지만, 가족 모두에게 살해의 동기가 있고, 사망 원인에 대한 엇갈린 정보가 난무하면서 사건은 다시 미궁에 빠진다.
낡은 타자기 한 대로 시작해, 지금까지 수많은 작품을 히트 치면서 자신만의 미스터리 유니버스를 완성한 대작가 할란 트롬비는 85세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유언장을 수정하였다. 할란에게 있어서 유산 상속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인생이란 '자기 의지로 세상을 개척하는 것'이므로, 늦었지만 자녀들에게 각자의 인생을 찾아주고자 유산을 한 푼도 물려주지 않기로 마음을 정한다.
할란은 이 저택을 20년 전 파키스탄 부호에게서 사들였다. 무일푼으로 시작해 자수성가한 그에게 이 집은 아마도 성전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할란은 누구에게 맡겨야 자신의 성전과 자신의 원칙이 파괴되지 않고 지켜질지 판단했다. 돈만 밝히는 가족들에 의해 공중분해될 것이 뻔한 자신의 왕국을 지키려면 정직한 마르타는 너무도 적임자였다.
마르타는 어쩌다가 이곳까지 흘러왔을까. 가족들은 아버지의 간병인인 마르타를 가족처럼 여긴다고 하면서, 정작 그녀의 출신지에 대해선 누구 하나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마르타에게 소망이 있다면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삶이다. 마르타의 소망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할란은 그녀가 미국에서 뿌리내릴 수 있도록 자신의 저택과 모든 재산권을 그녀에게 상속함으로써 자신의 성전과 원칙을 동시에 지키고자 한다.
주사약을 혼동한 마르타의 실수로 10분 후에 자신의 죽게 됨을 예감한 할란은 마르타가 살인자가 되면 그녀의 가정이 깨지기 때문에 마르타의 안전을 위해 자살을 선택한다. 앰뷸런스를 부르려던 마르타를 만류하며 "나를 위해 그렇게 해줘"라고 부탁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마르타가 적법한 상속자가 되어 자신의 성전과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이기에, 그는 기꺼이 자살을 선택한다.
할란 사망 사건의 비밀은 어느덧 마르타가 지켜야 할 사명이 되었다. 사건의 진실로 파고드는 블랑 형사는 그녀에게 압박감으로 다가오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그녀의 타고난 정직함은 무기가 되었다가 알리바이가 되었다가 덫이 되기도 한다.
그동안 둘만의 진실게임인 줄 알았던 마르타와 블랑 형사는 이 게임을 설계한 자가 숨어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게 누구인지 알기 위해 공조한다. 물론 유산 상속에서 배제된 가족들은 마르타가 유일한 상속자가 되자, 가족이라며 요란 떨 때는 언제고 마르타를 대놓고 모욕하고 협박한다.
마르타는 할란의 적법한 상속자가 되나, 유산 분쟁은 이제 시작이다. 그리고 마르타가 이 땅 미국에 온 이유는 무엇이며, 무슨 꿈을 간직하고 살아왔는지, 그리고 은인인 할란의 성전을 마르타가 어떻게 지켜나갈지 궁금증이 생겨 속편이 기다려진다.
형님들의 곡식단이 제게 절하는 기분 좋은 꿈을 꾸었을 때, 17세의 소년 요셉은 그 꿈을 그저 '아버지 야곱의 상속자가 되는 꿈'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외모로 보나, 지적 능력으로 보나 열 명의 형들보다 자신이 적임자라는 자만심에 빠져있던 어느 날 요셉은 왜 자기가 아버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먼 이집트의 어느 장군 저택에까지 노예로 팔려와 이토록 천한 삶을 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덧 주인 보디발의 인정도 받고 힘든 노역에서 벗어나 살만하니,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지속적인 유혹과 희롱을 당하고 되레 성추행범으로 무고를 당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 속에서 천 불이 났을 것이다.
또 어느덧 감옥의 간수장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감옥 관리 보조로 일하면서 마침 옥에 갇힌 고위 관료의 꿈 해몽을 도운 덕으로 빛을 보나 기대했는데, 함흥차사 2년의 시간이 흐른다. 마침내 요셉은 바로가 꾼 길몽과 흉몽의 꿈 풀이를 돕고, 대풍년과 대흉년을 관리할 특별 총리대신으로 발탁된다. 17세의 유목 민족 출신 소년 노예가 이집트 제국의 총리대신으로 발탁이 되기까지 도합 13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는 '곡식단이 절하는 꿈'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요셉은 7년의 대풍년 동안 백성들로부터 한해 소출의 1/5를 꾸준히 사들여 곡식을 저장해 왔다. 바로의 꿈에 대한 요셉의 해몽이 맞는다면 앞으로 7년의 대흉년이 이어질 터였다. 8년 차부터 시작된 흉년에 애굽 주변 국가들과 민족들은 대재앙을 맞이한다. 요셉의 가족들도 그 흉년을 피해 가지 못하고 아버지 야곱은 곡식이 있다는 애굽에 형들을 보낸다.
20년 전 친동생인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그 형들이 굶주림에 곡식을 구하러 여기까지 찾아왔다. 이제 요셉은 자신의 풍파 못지않게, 죄의식과 자책감으로 평탄치 못했던 형제들의 삶,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던 아버지 야곱의 슬픔 등 가족의 지난 20년의 회한을 보듬으며, 남은 6년의 흉년을 무사히 치른다. 이제 야곱의 가족은 이곳에서 거대한 민족을 이룬 후 4백 년 후 모세와 함께 가나안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른 이들의 꿈은 즉각 풀리는 데 비해, 요셉의 꿈은 너무나 원대했기에 그 의미를 아는 데 20년이 걸렸다. 세월만 지나면 다행이지, 시련과 고통, 인내를 동반한 긴 세월이었다. 보디발 장군과 간수장, 그리고 제국의 왕 바로에 이르기까지 권력자들이 그에게 전권을 허락했던 이유가 있었다. 요셉을 물론 신임했지만, 그보다 요셉이 섬긴다는 신이 요셉과 함께 하면서, 자기들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준다는 확신이었다. 도대체 어떤 신이기에 요셉이 항상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겁니다"라며 겸양하며 충정할 수 있는지 '요셉이 섬긴다는 신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심'은 요셉 주변 사람들이 가졌던 공통점이었다.
요즘 우리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 옛날, '아, 이 사람이 믿는 신은 대체 누굴까'하는 큰 경외심을 갖게 하던 요셉과 같은 겸손한 삶을 살고 있지도 않으면서, 총리 요셉과 같은 지위에만 관심이 있지는 않은가. 각자의 자리에서 주변에 '이 사람이 믿는 신이 도대체 누구인지' 호기심과 경외심을 주는 요셉 같은 삶까지는 아니라 해도, 최소한 주변에 경악심을 주는 하루는 아니었는지 '성도라면' 매일 자신의 삶을 되돌아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