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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Jan 25. 2023

민족주의? 실증주의? 역사학에 대해서

무엇이 정답인가?

-실증주의역사학에 대해서-

 근대 역사학은 크게 실증주의 역사학과 민족주의 역사학으로 나눠집니다. 먼저 실증주의 역사학이란 오귀스트 콩트가 주장한 실증주의에 기반을 두어서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입니다.  실증주의란 오귀스크 콩트에 의해 집대성된 철학 사조로서, 사회 및 인간 본성을 관찰과 실험 그리고 비교와 같은 과학적 인식을 통해 연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근대 이전엔 신학적인 방식을 통해 사회와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시도가 이뤄졌다면, 근대 이후엔 인간의 이성과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사회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시도가 이뤄지게 됩니다. 실증주의를 영어로 표현하면, Positivism이 되는데 Positive는 ‘가능하다’, ‘긍정적이다’와 같은 의미를 내포하는 영어 단어입니다. 실증주의에서 Positive는 ‘인간이 신의 도움 없이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이성과 실증적인 연구에 대한 신뢰를 담은 뜻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실증주의 연구자들에 따르면 인류의 지식은 ‘신학적->형이 사학적->실증적’ 과 같은 세 단계를 거쳐 발전해왔고, 지식의 최고 형태는 실증과학이 됩니다. 실증주의 역사학을 시작한 사람은 레오폴드 폰 랑케입니다. 그는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실증주의 역사학은 사료를 통해 객관적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것을 목표로 두는 역사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고 해석합니다. 역사가 나아가야할 방향은 없으며, 오직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자료만이 있을 뿐입니다.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역사학자들에게, 일제 감정기의 역사는 대한민국 사회에게 있어 후퇴이고, 8.15해방은 대한민국 사회에게 있어 진보이지만,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에게 있어, 일제 감정기와 8.15 해방은 그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했고, 조선이 미국에 의해 해방되었다는 단순한 사실에 불과합니다. 실증주의는 사료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데 특화된 전문영역을 창출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실증주의 역사학자는 사료전문가이며, 사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주로 사료를 조사해 전체 사료를 다 읽고 원하는 것을 뽑아내 연구하는 ‘archive research(사료조사)’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실증주의 역사학에도 한계점이 명확히 존재합니다. 첫 번째는 사료중심주의가 낳은 한계입니다. 실증주의 역사학에선 공신력이 있는 사료를 연구하는 것을 지향하지만, 공신력 있는 사료는 그 당시 역사에 존재한 사회 지도층에 의해 생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로인해 사회지배층이 아닌, 하층민, 피지배층의 역사는 실증주의 역사학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둘째로 서구 중심주의의 영향으로 실증주의의 이상을 스스로 부정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실증주의는 서구 유럽의 계몽중의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서구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비서구인들이 서구인들을 따라 잡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이 사상에 영향을 받은 실증주의 역사학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서구 중심주의적 경향에 의해 실증주의 역사학은 과거를 있는 그대로 구현한다는 이상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실증주의역사학은 한국의 역사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초기 역사학은 중국에서 비롯된 유교적 역사기술의 양대 원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유교적 역사기술의 양대 원칙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실증주의 역사학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술이 부작 방식의 기술방식이 있고, 두 번째는 유교 도덕주의적 역사기술방식이 있습니다. 이 중 술이 부작, ‘옛 이야기를 기록하지만 창작하지 않는다.’ 과 같은 역사 기술 방식은 실증주의와 매우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초기 한국의 역사서에는 이 두 가지 역사기술 방식이 혼재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김부식의 삼국사기입니다. 삼국사기 초반에 위치한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에선 사적인 판단 없이 과거에 기록된 신화와 전설들을 객관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술이 부작의 원칙을 따랐음을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그러나  후반에 나오는 열전(김유신)에선 김유신이라는 충신을 강조하고 있으며, 저자의 의도가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후 조선 후기에 와서 다시 실증주의적 역사기술이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건국 이후 성리학적 유교주의가 사회전반을 장악해 유교적 도덕주의가 사료중심주의를 압도한 조선초기와는 달리, 조선 후기엔 성리학을 비판하는 실학이 나타나게 되고, 조선의 자존을 강조하는 사상이 대두됨에 따라 고조선, 고구려, 발해와 같이 중국과 대립 했던, 국가들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시작되게 됩니다. 유득공의 발해고 는 실증적 서술에 기반을 두어 발해의 역사를 기술한 역사서로 이 예시라 볼 수 있습니다. 근대 이후 한국의 실증주의 역사학은 아쉽게도 타국에 의해 시작되게 됩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설립된 조선편수 회의에 의해 조선사가 간행됩니다. 이는 엄격한 검토를 통해 만들어진 사료 집으로서, 학문적인 가치가 높았고 한국사의 여러 분야를 개척했다는 것에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 1990년 대전 까진 조선 왕조 실록 대신에 이 사료 집이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책은 당시 조선에 확산되고 있었던 민족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간행된 것으로, 객관적인 사료들을 통해 민족주의적 역사학의 감정주의를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실증주의를 기반을 두어 쓰인 최초의 역사서가 타국의 학자들에 의해 쓰인 것은 다소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당시 조선이 민족주의에 빠져 역사 서술에 있어 많은 것을 놓치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국의 객관적인 역사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조선의 과거 옛 수도가 평양이었는지, 요동이었는지에 관한 논쟁에서도 이덕일을 포함한 많은 역사학자들은 요동 설을 주장하며, 민족주의를 강조시키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조선사 와 같이 타국에 의해서 실증주의적 연구가 진행되는 부끄러운 일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선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주의역사학에 대해서-

 민족주의는 18-19세기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유럽의 주변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의 주변부에 위치한 국가들이 유럽 중심부 국가들에게 갖는 열등감과 대결의식이 주된 동기로 활용됩니다. 민족주의 역사학은 과학적 근거가 없으며, 주로 잘사는 부유한 국가에선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 적대 국가보다 자신의 국가가 위대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활용되곤 합니다. 이에 따라 그 민족에 반대되는 적대자 혹은 경쟁자가 등장합니다. 한/일, 남/북, 한/중 관계와 같이 이런 대립 관계 속에서 각 나라의 민족주의는 다르게 성장합니다. 또 유럽인 출신으로 아프리카, 아시아 등에 대를 이어 정착한 크리올(criole) 집단 사이에서 민족주의 정서가 강하게 드러나곤 합니다. 또 이러한 민족주의는 식민 지배를 당했던 국가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민족주의역사학이란 이런 민족주의 정서에 기반을 두어 역사를 해석하고 서술하는 역사학을 의미합니다. 민족주의 역사학에선 민족이 역사 해석의 중심이 됩니다. 다만 이러한 민족주의를 학문으로 볼 수 있을 지는 아직 까지도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민족주의는 대중적 요구를 받고 있으며, 대중성을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실증주의 역사학과는 달리, 민족주의 역사학 안에서는 민족이라는 명확한 주체가 있으며, 이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뚜렷하게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한국에서 민족주의는 큰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역사학자들이 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민족주의 역사학은 조선 후기 명청 교체와 구한말 국망 이라는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나타났습니다. 조선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국권 수호와 회복을 위해 한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설정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고대사의 제국적인 성격을 부각시켜 한민족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신채호 선생의 역사학과 조선의 유학적 전통을 개혁하자는 박은식 선생의 역사학으로 크게 나눠집니다. 일제강점기라는 현실 속에서 민족적인 정서를 통해 역사학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학문적인 완성도는 부족하고 오히려 정치에 가깝다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또 민족주의 역사학은 학문으로서는 계승은 실패하게 되고, 환단고기와 같은 유사 역사서에 의해 소비되거나, 유신 독재 정권의 민족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용되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에게서 있어 민족주의란 여전히 중요한 화두라 생각합니다. 불과 3년 전에도 일본의 무역규제로 인해 반일 불매 운동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민족주의 정서를 고취시키는 역사적 콘텐츠들이 드라마나 영화로 방영되게 됩니다. 국가 내에서 민족주의 정서가 강하게 나타는 것에 대해선 저는 크게 반대하거나 이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어쩌면 한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가질만한 사상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주의가 역사를 바라보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과거 한국에 존재했던 가야와 신라 백제 국가들이 야마토정권의 식민지였다는 주장을 통해, 조선 침략의 동기를 내세웠고, 또 여러 국가의 식민지로 만든 과거의 업적을 내세워 자신의 민족의 우수성을 드러내었습니다. 이는 과도한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민족주의가 다른 나라에 의한 열등감에서 시작하지만, 이것이 결국 타국을 침략하는 사상의 기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음 그림은 이제석 디자이너에 의해 만들어진 광고입니다. 일본의 왜곡된 민족주의에 의해 쓰여진 역사책이 누군가를 위협하는 권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과도한 민족주의역사학이 낳을 폭력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의 역사 콘텐츠, 역사연구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고조선이 과거 중국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했기에, 과거의 고조선이 대제국이었다는 주장은 일본이 제국주의를 통해 여러 국가를 식민지화시켰기 때문에 대 제국이라는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의 역사학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선 민족주의 역사학이 낳을 폭력성에 대해 더욱 조심하고 신중한 역사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한국의 역사학뿐만 아닌, 역사를 다루는 문화 콘텐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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