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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erson Jan 28. 2024

죄인

Pierson 단편소설

여자의 목에서 피가 솟구친다.     

방안에는 금세 역한 비린내가 가득해지고, 목을 붙잡고 쓰러진 여자는 바닥에서 허우적댄다.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저미듯 훑고 지나간다.

     

"뭐지 이게? 꿈인가?"     


남자의 눈빛, 살인자의 그 결연한 눈빛과 손에 쥔 피 묻은 칼을 보자 다른 생각은 들지 않는다.     


"도망가야돼.."     


정신없이 출구를 향해 뛴다.

내 뒤로, 또 다른 여자의 비명이 들린다.     




평범한 사무실 분위기지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답답하게 느껴진다.

초록색 부직포 위 유리가 덮인 원형 테이블에 혼자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의미 없이 시간만 확인한다.      

앞으로 내게 밀려올 일들을 생각하고 있자니 목이 꽉 막힌 것처럼 먹먹하다.

가능하다면 이 모든 것들이 꿈이길 바라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서류철을 가지고 들어온 남자가 건조하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감찰계 이창석 경위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김소영 순경입니다.“


목이 잠겨 쉰 듯한 내 목소리가 마치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자.. 보자.. 오늘 여기 감찰계에 오시게 된 것은, 지난 2023년 1월 30일 남동구에서 발생한 사건 관련해서 현장에 출동하셨던 직원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알고 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김소영 순경님의 입장을 충분히 들어볼 거고요. 있는 그대로 최대한 자세하게 말씀해 주셔야 결과에도 잘 반영될 수 있으니 최대한 협조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네..."     


사무적으로 무미건조하게 늘어놓는 그의 설명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다.

그래, 아무리 재앙 같은 일이더라도 내 일이 아니면 별 대수롭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아니, 오히려 어느 때보다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다룰 수 있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이창석 경위가 묻는 이런저런 질문에 대답하다 보니, 경찰이 되겠다고 처음 부모님께 말씀드렸던 날들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많고 많은 직업 중 특히 위험한 경찰이 되겠다던 내 결정에 노발대발하며 반대하셨다. 어머니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교에 합격했는데, 얼마 되지도 않아 휴학하고 기껏 9급 공무원이 되겠다는 내 결정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하셨다.

두 달여간을 끈질기게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야 겨우 순경 시험을 준비해도 좋다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냈다.     

경찰이 되겠다는 결정은 내 나름 갖고 있던 신념이랄까, 뭐 그런 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약자들, 그래. 돈 없고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서 살고 싶다.'

그것이 일종의 나의 사명이자 인생의 목적이 되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한 번 사는 인생 어차피 직업 갖고 살아야 한다면, 단순히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자본주의식 논리보다는 적어도 내가 하는 일로 누군가를 도우며 살 수 있다면 그게 훨씬 의미 있는 인생이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그러고 보면 나는 늘 감상적이었고, 다른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잘하는 편이었다.      

이런 오지랖 넓은 성격 때문이었나보다. 직업을 고민할 때도 높은 연봉의 대기업에 들어가고자 하는 친구들과는 다르게, 어려운 사람들 돕는 경찰관이나 소방관이 내겐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나름 단단했던 신념 덕분에, 2년간의 비루했던 수험기간을 끝내고 23살의 어린 나이에 순경 시험에 합격했다.

반대하시는 줄만 알았던 부모님도 그날만큼은 기뻐하시며 환하게 웃으셨던 것이 기억난다. 좋은 기억들…     


"그래요. 김소영 순경은 2023년 1월 1일에 임용된 것이 맞습니까?"     

"임용은 아직이고, 말씀하신 날에 지구대로 배치되어 실습 과정 중에 있었습니다.“     


‘실습’이란 단어에 힘을 주어 대답하는 내 모습이 우습게 느껴진다.      


"실습 기간 동안 현장 근무가 좀 쉽지는 않았죠?"     

”네. 제가 아무래도 경험이 좀 부족하고, 신고가 워낙 많아서 한사람 몫을 충분히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실습생은 현장 실무에 바로 투입되진 않지 않아요? 순찰차에도 기존 근무자들이 두 명 탑승하고, 뒷좌석에 깍두기 식으로 타는 거 아니에요? 신고처리에 직접 나서나?“     

”네, 원래는 실습생은 선임 경찰관 두 명과 함께 움직이면서 신고 처리하는 것이 원칙인데, 요즘 지구대에 인력 부족 때문에 바쁠 때는 선임 경찰관 한 명이 실습생이랑 둘이 신고 처리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그랬고요.“     


이 경위는 지방청 사무직 자리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지구대 돌아가는 상황을 잘 모르는 듯했다. 정신없이 타자를 두드리던 이 경위의 얼굴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보이는가 싶더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목소리로 단숨에 말했다.     


”바쁘기도 했고 인원도 부족했고. 뭐 어쨌든 현장 적응하기가 좀 버거웠다는 거네요? 알겠습니다. 자, 이젠 본격적으로 사건 이야기를 좀 시작해 볼까 하는데요. 그날 있었던 일을 좀 상세하게 말씀해보시겠습니까?     


답답해서 물을 한 모금 마셨는데도, 여전히 목구멍은 꽉 막힌 듯 먹먹하다.     




그날도 그냥 평범한 날이었다. 정신없이 바쁜 건 일상이니까.     

시작부터 신고가 많았다. 교통사고, 절도, 주취자, 일반 폭력, 가정폭력 등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신고에 지구대의 모든 직원은 현장 출동과 사건 서류 작성 때문에 한시도 쉴 틈 없이 바빴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구나. 이 나라는 금주령을 때려야 해"     


좀 전까지 나와 함께 술에 취해 길바닥에 자고 있던 주취자를 귀가 조치하고 지구대로 들어온 박준호 경위가 한탄하듯이 말했다."     


"야 소영아, 그니까 네가 얼른 배워서 한 사람 몫을 해줘야 해. 실습생이라고 뭐 천천히 배워야겠다 뭐 이런 생각은 하면 안 된다?"


옆에서 사건 서류를 작성하던 선배 한 명이 농담조로 건진 말에 나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요 선배님, 최대한 빨리 배워서 확실하게 돕겠습니다!"     

"아니야, 그래도 소영이 잘하고 있어. 실습생은 원래 신고처리 따라다니면서 그냥 어떻게 하는지 보고 배우기만 해야 하는데, 이건 뭐 인원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바로 현장 투입하는 거잖아. 이래 놓고 사고라도 나봐. 인원 부족이니 실습이니 누가 알아주기나 해? 꼬리 자르기 당하고 우리만 독박 쓰는 거야.“     


박준호 경위가 한창 열을 내며 말하고 있을 때, 새로운 신고가 들어왔음을 알리는 익숙한 벨 소리가 연달아 울리자 순찰팀장이 말했다.     


"신고 2건 들어왔네. 패싸움이랑 층간소음 시비 신고 들어왔다. 패싸움은 순찰차 두 대가 나가야 할 것 같으니, 층간소음 시비를 박 경위랑 김소영 순경이 나가주셔야 할 것 같아. 뭐 단순 층간소음인 것 같으니까 별거 아닐 거야. 박 경위가 소영이 데리고 갔다 와.“     


박준호 경위는 차 키를 챙기며 내게 물었다.     


"야 소영아, 가자. 그래서 신고 내용은 뭐야?"     

"층간소음 시비고요, 평소에 층간소음 때문에 다툼이 있던 아랫집 사람이 신고자 집 앞에 찾아와서 항의하고 있답니다."      


나는 순찰팀용 스마트 폰에 뜬 신고 내용을 확인하고 박준호 경위와 함께 순찰차에 올라탔다.

밤 10시가 지난 시간임에도 도로에는 아직 차들이 많다. 어딘가로 향하는 수많은 자동차 사이를 피해 가며 도착한 현장은 4층짜리 빌라였다.     

3층에 사는 신고자 가족과 그 위층에 사는 30대 남성은 평소에도 층간소음 때문에 자주 언쟁하던 사이라고 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50대로 보이는 신고자와 30대 남성이 3층 현관 앞에서 말다툼하고 있었다.      


나와 박 경위는 당장이라도 서로 치고받을 듯이 말싸움을 하는 두 사람을 서로 떼놓기로 했다. 관련자들을 분리하는 것이 매뉴얼이기도 하니까.     

박 경위는 4층에 사는 30대 남성과 얘기하기 위해 그를 데리고 올라갔고, 나는 신고자의 집 앞에서 신고자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신고자분, 저는 ○○지구대 김소영 순경이라고 합니다. 층간소음 관련해서 윗집 사시는 분이 집 앞으로 찾아오신 거죠? 상황 확인을 위해 몇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혹시 폭행당하시진 않으셨나요?”     

“아니, 그건 아니고. 아 근데 저 사람 지금 한두 번 저러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좀 안돼? 찾아와서 저러는게 몇 번째인지 몰라 지금.”


말다툼으로 흥분한 신고자가 씩씩대며 말했다.      


“이전에도 찾아와서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나요? 신고는 이번이 처음이신 것 같은데요.”     

“이번에 온 게 세 번째는 되는 것 같아. 신고는 뭐 괜히 소란 피우기 싫어서 여태는 안 했지. 근데 이렇게 자꾸 오니까 도저히 화딱지 나서 못 참고 신고한 거잖아. 경찰들이 좀 해결해봐요!”      


“네. 신고자분 진술이랑 윗집 거주자분 말씀 먼저 충분히 들어보고 저희가 조치해볼게요. 신고자분 말씀처럼 저분이 계속 찾아와서 소란을 피우셨다면, 집으로 찾아오는 부분에 대해선 저희가 주의시킬 수 있고, 선생님이 원하시면 스토킹으로 고소도 가능은 하세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신고자분이 법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일 뿐이고요. 층간소음 분쟁 자체는 경찰이 개입해서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당사자분들이 잘 조정하시는 방법이 최선책이에요.

그건 그렇고, 저분이 주장하시는 소음은 어떤 걸 말하는 건가요?”     

“하, 참. 경찰이 못하면 누가 해결 한다는 거야? 신고자가 신고했으면 딱 부러지게 해결할 것이지. 그냥 내가 고소하는 것 말곤 경찰이 해줄 건 없다 이거잖아! 아까 그 남자 경찰관 어디 갔어? 여자라 그런가 뭔 말만 장황하고 해결할 의지가 없어.”     


신고자의 무례함에 부아가 치미는 것이 느껴졌지만, 억지로 삼키며 다시 물었다.     


“신고자분은 저랑 말씀 나누시면 돼요. 제가 말씀드리는 건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은 적극적으로 도와드리겠지만, 층간소음 문제는 당사자분들의 해결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씀 드리는 거예요.

다시 한번 여쭤볼게요. 저분이 말씀하시는 소음이 어떤 거예요?”      

“TV 소리 크다고 저러는 거야. 아, 내가 내 집에서 TV 좀 마음 놓고 보겠다는데 그게 시끄럽다고 소리 줄이라는 게 말이 돼? 안 그래? 그니까 저 사람한테 가서 잘 알아듣게 설명하고 이제 못 찾아오게 좀 해봐”

신고자가 말하는 동안에도, 집안에서는 누군가 계속 TV를 보는지 여전히 열린 문으로 새어 나오는 TV 소리가 복도를 타고 크게 울렸다.     


“네. 공동주택 살다 종종 이런 일이 생기긴 합니다. 그런데 신고자분이 저희에게 원하시는 건 층간소음 분쟁을 해결해주시길 원하는 것 같은데, 그 부분은 저희가 해결해드릴 수가 없어요. 시끄럽다는 저분한테 저희가 무조건 참고 살라고 말할 순 없으니까요. 신고자분도 답답하시겠지만, 저분도 저분대로 계속 소음 피해를 호소할 테니까요. 혹시 이웃사이 센터라는 층간소음 분쟁 조정 전문 기관이 있는데 알고 계신가요?”     

“아 진짜 이 여자 답답하네. 거기다 해결해달라 할 거면 경찰은 왜 불렀겠어? 경찰이 가서 저 사람한테 따끔하게 설명하고, ‘남의 집 찾아가는 건 불법이다. 다신 찾아가지 마라’하면 되는 거잖아! 저기 저 남자 경찰관이랑 밖에서 담배 하나 피면서 얘기하게 비켜봐.”     


4층 남자의 진술을 듣고 난 박 경위가 계단을 통해 내려오자 이를 본 신고자가 내 어깨를 밀치고 지나가며 박 경위에게 말했다.     


“저 여자랑은 말이 잘 안 통하니 나가서 담배 하나 피면서 얘기 좀 합시다.”     

“신고자분, 윗집 주민분이랑은 제가 잘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사유에서건 타인 거주지에 지속해서 찾아가서 항의 하는 것은 스토킹 처벌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음을 안내했어요. 그분도 이제 찾아가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다만, 선생님도 층간소음 관련해서는 좀 더 신경을 써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상당히 늦은 시간임에도 TV 소리가 많이 커요. 위층에서 제가 들어보니까 잠을 자는 데 방해가 될 정도로 TV 소리가 크게 들리긴 합니다.”     


박 경위는 신고자를 타이르며 4층 남자와 나눴던 대화 내용과 조치사항을 설명해줬으나, 신고자는 계속해서 ‘내 집에서 내가 TV 보는 게 남 눈치 봐야 할 일이냐’라며 큰 소리로 따졌고, 이에 박 경위는 다른 주민들에게 방해가 될까 하여 신고자에게 밖으로 나가서 얘기하자고 권했다.     


“자, 신고자분, 아까 담배 한 대 피우자고 하셨죠? 저랑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얘기 좀 해보시죠. 김소영 순경! 거기 TV 소리 좀, 가족들이랑 좀 얘기해서 어떻게 좀 줄이도록 하고 정리되면 나와”     

“네”     


신고자를 달래면서 계단을 내려가는 박 경위에게 대답하고, 나는 도어 스토퍼를 세워 현관문을 약간 열어 놓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에 들어가자 TV 속 배우가 내뱉는 감정적인 대사와 격정적인 배경음악이 더욱 크게 들렸다. 신고자의 딸로 보이는 20대 초반 정도의 여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신고받고 나온 경찰관입니다. 아버님이랑 윗집 주민분이랑은 이야기를 잘 나눴습니다. 근데 아무래도 TV 소리가 좀 많이 크긴 한 것 같아요. 이웃집에서 또 항의가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은데 TV 소리 좀 줄이시는 게 어떠실까요?”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는데도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아까 아빠가 한 말 못 들었어요? 우리 집에서 우리가 TV 보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에요?      

”네. 맞는 말씀이긴 한데, 시간이 지금 많이 늦기도 했고 아까 위에 주민분 말씀이 TV 소리가 너무 커서 잘 수가 없대요. 좀만 줄여주시면 윗집이랑 분쟁을 해결하는 일도 훨씬 수월할 것 같아요.     


‘개진상이네, 이 인간들….’이라고 생각했지만, 괜한 말싸움에 얽히기 싫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음에도 옆에 팔짱 끼고 서서 날 노려보고 있던 신고자 아내의 심기를 건들기엔 충분했나 보다.     


“아니 지금 뭐 윗집 편드는 거예요. 뭐에요? 우리가 신고했는데, 왜 우리 애한테 이래라저래라 난리예요. 윗집에서 뭐, 돈이라도 받았어요? 우리가 신고자고 우리가 피해자 아니에요?”


그때, 순식간에 일이 벌어졌다.      


집안에 하도 크게 울리는 TV 소리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두 모녀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인 탓에 나도 화가 났고, 솟구치는 아드레날린 때문에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외부의 지원을 받거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늘 살짝 열어 놓는 현관문이 문제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


부지불식간 나타난 윗집 남자가 기척도 없이 내 옆을 스치듯 지나갔고,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사이에 손에 든 부엌칼로 신고자 아내의 목을 깊숙이 찔렀다.     

여자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그 눈동자에 비치던 공포와 경악은 마치 사진처럼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방안에는 금세 피비린내가 가득 찼고, 목을 부여잡고 쓰러진 여자는 꿀럭꿀럭 피를 쏟으며 바닥에서 몸부림을 쳤지만, 목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거대한 체구를 가진 남자가 돌아서서 나를 내려봤다.

키는 190cm는 되어 보였고 육중한 몸뚱이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삼단봉으로 아무리 내리쳐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무언가 결심한 듯한 그의 눈빛은 살기로 가득했고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형형한 눈빛과 소름 끼치는 비소,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피 묻은 칼을 보자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무력감. 그 순간 내가 느낀 것은 절망스러울 정도의 무력함이었다.

스스로가 경찰관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그저 거대하고 잔인한 짐승 앞에 압도되어 떨고 있는 인간일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쉬운 것이 한둘이 아니다.

나는 아직 실습생이기 때문에 권총이나 전자충격기를 지급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루액이 들어있는 가스 분사기와 삼단봉은 갖고 있었다. 또한 그 살인범도 당시 내가 느꼈던 것만큼 거구의 사내는 아니었다. 사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180cm 언저리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평소 유도를 오랫동안 해온 내가 맞서 싸웠다면 어쩌면, 어쩌면 제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왜 그토록 스스로 무력하게 느껴졌고, 저항할 수조차 없을 만큼 그가 거대하며 무자비해 보였을까.


누구든 타인이 처한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서 평가할 땐 냉정할 수 있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마치 축구 경기를 보며 선수를 욕하는 것과 같고, 영화 속 주인공의 형편 없는 판단력을 보고 답답해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이 위기의 순간, 결정적 선택을 앞에 두고는 고뇌하게 된다. 선택 후에 따라오는 모든 위험을 실제로 떠안아야 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니까.


내가 받게 될 비난, 책임, 혹은 생명의 위험.

그것들의 이름은 각기 모두 다르지만, 우리에게 주는 효과는 늘 같다.      


두려움.     


심장이 조여오는 긴장감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당장 어떤 결정이든 내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꼼짝할 수조차 없을 만큼 끔찍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실패하게 되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것이다.     

우리는 또 스스로 굳게 믿고 있다. 그 엄청난 두려움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고, 정당했다고.

우리가 겪었던 그 순간들이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웠는지 잘 알고 있고, 그 누가 와도 그 순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우리가 내린 부끄러운 선택을 포장하기 위해 그 순간 느꼈던 공포를 더욱 무시무시하게 포장한다. 힘을 주며 말한다.

그렇게 비밀스러운, 또 치욕스러운 과거를 ‘그럴 수밖에 없었던’것으로,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반응이었다고 꾸며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스스로 그것을 믿게 된다.

그나마도 양심이라는 것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입을 닫고 모든 것을 잊으려 한다. 두려웠던 순간과 그 앞에서 보였던 자신의 굴욕스러운 모습을 통째로 잊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다.     


그랬던 우리가, 타인의 두려움과 그들의 실수 앞에서는 고개를 들고, 어깨를 펴고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치 빛을 피해 구석으로 숨었던 바퀴벌레가 어둠이 오자 스멀스멀 기어 나오듯, 이미 구린내가 진동하고 있는 자아를 뻔뻔하게 등 뒤로 감춘 채 상대방의 연약한 상처를 후벼파기 위해 개처럼 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한다.

두려움에 짓눌려 자랑스럽지 못한 선택을 내린 타인의 연약한 자아가 만천하에 까발려질 때까지 잔인하게 짓이기고, 집요하게 파고든다.

마치 그렇게 하면 우리의 벌거벗은 자아가 덜 부끄럽기라도 한 듯이.     



     

바닥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여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여자의 딸, 커다란 부엌칼을 든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윗집 남자.     

'뭐라도 해야 한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가스 분사기를 뿌린다면 잠깐이라도 저 싸이코 살인마의 시야를 방해해서 시간을 벌 수 있을까? 그동안 신고자의 딸을 일으켜 세워 함께 현장에서 도망갈 수 있을까?

아니다. 그러면 칼에 찔린 신고자의 아내는 어떻게 할 것인가. 딸만 데리고 나간다면 혼자 남겨진 신고자의 아내는 분명 2차 공격으로 살해당할 것이다.     


시야를 방해한 사이에 삼단봉으로 공격해서 제압할 수 있을까?

아니다. 삼단봉은 가격당하는 사람의 생명을 침해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일으키지 않게 알루미늄으로 제작되어서, 강하게 내리치면 힘없이 휘어지는 것을 경찰학교에서 분명히 보았다. 사실상 저 거대한 체구의 남자를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분명히 실패할 것이고 그가 들고 있는 30cm 칼날이 내 배를 뚫고 들어와 나를 찢어버릴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바깥에서는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박 경위와 신고자가 있다. 남자 두 명이 밖에 있다. 빨리 뛰어 내려가 이 사실을 알리면 저 살인마가 피해자들을 공격하기 전에 함께 올라와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게 낫겠다. 나 혼자 대항하려고 했다가 괜히 모두가 개죽음당할 수 있다. 실패하면 모두 죽는다.

나 혼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저놈은 너무 크고, 강하다. 무엇보다 칼을 들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나는 최악의 결정을 내렸다.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돌아서서 현관문을 향해 홀로 뛰쳐나갔다. 현관문을 나서자 내 뒤로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층계를 정신없이 뛰어 내려가며 나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빨리, 빨리, 빨리….”     


1층에 도착하여 공동현관의 자동문을 열고 나가자 박 경위와 함께 담배를 피우며 아직도 큰소리로 불평하고 있는 신고자가 보였다,     


“박 경위님! 박 경위님! 지금 위에 큰일 났습니다. 윗집 남자가 칼 들고 내려와서 신고자 아내를 찔렀어요. 빨리 올라가 봐야 합니다!”     

“뭐라고!?”     


박 경위는 내 말을 듣자마자 무전기를 잡고 지원 경력과 구조대 요청을 하려고 하였으나 10년도 넘은 무전기는 필로티 구조의 빌딩 1층에서 주파수를 잡지 못했다. 우리가 무전을 시도하는 사이에 신고자는 헐레벌떡 공동현관을 열어 먼저 현장으로 올라갔고, 겨우 무전으로 지원 경력과 구조대 공조 요청을 마친 박 경위와 나도 현장을 향해 뛰어 올라갔다.     


현장으로 뛰어 올라가는 내내 위에서 들리던 비명과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우리가 현관문 앞에 도착하자 멎었다.

숨 막히는 적막만이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활짝 열려있는 현관문 안쪽으로 널브러져 있는 신발들이 보였고 속을 뒤집어 놓는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현관문 밖에서는 신발장과 거울만 보일 뿐, 꺾어져 들어가는 거실 내부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신고자의 신음 소리가 끊어져 가는 것처럼 가늘게 들려왔다.      


박 경위는 근무 조끼에서 권총을 꺼내 들며 내게 속삭였다.

“소영아, 가스 분사기 꺼내고. 내가 쏘라고 하면 저 새끼 눈 겨냥해서 쏴. 알겠지? 지원 경력 오고 있다니까 금방 도착할 거야 너무 쫄지 마. 씨발”


말하는 박 경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현관을 통해 거실로 들어가자 피가 낭자한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텅 빈 눈동자로 천장을 보며 누워있는 두 여자 주변으로 피가 웅덩이처럼 고여있었고, 좀 전에 칼에 찔린 듯한 신고자는 바닥에 웅크린 채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씨발…. 뭐야 이게….”     

“박 경위님 저기!”     


그리고 거실 한가운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쓰고 손에 칼을 쥐고 있는 그 남자가 우릴 보고 서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칼 내려놓으세요! 칼 버리세요!”

박 경위가 소리쳤다.


“칼 버리지 않으시면 발포하겠습니다. 칼 버리세요!”     

남자는 말을 듣지 않는다. 같은 표정으로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와 우리 사이의 거리는 4미터도 채 안 되기 때문에 이미 충분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즉시 발포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험한 상황임에도 박준호 경위는 왜인지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탕!’

      

박 경위가 경고 사격으로 공포탄을 발사했다.      


“칼 버려! 마지막 경고입니다. 칼 안 버리면 발포….”     


‘탕!’

     

박 경위의 스미스웨슨 권총이 다시 한번 발사된다.     

나는 가스 분사기를 발사했다.

남자는 눈을 감싼 채로 뒷걸음치며 괴로워한다.     

어느새 도착한 지원 경찰관들 세 명이 나를 옆으로 밀치며 뛰어 들어와 거칠게 남자를 제압하고 수갑을 채운다. 이 모든 난리 법석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인다. 나는 여전히 가스 분사기를 양손으로 꽉 쥐고 있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부들부들 떨리고 있던 손이 기억난다.

어떤 직원이 내게 뭐라고 소리를 질러댔는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바닥에는 가슴 깊이 칼이 박힌 박준호 경위가 천장을 보고 누워있다.          



   

세 사람이 죽었다.

온 세상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경찰의 부실 대응이 층간소음을 살인사건으로 키우다’,

‘시민 버리고 도주한 경찰’,

‘여경 무용론 재점화’ 등 수십 개의 기사가 매일 같이 올라온다.
 

기사에는 수 천 개의 댓글이 달리고, 경찰 내부망에서도 나를 비난하는 동료들의 글이 쇄도했다.     


‘칼 무서우면 경찰 왜 됐어?’,

‘이래서 여경 뽑으면 안 된다는 거야. 또 남자 직원만 당했네’,

‘도망을 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그러라고 월급 받는 거 아니야?’,

‘같은 경찰로서 부끄럽다.’,

‘나 같으면 죽을 각오로 싸웠다.’     


신고자가 병원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한 기사도 화제가 됐다.     

‘처음 현장에 왔을 때부터 여경이 왔길래 불안했다. 시민을 범죄로부터 지키지도 못하는 경찰이 무슨 소용이 있나. 내 아내와 딸은 경찰이 죽인 거다. 범죄를 막지 못하고 무고한 우리 가족을 죽음으로 내몬 경찰관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     


며칠 뒤 우리 집으로 등기 우편이 배달되었다. 신고자가 나를 직무 유기로 고소했기에 형사사건으로 접수가 되었고, 손해배상을 위해 민사 재판을 청구했다는 것을 알리는 것들이었다.     

경찰청에서는 나와 박준호 경위의 대처가 미흡했다고 시인하며 경찰청장이 대국민 사과를 했고, 출동 경찰관들의 조치에 문제가 없었는지 감찰을 시행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즉시 대기발령을 받아 지구대 인력에서 배제되었고, 오늘 내 앞에서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감찰관 이창석 경위가 만드는 조서로부터 나에 대한 징계 절차가 진행될 것이다.  

   

“김소영 순경님이 진술하신 내용을 토대로 징계위원회에서 판단 후 징계 수위를 결정할 예정입니다. 제가 경찰 조직 들어온 직후로 15년 동안 감찰계에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사건은 처음입니다. 최소한 경찰관이 취해야 할 행동은 하셨어야죠. 현장에서 도주하지 말고 피해자들을 지키기 위해 할 일을 하셨어야죠.

김소영 순경님도 아시겠지만, 사안이 아주 중하기 때문에 중징계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파면이나 해임까지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이창석 경위가 나를 책망하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추가로 하고 싶은 말씀 있습니까?”

이미 서류를 정리하며 이창석 경위가 내게 물었다.     


“아닙니다.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꽉 막힌 목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대로 사무실을 나왔다.      



     

핸드폰을 보니 아빠의 메신저가 와있다.     


“기다리고 있으니까 경찰청 주차장으로 와”


경찰청 로비에서 아마도 직원들일, 동료들일 수많은 사람을 지나쳐 주차장으로 빠져나가니 아빠가 애써 밝게 웃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조수석 창밖으로 거리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집으로 향한다.


모든 사람이 내게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사실 나보다 그 싸이코 살인마에게 분노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언론과 국민은 실제로 피해자들을 살해한 사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지?

나도 내 조치가 적절하지 못했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피해자들을 살인범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한 무능한 경찰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너무 부끄럽고 죄스럽다.    

 

하지만 무서웠다. 나는 내가 최선을 다해 맞서 싸우더라도 그 남자를, 나보다 훨씬 더 크고 강하며 나라는 존재를 단번에 끝장낼 수 있는 흉기를 들고 있는 그 남자를 상대로 혼자 싸워서 이길 수 없다고 느꼈다.

틀림없이 나도 거기서 그 남자 손에 죽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할 수 있었을까?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이창석 경위였다면 달랐을까.

나를 비난하는 기자들, 동조 댓글을 쓰는 국민, 그리고 내 선배들.     


모르겠다.

나도 그랬지만, 그들도 자신을 죽이려 하는, 그리고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칼끝 앞에 맨몸으로 서본 경험은 없다. 장난감 같은 최루액과 삼단봉 하나 쥐여 주고는, 어떻게 내 배를 뚫고 들어와 장기들을 찢어놓을 흉기와 맞서 싸울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런 두려움에 한 번도 직면해본 경험이 없었다. 누구도 자기 목숨을 걸고 그런 도전을 당해 본 적은 없다.     


억울하다.

나는 아직 정식 임용도 받지 않고 현장 실습 중인 교육생 신분이지만, 사람들은 모두 나를 이미 칼끝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이기를 바란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물론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어서 선택한 일이지만, 죽는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선택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영웅으로 죽지 않은 것을 비난하고 있다. 이미 살인범과 그의 끔찍한 범죄는 안중에도 없다. 살인에는 분노조차 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내가 살아있는 것에 분노하고 있다.      

나는 아까 이창석 경위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다.     

너무 억울해서 죽어버리고 싶다. 죽어버리면 내 억울함이 세상에 전달될까. 모두가 내 죽음을 바라는 것 같다. 죽음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 같다.     


“소영아….”     

조용히, 아빠가 날 부른다. 운전할 때 늘 보는 익숙한 아빠의 옆모습.

따뜻한 손이 내 손 위에 포개진다.      


“아빠는 있잖아…. 네가 무사한 것 하나만으로도 괜찮아. 다른 건 다 괜찮아.”     

참았던 눈물이 흐른다.

나라는 존재가, 여기에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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