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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강 Mar 20. 2023

염(念) 망(忘) 해(解) 論

광고 크리에이터 교본 75.

念, 忘, 解


시작이 언제였는지 근원이 누구부터인지는 몰라도 내가 이 바닥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부터 전해오는 화두 같은 잠언이 있다. 광고 크리에이티브의 프로세스를 딱 세 글자로 표현한 이 초간단 경구는 아직도 내 맘에 강렬하여 그대에게 구라풀길 주저하지 않겠다.

 

첫째가 염(念)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 머리에 쥐 날 때까지. 당연한 얘기 아닌가. 생각도 안 하고 날로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니, 우리 직업을 동사 하나로 표현한다면 <생각하다>가 가장 가까울 것이다(쓰기나 그리기는 생각을 옮겨 적거나, 그리는 데 불과하다).  여기서 중요한 행동 지침은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바로 당일, 초기의 집중이 핵심이라는 거다. 굳이 날 밤을 새울 거면 P/T 전 날 말고 프로젝트 초장에 딱 이틀을 권한다. 그래야 다음 과정인 망(忘)의 의미가 생기기 때문이다. 자, 문제의 두번째 과정은 일단 건너뛰고.


셋째는 해(解)다. 그 생각의 결과를 하나의 의미 있는 질문으로 치환하든지, 흥미롭고 따끈한 주제를 가래떡처럼 뽑아내든지, 캠페인을 대변하는 하나의 단어로 압축하든지. 아무튼 염(念)의 결과로써 해(解)는 필연이다. 누구에겐 유레카요 누구에겐 별이요 누구에겐 도(道)겠지만 어쨌든 그대가 생각하는 그거 맞다. 제대로 풀어낸 '解의 새벽'엔 없던 조증이 솟아오른대도 이상할 게 하나 없다. 왜 미치지 않겠나.

 

내가 흥미로운 것은 가운데 낀 이 망(忘)이라는 과정이다. 왜 일건 생각한 모든 것을 홀라당 잊으라는 역설의 충고를 아끼지 않았을까. 크리에이티브에 종사하는 그대는 이미 알 것이다. 이 시간은 <내버려 두는 시간>이 아니라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는 역동적인 시간>이라는 것을. 이 과정은 그토록 힘들여 念해 두었던 것들이 숙성하거나 발효하거나 또는 변곡점을 찾는 시간이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관계없는 것들끼리 서로 관계를 맺는 시간이다. 고여있는 가운데 치열하게 끓고 있는 시간이다. 자기만의 생각의 울타리에 갇혀 혼자 진도 나갔던 염(念)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퀀텀 점프를 만나기 바로 직전의 정중동의 시간이며 그대가 깔아놓은 생각의 단초들이 형질 전환을 일으키는 과정이다. 그대의 통찰력이 잡아낸 가설들이 검증되는 시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통의 시간이다.

 

사람 만나든 술 마시고 영화를 보고 또 무엇을 하든, 보고 듣고 먹고 겪는 모든 것들이 그대가 방촌(方寸)에 품고 있는 하나의 생각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회임기간이라는 말이다. 몸과 뇌를 가벼이 해선 아니 되는 시간이다.

 

그대들 가운데는 개중에 염과 해는 뒷전이고 이 망의  과정(그것도 부차적인)에 매료되는 사람들이 있다. 님도 안 보고 뽕을 따겠다는 심산이다. 가로수 길에 나가서 광고쟁이然 표 내는 건 좋은데 정작 광고 만드는 건 싫다는 얘기로 알아들어도 괜찮겠는가? 놀러 나가고 싶으면 일단 프로젝트 시작 초기에 딱 이틀만 밤을 패고 생각하길 권한다. 그러고 나서 술을 처마시든지 춤을 추든지 말리지 않겠다. 그때부턴 그대가 진짜 창조적 망(忘)을 행하고 있노라 인정해 줄 테니.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상기된 그대의 얼굴이 보인다. 응, 풀었네, 풀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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