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de voy(돈데 보이, Where I go) Donde voy
어디로 가야 하나. 크리에이터라면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오리엔테이션을 듣고 나면 밀려오는 기댈 데 없는 이 막막함. 자, 무력감은 잠시 접고 또 구라를 풀어보자. 갈 길이 멀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했다. 상품은 점점 비슷해지고 브랜드의 변별력은 더 이상 애초부터 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럴싸한 이야기들은 앞선 구라꾼들이 이미 모두 집적거려 놓은 것만 같다. 크리에이티브 가이드라인은 역시나 웅장 발랄을 요구한다. 오, 쇝! 그러므로 시작부터 엉켜버린 그대가 풀어가는 방정식은 응당 동어반복이거나 패악질이기 십상이다. 그런데 성질을 접고 가만히 생각해 봐라. 그러기 때문에 그대가 크리에이터가 아닌가. 같은 뿌리에서 다른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 이 나무와 저 꽃을 접붙이는 능력. 사람과 말 사이에서 켄타우로스를 만들어 내는 능력. 그 능력을 기대하므로 회사는 그대의 늦은 출근과 못된 성깔머리와 잘난 체를 참아주고 있는 거 아닌가 말이다.
제일 흔한 주제 뭐 있냐, 그래, <사랑>이라고 치자. 한 사람의 AE가 열 사람의 크리에이터에게 사랑을 의뢰하면 열 개 이상의 <사랑 이야기>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 신기하지 않은가 현인류가 존재한 이래 그 수만큼의 사랑이 존재했음에도 아직 남은 <사랑 이야기>가 있다는 게.
우리가 다루는 모든 <꺼리>는 어차피 기출문제이다. 수 십억 인생이 이미 반복해서 살아왔고, 수많은 작가들이 이미 반복해서 다루어 왔던 인생의 기출문제라는 말이다. 다만 그 <같은 것>들이 지금 그대 앞에 버티고 서서 <다르게> 말해지길 간절히 원할 뿐이다. 어렵게 생각 말자. 열폭하지도 말자. 아닌 말로 공중에 떠다니는 흔해빠진 말 몇 개, 낡은 그림 몇 장만 잘 이어 붙여도 그대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날로 먹냐고? 짜깁기 아니냐고? 표시 나면 표절이고 표를 내면 샘플링이다. 흥분하지 마라. 오래된 격언을 기억해라. 크리에이티브는 오래된 것들의 새로운 조합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대를 위한 멋진 변명을 마련해 놓았다. "그런데, 혼혈이 아닌 목숨도 있나요?(김선우 詩 자운영 꽃밭에서 검은 염소와 놀다)" 그렇다. 삶은 섞이는 것이다. 또한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모든 텍스트는 마치 모자이크와 같아서, 어디까지나 다른 텍스트들을 흡수하고 그것들을 변형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며 <상호텍스트성 intertextuality>의 개념을 들어 우리와 같은 하찮은 크리에이터들을 실드 쳐주고 있다.(물론 그 상호성의 수준이라든가 표절까지 용인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니까 너무 함부로 써먹어선 곤란하겠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가르마>를 잘 타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굵고 엄정한 가르마를 타는 일이 매번 쉽지 않고 가르마를 잘 타든 시원찮게 타든 결승점은 어차피 크리에이터가 끊게 되므로 광고의 마지막이자 본질적인 작업인 Way of talking이 바로 그대의 일 되시겠다. 크리에이터는 남이 풀던 문제 또 푸는 사람이고, 크리에이티브 작업은 다른 말로 <Speak Otherwise>하는 것이다. 그 말 안 쓰고 그 말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