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처음 마셨던 고가의 커피는 5년 전 9천원짜리 Tim Wendelboe의 커피였다. 아마도 플랫화이트. 이후 한 잔에 지불하는 금액이 점점 늘어나면서 14,000원, 25,000원을 지불했을 때의 감정이 생생하다. 내 여행기를 읽어본 분들은 짐작하셨겠지만, 나는 돈이 들어가는 일을 할 때 효율과 가심비를 동시에 챙기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지금처럼 커피를 많이 경험해보지 않았던 나는 이 금액이 내가 지금 마시는 컵의 가치를 대변하고 있는지 판단할 길이 없었다. 그저 내가 가장 애정하고 있는 취미이기에 여러 가지 합리화를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비싼 커피보다도 더 가격이 나가는 커피들은 보통 판매하지 않아서 접근하기 힘들었는데, 소비자에게 적절한 가격으로 소개하기도 힘들뿐더러 맛이 좋은 커피는 보통 대회장으로 향했기 때문이고, 가끔 전시용으로 관람객들에게 제공되는 소량의 커피만을 맛보는 것에 그쳤었다.
그러나 올해는 그런 고가의 커피들을 접하기 정말 쉬운 해가 아니었나 싶다. 2019년 전주연 바리스타가 월드 챔피언에 오른 이후로 급격히 성장하던 한국의 스페셜티 시장은 2024년 5월 아시아에서 열린 적 없던 WOC를 개최하기 이른다. 이 시점을 기점으로 국내에 꽤나 좋은 커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대형 로스터리부터 동네 스몰 로스터리까지 -5년 전이었으면 아찔했을- 초고가의 커피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커피 시장이 발전하는 동안 나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명하다고 하는 스페셜티 카페들을 찾아갔고,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카페들부터 동네에 숨어있는 맛집까지 전부 가보았다. 기본적으로 하루에 3곳의 카페를 들렀고, 10개가 넘는카페에 방문한 적도 있다. 카페를 가기 위해 해당 지역을 여행했으며, 커피를 마시기 위해 밥을 먹고,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를 구입하였다.
그중 블랙로드 커피는 누군가에게 대구 카페를 추천받은 이후로 최근 3년의 카페쇼 내내 한번 맛보기 위해서 들렀던 곳이다. 그런데 항상 엄청난 웨이팅이 있었고, 그 이유는 일평균 2만 명 이상 방문하는 박람회에서 부스에 방문하는 모든 관람객에게 커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방문하기 힘든 지역의 카페 부스에서 커피만 맛보고 얼른얼른 지나가고 싶은 내게는 참 아쉬운 광경이었다. 그런 블랙로드가 서울에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보고는, 들뜬 마음으로 정보를 찾아보는데 웬걸 예약을 하란다. 커피 전시라고. 소문으로만 들었던 카페의 비싼 전시를 덜컥 예약하는 것이 그다지 당기지 않았고, 6월부터 9월까지를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러다 10월 전시를 예약했다.
초신성의 등장, 천혜의 자연이라는 Totumas 농장의 커피 맛이 드디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아마존의 눈물』같은 다큐멘터리에서나 등장할 자연 속에서 커피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커피를 가공하는 과정도 투명하고 군더더기 없었다. 분명히 맛있었고 4만 8천원의 값어치를 톡톡히 하는 커피씬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다만,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충격을 받지는 못했다는 점과 완전히 개인적인 아쉬움으로 물 맛이 커피를 받쳐주지 못했다는 점이 남아버렸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맛있는 커피를 알게 됐으면 하는 내 바람에 이 시도는 너무나도 적절했고, 이렇게 섬세하게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면 다시 예약하고만 싶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2024 Panama Lamastus private auction(파나마 라마스투스 가문의 제한입찰)에서 블랙로드 이치훈 대표는 커피 역사상 역대 최고가를 경신(총 낙찰가는 US$ 40,554.00/3kg, 9월 18일 경매일 기준 한화 약 5,350만원)한다. 직전 최고가는 같은 옥션에서 2022년 대만, 호주, 아랍에미리트가 낙찰받은 12,068달러/1kg.
*5시간 넘게 진행된 대만과의 눈치 싸움에서 포기하려다가 마지막으로 14,000달러 자동입찰을 걸어둔 것이 성공
1kg에 13,518달러(약 1,783만원), 대략적으로 손실을 15% 잡고 계산해도 원두 1kg에 2,097만원 이고, 한잔을 내리는 15g에 31.5만원*이다. 마진을 생각하면 잔당 최소 60만원에서 100만원 이상하는 커피를 48만원에 선보이는 구토지설의 전시가 11월에 열렸다.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산출한 가격은 37~8만원/15g
2024 Lamastus private auction 1위
2022 Lamastus private auction 1위
내려진 커피만 기준으로 따져도 병 당 200~300만원 정도의 와인을 먹는 셈. 세계의 많은 업계 종사자들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으며, 워낙 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커피 추출에서 환상적인 맛을 기대하는 것은 사치였고, 나는 한 잔에 그 정도의 돈을 쓸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가 이 커피를 먹어보려는 이유는 분명했다.
나는 세계에서 제일 비싼 커피가 무슨 맛일지 궁금한 것도 아니었고, 인생커피를 찾으러 예약한 것도 아니었다. 이 커피에 내려진 수많은 의견들과 제시된 방향성들이 어떤 이유에서 발생했는지가 궁금했다. 커피에 진심인 팀이 산지에 직접 방문하고 바이어들과 입찰 경쟁 후, 이 커피만을 위한 공간과 장비를 세팅하여, 한 타임에 최대 2명씩, 2시간 동안 진행되는 열정적인 전시에 달린 말들의 의도가 궁금했다. 이 예약이 고민되는 점은 오직 절대적인 가격뿐.
스타우스씨의 인터뷰
→ 요약 : 아시아권에 "내가 이렇게 비싼 커피를 먹었다"라고 말하고 다니기 위해 비싼 커피를 구매하는 돈 많은 소비자들이 많기 때문에 항상 최고가 커피(아구아카티요)들은 이 지역에서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오늘은 비가 꽤나 많이 온다. 전날부터 강풍이 불어 일반적으로는 바깥을 돌아다니기 적절하지 않은 날씨다. 하지만 나는 비가 내리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오늘은 신나는 날이 되었다.
이 커피를 먹기 위해 나는 3일 전부터 철저하게 커피를 먹지 않았다. 선반 한편에서 익고 있는 많은 원두들을 바라보며 '더 맛있어지겠지..'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당일에 미각 린싱(호들갑)을 위해 집에서 Panama Esmeralda의 게이샤를 우물우물하였다. -하루의 첫 와인은 항상 3번 정도 입에서 우물우물 ... 워낙 시고 떫게 느껴지기 때문에(와인킹) ...-
우산을 챙겼지만 쓰지 않은 채 블랙로드 성수점에 도착했다. 나는 반가운 사람들에게 내가 좋았던 경험을 주는 것을 좋아하는데, 오늘은 좋은 한 잔이 되길 기원하는 선물을 전하며 전시를 맞이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심각하게 만족스러웠다.
블랙로드 전시는 커피를 마시기 전 사전 설명을 듣는 시간이 있다. 접한 적 없는 커피였기에 재밌는 정보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고, 가장 재밌었던 점은 지니님이 고심하여 개발한 물 따르는 방법.
이후, 이어지는 방에서의 영상 시청은 경매에 관해 궁금했던 모든 사항을 시원하게 보여주었다. 해당 영상은 전시가 끝난 후 공개할 예정이라고.
그래서,
첫 번째 잔은,
Panama Black Moon Chiroso anaerobic natural
[RECIPE]
OREA with fast flat bottom
15g 사용, 삼다수 94℃
50g, 50g, 30g, 30g + 60g(가수)
파나마 스페셜티 커피 협회장이 운영하는 신생 농장 Black Moon의 Chiroso. OREA 드리퍼에 빠른 추출을 도와주는 툴을 장착하여 1:10~11 비율로 추출한 뒤, 가수했다. 내게는 두 번째 경험인데, 이전의 컵보다 더 뚜렷한 과일의 느낌이 상 당 히 만족스러웠다. 블랙문 치로소를 향한 긍정적인 평가들을 체감할 수 있었던 컵.
오늘의 메인,
Panama Lamastus Aguacatillo Geisha Honey auction lot
[RECIPE]
V60 KASUYA ver. with Sivarist filter paper & booster 45
문제의 커피. 레몬과 핵과류의 산미가 선명하게 느껴졌으며, 꽃 향기가 단단하게 들어왔고, 매우 뛰어난 클린컵과 복합성이 쉴 틈 없이 맛을 보게 했다. 개인적으로 산미가 훌륭하게 높은 커피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산미가 높으면서 클린컵과 단맛이 모두 좋은 커피와 추출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내 취향을 제대로 저격해서 빨리 마셔버리지 않도록 공을 들였다. 분홍빛의 로즈와 샤인 머스캣, 베르가못의 노트를 말씀해 주셨으나, 내가 더 집중하게 되는 것은 각 노트들의 선명함이었다.
내가 시중에서 경험한 고가에 판매되는 게이샤들은 1kg에 10만원에서 180만원 선이었는데, 개중에 훌륭한 맛을 보여줬던 원두들을 상세히 떠올리며 마셨다. 정말 미묘한 차이이나 Aguacatillo에서 더 높은 클린컵과 선명도가 분명했다. 내 경험상, 이러한 게이샤들을 15g 사용하여 추출했을 때 tea-like한 경우가 훨씬 많았는데, 이번 추출은 산미가 강조되고 노트들이 명확했으며 오히려 내가 이 커피에 상상하던 추출의 결과물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진현 바리스타님이 이 의견이 본인의 추출 의도와 일치한다고 하며 그 이유를 덧붙여주셨는데,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더 많은 성분을 적절히 뽑아내는 것에 초점을 뒀다고 해석했다.
약배전 커피의 특성상, 로스팅 한지 한 달쯤부터숨어있던 향미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잦은데, 이번에 적절한 시기를 찾은 것 같다. 내게 이 커피를 마셔볼 수 있는 방식은 한 가지뿐이었기에, 바리스타님에게 테스트하셨을 때의 결과를 정말 많이 여쭤봤다. 무려 SSP 98mm 버를 사용하는 800만원 상당의 OZIK 그라인더 MK3(정말 균일한 분쇄)와 노르웨이 빙하물, 테츠 카츠야의 드리퍼까지.. 신중하게 선택된 과정들이었다.
추가로, 브루잉이 끝난 뒤 떨어지는 물과 추출이 끝난 커피 배드에 한번 더 물을 부어 재추출을 한 커피를 마셔볼 수 있게 해 주셨는데, 내 경험 상, 정말 좋은 커피에 한해서 뒤에 나오는 물에 단 맛이 느껴졌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떫거나 날카로운 쓴 맛이 느껴졌는데, 본 추출에 뒤따라오는 물들이 내게는 전부 전자에 속하는 긍정적인 맛이었다. -특별한 맛이 나지는 않는다-
여담으로, V60 카츠야 버전은 드리퍼의 하단부에서 리브가 없어지는 형태인데 이는 추출 속도를 느리게 하여 강한 추출을 돕는다. 블랙로드에서는 이 드리퍼와 함께 시바리스트 필터와 부스터라는 것을 이용해 추출 속도를 조절했다고 한다. -두 도구는 추출 속도를 빠르게 도와줌-
마지막 잔은,
Panama Ninety Plus Baru Estate #24924 washed Folio
[RECIPE]
15g, ICE 추출
내가 이전에 한번 마셔봤던 Ninety Plus의 게이샤 하고는 전혀 다른 가공과 맛을 가진 커피였다. Folio라 하면 해당 커피가 자라는 나무의 것들을 같이 넣어 가공한 것이라고 하는데, 말만 들어서는 가향커피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직설적으로 여쭤봤는데도 자세히 답변*해주셨고, 실제로 맛에서 인공적인 뉘앙스가 느껴지지 않았다. 가향 커피라는 것이 유행하기 전 정말 맛있게 먹었었던 화려한 커피들에서 느꼈던 감정을 찾을 수 있었다.
*몰랐던 사실인데, Ninety Plus는 El Paraiso 이전에 가향 논란이 있었던 농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컵에서는 느낄 수 없었다.
(+241212 : 개인적인 기준에서는 전체 커피 가공 과정에서 일체의 다른 첨가물이 들어간 경우 가향이라고 본다. 온도 변화에 따라 한 컵을 따뜻할 때부터 온전히 마신 것이 아니라서 평가가 정확하지 않았을 것이라 판단해 첨언함.)
잔마다 남아있는 커피 방울들에 물을 섞어 탈탈 털어 마셔준 뒤, 지니님이 준비해 주신 커피들로 마무리했다. Panama Esmeralda의 강배전 Geisha와 Totumas 전시에서 선보인 Criollo washed의 브루잉 버전 -10월 디저트 라떼로 제공, 미디움 다크-, 대만 커피. 직선적이고 다크한 원두들이었으나 역시 재료가 좋으면 뭘 해도 맛있다. 강배전으로 볶은 게이샤를 무려 4번째 마셔보는데, 이것도 되게 맛있었다.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 맛.
커피를 마시기 전 몇 번의 번호가 적힌 컵을 받을까 짧게 상상했는데, 어째 상상한 번호가 나왔다. 예쁜 포장과 예쁜 인증서. 마침 파나마 농장 중 아직 게이샤를 맛보지 못한 Black Moon의 게이샤가 있어 구매하여 같이 포장했다. -50g, 35000원-
올해를 메인으로 Panama의 Esmeralda를 거쳐 Long Board, Janson, Pergamino, Hartmann, Adaura, Altieri, Nuguo, Elida, Totumas, Deborah, Ninety Plus, Lost Origin, Black Moon, Auromar 농장의 게이샤를 모두 맛보고, Ethiopia의 OMA와 Gori, Guatemala Injerto, China Yunnan, Taiwan Jing-long의 게이샤까지 먹어볼 수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역대 최고가 커피를 먹어볼 수 있었다는 것이 맛있는 한 잔을 좇아다니는 사람으로서 행복할 뿐이었다.
커피를 48만원 주고 먹는다고 주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 사람을 설득시킬 것이며 설득을 제외하고 말하면 허세에 불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올해 커피 여행의 방점을 찍는 일이었고 내가 좋은 커피를 가장 많이 먹었을 시기에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기록을 남긴다.
다들 취미활동 열심히 하자!!
* 일반 소비자가 맛보기 힘든 커피를 100% 고객친화적인 방향에서 서비스하는 블랙로드 팀에게 감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