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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Apr 21. 2023

내 정체성은 복수(複數)입니다.

책은 거들뿐: 평범한 인생(카렐 차페크)

그러니까 우리에게 세 번째 인물이 있는 거군. 나의 내면 깊숙이에 있는 호전적인 목소리가 말한다.

세 번째 인물이라니?

흠, 첫 번째는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이고, 두 번째는 출세를 위해 몸부림치는 억척이이고, 이 우울증 환자가 세 번째 인물이지. 유감이지만 그것은 세 개의 삶이고, 서로 다른 존재들이야. 절대적으로, 극단적으로, 근본적으로 다른 삶이지.

그건 전체적으로 볼 때 한 개의 평범하고 단순한 삶이야.

난 모르겠어. 그 억척이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어. 이 우울증 환자는 끈질기게 출세를 추구할 수가 없었지. 행복한 인간이 우울증 환자가 될 수 없는 건 당연한 것이고. 말도 안 돼. 여기에 세 인물이 있는 거야.

그리고 인생은 하나 뿐이고.


카렐 차페크 장편소설 '평범한 인생' 中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바야흐로 대 MBTI 시대이다. 세 번 정도 테스트를 해봤는데 한 번은 INFP가, 나머지는 INFJ가 나왔다. INF까지는 변동이 없다.


I가 80% 이상인 확신의 내향형인간.

그런데 내향형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사회화 되어 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속병을 앓았을지언정 완벽한 조직인! 그래서 가끔은 스스로도 '내가 정말 내향형이 맞나' 싶은 순간들이 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에는 좀 특이한 아이였다. 중학교 동창이 나를 기억하면서 누군가에게 전했다는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아 걔? 걔 좀 유명했어. 수업시간에는 대체로 졸고 있는데 성적은 잘 나오고, 엄청 조용한데 축제 때 보면 춤을 또 기가 막히게 춰서 따르는 후배들도 꽤 됐거든.


성실한 직장인인 지금의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나태함과 관종력이 아닐 수 없다. 취업한 이래로 어딘가에서 춤을 추거나 한 적은 없지만 가끔은 내안에 관종끼가 스멀스멀 고개를 치켜들 때가 있다. 다시 춤을 춰볼까? 유튜브를 해볼까? (아직 관종력이 나태함을 이기지 못한 것 같긴 하지만)


여하간 이런 나를 I형인간으로 명확히 정의내릴 수 있을까?


한편 왔다갔다 하는 P와 J는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다.

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을 몹시도 좋아한다. 연말이면 다이어리를 사서 "XX년의 10가지 위시리스트" 따위를 기록해두곤 했다. 여행을 갈 때에도 그 나라에 대한 사전 정보를 수집해서 시간단위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은 계획일 뿐이다. 지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어떨 때는 10개의 신년소망 중 하나도 못 이룰 때도 있고, 여행은 첫날부터 계획과는 다르게 움직인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계획을 세우는 것에만 흥미가 있는, 비계획적 인간인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우리를 정의하려 한다. 그 편이 (예측가능성 측면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인간의 본성이 원래 '구분'짓는 것을 좋아해서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혈액형으로 구분하고, 직업으로 구분하고, 이제는 MBTI로도 구분한다.


사회화된 내향형 인간, 소심한 관종, 계획 세우는 데만 관심있는 비계획형 인간, 트리플 에이형, 에이형 같은 비형.


어쩌면 이런 역설적 표현은 특정 무리로 구분된 사람들이 그 속에서 위화감을 느끼며 외치는 소심한 반항의 말일지도 모르겠다.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서,

카렐 차페크의 소설 '평범한 인생'에 나오는 인물은 일평생 철도공무원으로 살아온 노인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지극히 평범한 삶으로 회고하는데, 그 가운데서 세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셋은 곧 자기 자신이며, 공존할 수 없는 세 인격으로 인해 그의 삶은 특별한 평범성을 갖게 된다.


그를 통해 평범한 우리네 인생을 반추해본다. 평범하다는 말이 곧 전형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내면의 개성적인 복수의 자아가 (미처 날 뛰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공존할 때 삶은 마침내 평범해진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후술했다.


맙소사, 그런 집합은 실로 한 편의 드라마이다! 모든 시간에 걸쳐 그 집합은 우리의 내면에서 서로 싸우며 영원한 투쟁을 벌인다. (중략) 그들은 누가 나여야 하는가를 쟁취하기 위해 조용한 가운데 격렬하게 투쟁을 벌인다. 서로 고함을 지르지 않고, 서로 칼을 들이대지 않는 기묘한 드라마였다.


나의 경우,

어느 때에는 외향적이고 관심받는 걸 좋아하는 자아가 내 몸의 주인이 되고, 또 어느 때에는 만사가 귀찮고 소심한 자아가 나를 지배한다. 이성적인 나는 노잼 소리를 듣고, 감성적인 나는 시를 쓴다. 때로는 주성치를, 때로는 장국영을 좋아한다.

그들은 모두 내 안에서 공존한다. 서로 튀어나올 시기를 엿보면서.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은' 것에 때문에, 전형적이지 않은 수많은 나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면, 내 안에 존재하는 여러 명의 나에게 귀를 기울여보는 것도 좋겠다.


더 많은 나를 눈치채고 인정할 때, 비로소 내 삶은 덜 괴롭고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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