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라 하면 어린이 만화에 나오는 그 곱슬곱슬한 흰머리에, 화학약품을 이리 섞고 저리 섞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무얼 연구하는지, 연구에 성공하면 뭐가 어떻게 되는지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간호사도 다를 바 없다. 하얀색 유니폼에 머리 위로도 하얀 모자 같은 것을 쓴 그 모습, 그리고 손에 주사기를 들고 있는 이미지가 전부였다. 그 직업의 숭고함이나 가치, 그리고 그와 맞바꾼 그들의 희생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알려진 직업군 자체가 많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미디어도 몇몇 엘리트 직군, 전형적 직업에만 포커스를 두었다.
만약 그때의 내가 이 책들을 봤더라면 어땠을까?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심채경박사의 '천문학자는 달을 보지 않는다'는 직업인으로서의 천문학자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알쓸신잡에서는 명왕성을 명왕성으로 부르지 못하는 게 그렇게 슬플 일이냐며, 전형적인 이과생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말과는 달리 그녀의 글은 꽤 다정하다. 만약 그녀의 책을 내 어린 시절에 볼 수 있었다면 어쩌면 천문학자라는 꿈이 생기부에 한 번쯤은 기록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아쉽게도 그녀는 나보다 어린것 같아서 내가 그녀의 책을 보고 직업을 선택하는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겠지만)
황민구박사의 '천 개의 목격자'는 직업에 대한 내 인식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CCTV 영상을 분석하는 직업이 따로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해봤는데 영상의 화질을 개선하고 영상 내에서 범죄를 비롯한 다양한 것들의 흔적을 찾는 것은 이미 하나의 영역이 되어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것들을 직업으로 삼을 생각을 했을까? 건축이라는 매우 메이저한 실용학문을 전공하고, 사진이라는 전혀 다른 예술의 영역으로 시선을 돌린 후, 그 안에서 다시 직업을 찾아낸 저자의 인생항로가 놀라웠고 세상엔 역시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에 부끄러워졌다. 내가 모르는 것도 모르는 건데, 심지어 그게 직업이라니.
유성오교수의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는 책은 직업인의 소명에 대해 좀 더 묵직하게 이야기를 걸어왔다.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아무도 박수쳐주지 않는 길로 들어선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그럼에도 나는 단 한 번도 진로에 대해 후회한 적이 없고 지금도 여전히 평생의 업이라고 생각하며 일한다. 아마도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스타보다는 소박하지만 은은히 빛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소망이 내 안에 간절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직업과 그 직업에 종사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책을 통해 내가 갖지 못한 직업을 간접 경험해 보는 재미에 푹 빠지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직업은? 나의 직업도 누군가에겐 궁금한 영역일까? 내 이야기는 나눌만한 가치가 있을까?
내 직업은 온갖 소설 속에서 '지루한 일상'을 상징하는 메타포와 같은 직업이다.
그렇기에 예전에는 이 화두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이었는데 요즘엔 생각이 좀 달라졌다.
한 직장에 20년 혹은 그 이상 근무한 것만으로도 이미 이야깃거리는 충분한 거 아닐까. 게다가 내가 일하고 있는 필드 자체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니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흥미를 끌 수 있겠다 싶다.
갑자기 머릿속에 갖가지 에피소드들이 떠오른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아찔한 기억부터, 가슴 아픈 기억, 쾌감을 불러일으킨 사건..
언젠가 퇴직을 한다면 그런 이야기들을 묶어봐도 좋겠다 싶다. 글솜씨만 좀 더 받쳐준다면 꽤 흥미로운 글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