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연비를 높이는 기술 #9 "돈을 나눠서 내지 마라"
안녕하세요. 브랜드와 소비자에 대해 연구하는 연세대 김병규입니다. 저는 브런치와 같은 [긴 글 공간]이 가진 가치와 힘을 믿습니다. 이곳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서 - #호모 아딕투스 #노 브랜드 시대의 브랜드 전략 #플랫폼 제국의 탄생과 브랜드의 미래 #플라스틱은 어떻게 브랜드의 무기가 되는가 #감각을 디자인하라)
#할부가 흔해지다
많은 사람들이 할부로 제품을 구매합니다. 할부란 제품의 가격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서 나눠내는 것을 말합니다. 할부 판매는 사실 소비재 시장의 역사만큼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1800년대 초부터 가구 판매자와 재봉틀 판매자들이 할부로 제품을 판매했고, 1900년대 초에는 자동차 제조사들이 할부로 차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신용카드 할부는 1950년에 처음 나타났습니다. 한국에서는 1968년이 할부 판매의 원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갓 설립된 현대자동차가 코티나라는 자동차를 판매하면서 장기 할부 판매를 시작했죠.
제품 제조사와 판매자들이 할부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이유는 한 번에 금액 전체를 지불하기 부담스러운 비싼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서입니다. 19세기에 가구와 재봉틀은 중산층 소비자들이 몇 달 치의 월급을 모아서 사야 하는 고가품이었습니다. 값비싼 제품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할부 판매가 등장하게 된 것이죠.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1900년대 초 미국이나 1970년대 한국에서 자동차는 극소수의 상류층만 구입할 수 있는 고가 제품이었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동차를 팔기 위해서는 구매자들이 돈을 나눠서 지불할 수 있게 해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할부 판매 제도는 사람들이 구입하기 어려운 고가품을 판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신용카드가 등장하고 금융회사들 사이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고가 제품뿐만 아니라 몇만 원짜리 제품을 구매할 때에도 무이자 할부 구매가 제공되기 시작했습니다. 자동차나 가구 같은 제품뿐만 아니라 옷이나 식료품을 구입할 때에도 몇 개월씩 돈을 나눠서 내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죠. 일반적으로 신용카드 거래는 5만 원이 넘으면 할부 거래가 가능하다 보니 요즘은 식사 비용을 할부로 내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할부가 특별한 구입 방식이 아닌 일상적인 결제 방식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할부가 일상화된 것이 소비자에게 좋은 일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할부 거래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혜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차피 내야 하는 돈을 나눠서 낼 수 있기 때문이죠. 신용카드 회사들도 무이자 할부 거래를 고객에게 제공하는 혜택이라고 말합니다. 이자를 받지 않고 할부로 구매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마치 고객에게 큰 선심을 베푸는 것처럼 포장을 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할부 제도 안에는 숨겨진 함정이 있습니다. 소비자들로 하여금 단순히 돈을 나눠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내야 하는 돈의 총량이 실제보다 훨씬 작다는 착각을 불러오게 됩니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쓰게 되고, 더 자주 소비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할부는 착각을 불러온다
할부제도는 구매라는 행동과 지출이라는 행동을 분리시킵니다. 앞서 '지출의 고통'에 대해 설명할 때 이야기한 것처럼 구매와 지출이 분리되면 사람들은 지출의 고통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할부제도 안에는 사람들의 소비를 촉진시키는 중요한 장치가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미래 비용에 대한 할인'이라는 현상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하나를 상상해 보길 바랍니다. 저는 햄버거를 좋아합니다. 지금 제 앞에 햄버거가 놓여있고, 이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면 저는 무척 행복하게 느낄 것입니다. 이때 느끼는 행복감을 숫자로 나타내면 100이라고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이 아니라 한 달을 기다려야만 이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면 제 기쁨은 크게 줄어들겠죠. 숫자로 나타내면 50 정도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지금 당장 얻을 수 있는 것과 비교하여 미래에 얻을 수 있는 것에서 훨씬 작은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이를 행동경제학에서는 지연할인 delay discounting이라고 부릅니다. 지연된 소비나 재화의 가치를 심리적으로 할인한다는 뜻입니다.
지연할인은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잃는 것에도 적용됩니다. 교통 범칙금을 내는 상황을 상상해 보겠습니다. 지금 당장 10만 원을 내야 하면 큰 고통이 느껴지겠지만, 이 10만 원을 한 달 뒤에 낸다고 하면 심적 고통이 줄어들게 됩니다. 마음이 느끼는 고통은 10만 원이 아니라 7, 8만 원을 내는 것과 비슷해집니다. 이제 이런 현상을 할부제도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100만 원짜리 제품을 구매할 때, 10개월 무이자 할부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해보죠. 그러면 아래와 같이 지금부터 10개월간 10번을 내야 합니다.
[10만 원 + 10만 원 + 10만 원 + 10만 원 + 10만 원 + 10만 원 + 10만 원 + 10만 원 + 10만 원 + 10만 원]
이들의 총합은 당연히 100만 원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지연할인이라는 현상 때문에 사람의 마음은 아래와 같이 느끼게 됩니다(각주 참고).
[10만 원 + 7만 원 + 6.3만 원 + 5.7만 원 + 5.1만 원 + 4.6만 원 + 4.1만 원 + 3.7만 원 + 3.3만 원 + 3만 원]
이들의 합은 100만 원이 아니라 52.8만 원입니다. 사람이 미래의 지출을 실제보다 작게 느끼는 현상 때문에 지출의 총합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죠. 물론 사람들이 실제로 지출하는 금액은 100만 원으로 동일합니다. 하지만 구매를 결정하는 순간에 사람의 마음이 느끼는 지출액, 즉 심리적 지출 금액은 그 절반 밖에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할부로 물건을 구매할 때 자신의 지출 총량을 실제보다 작게 인식하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지연할인 현상은 할부 기간이 늘어날수록 더 강해집니다. 장기 렌탈 프로그램이 인기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용카드의 할부 기간은 길어야 12개월입니다. 하지만 정수기나 안마의자와 같은 제품들은 60개월에서 72개월에 이르는 장기 렌탈 프로그램을 제공합니다. 요즘은 세탁기, 건조기, TV, 공기청정기와 같은 일반 가전제품들의 판매에도 장기렌탈 프로그램이 많이 도입되고 있습니다. 렌탈 기간 동안 소비자들이 매달 일정 금액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지연할인이라는 현상 때문에 몇 년 후에 내야 하는 돈은 사실 돈처럼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장기렌탈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헐값에 제품을 이용한다는 착각을 하기 쉽습니다.
#미래에는 지금보다 돈에 여유가 생길까?
할부제도가 소비를 촉진시키는 또 하나의 장치가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가진 환상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보다 미래에 돈의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낙관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나 세상이 미래에 더 낫지는 않을지라도 자신에게는 지금 보더 더 많은 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한 심리학 연구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지금 시간적 여유와 금전적 여유가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한 달 후에는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얼마나 있을지에 대해서 질문하였습니다. 지금과 한 달 후의 응답을 비교해 보니, 지금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미래에도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답을 하였습니다. 반면 금전적 여유에 대해서는 이와는 상이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지금 당장은 금전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한 달 후에는 지금보다는 금전적 여유가 더 있을 것이라고 답을 한 것입니다.
이런 결과에 수긍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저도 그러니까요. 지금은 이번 달 신용카드 결제일에 충분한 돈이 있을지를 걱정하고 있지만, 다음 달에는 그렇지 않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막상 다음 달이 되면 똑같이 돈의 여유가 없습니다. 사회와 경제에 대해서는 전혀 낙관적인 전망을 하지 않으면서도 돈에 대해서 만큼은 미래에 더 여유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게 됩니다. 반면 시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 달에도 시간적 여유가 없고 다음 달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미래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내달은 이번달보다 여유가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죠. 할부제도는 사람들의 이런 마음을 파고듭니다. ‘지금은 돈이 없어도 괜찮아. 나중에 돈이 있을 때 주면 돼.’라는 말은 단지 달콤하게 들리는 것뿐만 아니라 실현 가능한 일처럼 들립니다. 지금은 돈이 없어도 나중에는 돈에 여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돈에 여유가 없는데 미래에는 갑자기 돈에 여유가 있을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소비를 제어하고 싶다면 할부에서 벗어나라
할부제도는 지금 결제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모든 신용카드가 무이자 할부 혜택을 제공하고 있고, 제조사나 판매자가 직접 제공하는 할부 금융 상품들도 많습니다. 거기에 더해 초장기 할부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렌탈 요금제도 점차 다양한 제품군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들 할부제도가 지향하는 것은 모두 동일합니다. 소비자로 하여금 더 많이 구입하고, 더 비싼 것을 사게 만드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은 할부제도를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할부제도가 자신에게 주어진 혜택이라고 생각하고, 할부 구매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해도 그저 자신을 탓하게 됩니다. 자신의 소비가 누군가에 의해서 기획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무절제함만 탓하게 되는 것이죠.
소비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할부제도의 작동 원리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 합니다.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소비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 할부제도를 만들고 운영할 리는 없겠죠.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이런 제도가 만들어지고, 또 이처럼 오랜 기간(미국에서 처음 할부 판매가 시작된 1807년을 기준으로는 200년 이상의 기간)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공짜로 주어지는 혜택은 없습니다. 자신에게 혜택이 주어지는 이유는 자신이 이에 상응하는 무엇인가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제어되지 않는 소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부제도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가장 좋은 것은 할부제도를 이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용카드를 사용할 때 무이자 할부를 선택하지 않고 꼭 일시불로 대금을 결제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현재 자신의 예산을 벗어나는 것들을 구매하지 않게 됩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할부제도를 이용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업무나 생활상 반드시 구입해야 하는 제품을 구입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할부제도 때문에 실제로 필요한 것보다 더 좋은 제품을 구매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매달 내는 돈이 얼마인지가 아니라 돈의 총합이 얼마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초장기 할부 서비스인 렌탈 서비스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가령, 매달 2만 원씩 60개월을 내야 하는 정수기라면, 자신이 지금 120만 원짜리 정수리를 구입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제품을 구입할 때 할부를 이용하지 않거나 할부금의 총액을 매번 계산하는 것은 번거롭고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 없이 소비를 제어하겠다는 생각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마케팅과 결제 방식은 사람들이 가진 마음의 법칙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파고듭니다. 소비를 제어하는 일은 마음의 법칙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는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각주 - 행동경제학에는 지연할인을 수학적으로 나타내는 다양한 모델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Quasi-hyperbolic 모델을 적용하여 두 번째 달에는 30%를 할인하고, 두 번째 달부터는 복리 방식으로 10% 할인을 적용하였습니다.)
(*이 글을 브런치에 올리기 시작한 2022년 12월 기준으로 "소비 연비", "돈의 연비"라는 단어는 구글, 네이버, 다음 등에서 전혀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이 글이 "소비 연비", "돈의 연비"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곳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