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도 있지.
나이가 들면 고집이 세진다고 한다.
"아유, 저 인간 고집이 장난이 아니야"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면서"
"원래 남의 말 안 듣잖아"
드라마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 속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들. 그래서 나이듦과 고집(또는 아집)은 당연히 같이 가는 건 줄 알았고 나도 예외일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안 되려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의 경우 오히려 고집이나 자기주장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 의도한 건 아닌데 그렇게 됐다. 아마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자신감이 사라져서일 것 같긴 하다.
자신감이 사라진다는 게 곧 자존감의 하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뭐랄까.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책을 읽고 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가진 지식과 지혜가 쌀포대 속 쌀알 하나 정도밖에 안 되는 걸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최근에 타 부서와 협업으로 진행하는 일이 있었는데, 우리 쪽 의견이 잘 반영이 안 되는 거다. 씩씩 거리면서 옆 자리 직원에게 말했다. "내가 가서 따지고 올게."
그랬더니 그 직원 왈 "설득당하고 오시면 안 돼요."
대부분의 주변사람들, 심지어 가끔은 나조차도 이를 '전투력이 약한' 성정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직장생활 초년생이던 시절에는 결코 저런 약한 모습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 납득되지 않으면 상사와도 과감하게 맞짱을 떴다. (죄송합니다. 그때 그 선배님)
허나 지금은 상대방의 주장을 듣다 보면 묘하게 설득된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게 되는 거다.
내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고집이 세지는 사람들, 달리 말해 자기주장이 강해지는 사람들이야 말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거 아닌가 싶다. 수많은 반대논리 사이에서 굳건히 자기주장을 펼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확신이 필요하고, 그 확신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 말이다.
순리에 맡기면, 몸에서 힘을 좀 빼면, 고집을 부리는 것보다 타인의 말을 듣는 게 더 수월하다.
내 주장을 관철시킨다고 딱히 좋을 것도 없지 않은가?
(사실 책임질 일, 리스크만 더 커질 뿐이다...)
나이가 들어서 좋은 것이 사실은 많지 않다.
체력이 떨어지고, 피부탄력도 떨어지고, 인생의 즐거움도 많이 사라진다.
대신 근거 없는 고집 대신 관용이 생겨나기도 하니 무언가를 잃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얻은 것을 세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