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무엇인가를 하지만 내일이면 벌써 내가 왜 그 일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돼요.
체호프의 단편선을 읽다가 이 문장 앞에서 한없이 머뭇거렸다. 이것은 어쩌면 일(직업)의 본질 아닐까?
일을 시작할 때의 마음을 기억해보자. 분명 돈벌이었다. 물론 보람, 긍지 뭐 그런 어떤 무형적인 소득도 기대했겠지만 일단은 돈벌이었다. 살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했고, 그래서 직업을 구했다.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은 어떤가? 당신은 여전히 살기 위해 돈을 버는가?
가끔은 일하기위해서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일을 하고 있다. 어떨 때는 잠자는 시간을 쪼개가며 일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살기 위해 일을 한다는 표현은 맞는 것인가? 일하기 위해 산다는 게 더 적확한 표현 아닌가? 아니 삶이 곧 일인가? 일이 곧 삶인가?
거대한 톱니바퀴에 말려들어 뱅글뱅글 돌고 있다. '일'은 목적지에 가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길'일 뿐이었는데, 그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체호프의 문장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일에 대한 목적성을 잃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일의 속성이고, 우리는 일의 속성대로 살고 있는 셈이다.
살면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주제 앞에서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메멘토처럼 매일매일 일을 하는 이유를 피부에 새기는 사람과 그저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 전자의 사람들은 대부분 회사 밖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회사에서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통을 느낀다. 후자의 사람들은 회사 안의 사람들과 근무시간 외에도 어울리며 일과 사생활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나는 당연히 전자의 사람으로 살아왔다. 스스로를 자발적 아웃사이더로 칭하며, 회사 내에서는 모든 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사실 내 기준에 적당한 거고, 다른 사람들 기준으론 한없이 회사에서 멀어보였을 수도 있다)
회사 사람들과 같이 여행을 다니고, 운동을 같이 하고, 주말에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는 사람들을 보며 저들은 회사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 아니냐며 비웃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도 들었다. 사실 후자의 사람들이 더 현명했던 것 아닐까 하는.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기를 쓰는 사람은, 다시 말해 일에 의미부여를 하고 회사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반면 후자의 사람들은 목적을 잃어버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삶에 충실했던 거니까 심신의 부대낌이 상대적으로 덜한 것 같았다.
일할 날이 일한 날보다 적게 남은 지금은 더 그런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고 노동자로서의 효용이 점점 떨어지면서 그 거대한 톱니바퀴의 사이가 헐거워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빠져나가려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이 여유로움 속에서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있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