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날
선택과 책임
신혼여행 마지막 날이 생각난다.
영원히 끝나지 않길 바라던 꿈같던 시간, 동시에 느껴지는 집에 대한 그리움.
이곳을 떠나기가 싫으면서도,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싶다는 모순적인 감정이 기억난다.
가족들은 아직 잠들어 있는 이른 아침, 강릉에서의 마지막 날 눈을 뜬 채로 누워있는 나는
또다시 그 모순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다.
오늘은 눈이 정말 '펑펑' 내리고 있다.
일기예보에는 강릉 지역에 폭설이 내리면서 창밖은 온통 하얀 세상이 되고 있다.
우리가 아침식사를 하러 나가던 길에 아름답게 내리던 눈은 점점 우려스러울 정도로 많이 내리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강릉집에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출발 시간을 앞당기기로 했고 서둘러 짐을 쌌다.
여행의 시작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마무리 아닐까.
하지만 폭설로 인해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기로에 선 우리에게는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여행을돌아보며 짐을 싸고, 텅 빈 집을 보며 감상에 젖어볼 기회가 아쉽게도 없었다.
그저 떠나기 전 한번, 현관에 서서 우리가 17일을 살았던 강릉집 그 공간을 바라보며 안녕을 말했다.
짐을 차에 싣고 주차장을 나서려 할 때, 장애물이 나타났다.
강릉집은 지하주차장의 출입구 경사가 가파르다.
폭설로 주차장 출입구에 눈이 쌓이자 우리 차가 미끄러져 나가질 못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가속페달을 밟아도 차는 올라간 만큼 다시 미끄러져 내리기만 할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터질듯한 자동차 엔진소음이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통제를 벗어나 미끄러져 내려가는 자동차가 벽에 부딪히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난생처음 겪는 돌발 상황에 아내는 겁을 먹었고 나도 적잖이 당황을 했다.
주차장부터 이렇게 미끄럽다면 집에 가는 길은 얼마나 더 위험할까.
아내와 딸아이를 태우고 운전하는 나로서, 안전을 생각한다면 눈이 그치고 제설작업이 끝날 때까지 강릉에 머무르는 게 맞았다.
하지만 아내는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했고, 무엇보다 아직도 무섭게 내리고 있는 이 눈이 언제 그칠지 알 수 없었으며 강릉 동네길은 서울처럼 제설이 빨리 진행되지도 않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출발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만약 사고가 나고 우리 가족 중 누군가 다친다면 그 무엇이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만사 다 제쳐놓고 안전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해야겠다는 결정을 모든 세상이 존중해 주는가. 더욱이 이틀은 폭설이 내릴 수 있다는 일기예보를 보며 내 머리는 계속 더 복잡해져 갔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갈수록 결정해야 할 것들이 늘어나고,
그만큼 나를 짓누르는 책임감은 무거워져 가는 것을 느낀다.
직장을 옮길 때,
더 나은 미래를 원했지만, 실패하면 감당해야 할 결과는 두려웠다.
내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더 나은 대우를 원했고 더 좋은 조건 속에 일하는 친구들을 보며 조바심을 느꼈다.
하지만 전혀 다른 분야로의 이직이었기에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는 물거품이 되고, 많은 시간을 투여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퇴직이 불가피했다. 그에 따라 수입도 단절될 것이었다.
출세의 기로에서 고민할 때,
퇴근 후 몇 시간, 그리고 주말 일부분 시간만 투자하며 준비한다면 빠른 승진이 가능해 보였다. 더 나은 직책과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가족과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딸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아내와 하루하루 함께 나이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직장에서의 출세와 가정에 충실함은 어느 정도 음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재정적 결정을 내릴 때,
모두가 내 집 마련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계속해서 오르는 집값이 내 마음을 조급하게 하고, 투자는 내 집을 마련한 이후에 늘려가는 것이 정석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반대로 수억의 대출을 일으켜 매입한 내 집이 십수 년간 은행이자라는 멍에로 나를 짓누를 것을 생각하면, 한동안 더 전세로 살며 다양한 투자나 창업도 도전해 보는 것이 효과적일 것 같았다. 부자는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니까. 하지만 실패하면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나는 많은 중요한 결정들을 내렸던 것 같다.
선택의 기로에서 정말 많은 고민을 했고, 주변에 조언을 구했다. 누군가 "어떻게 되던 괜찮아"라고 말해주길 바랐던 적도 있다.
하지만 고민 끝에 나온 결정이 매번 최선이었는지 잘 모르겠고, 생각보다 내 인생 속 결정에 대해 조언해 줄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내 선택에 대해 대신 책임져주지 않았다. 책임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
모든 선택의 정답을 알 수 있을까?
모든 선택의 책임은 확실히 내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중요한 것은 정답과 오답이 아니라그 선택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나는 차에서 내려 주차장 출입구에 쌓인 눈을 쓸어냈다.
계속 내리는 눈을 맞으며 꽤 오랜 시간 눈을 쓸어낸 것 같다.
우리 자동차는 내가 치워낸 눈을 따라 난 길을 힘차게 올라갔다.
눈이 수북이 쌓인 강릉시를 조심스럽게 빠져나오자마자 거짓말처럼 날씨는 맑아졌다.
눈이 그칠 때까지 남아있었어야 했을까,
한시라도 빠르게 강릉에서 출발해야 했을까.
나는 우리 가족을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와야 하는 책임에 충실한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