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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은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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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도라 Feb 25. 2023

10살까지만 사는 오빠의 동생으로 산다는 것 1

태어나자마자 중환자실에 누워있게 된 오빠의 존재가 조금 불편했다

몇 년 전, 오빠가 증명사진 잘 찍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왜 갑자기?”

“너무 오래돼서 바꾸려고”

“봐봐.”

31살 남성의 복지카드에 붙어있는 증명사진은 13살 어린 소년의 앳된 얼굴 같았다.

“아 웃겨. 바꾸긴 해야겠네.”

“민증 검사하는 데 겁나 창피했음.”

“ㅋㅋㅋㅋㅋ”


술을 시킬 때 민증 대신 복지카드를 내미는 오빠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병약했던 태아였다.

태어나더라도 10살 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소아과 의사 선생님의 건조한 목소리를 실시간으로 들은 엄마의 기분은 어땠을까.

아무도 헤아릴 수 없겠지만 엄마는 그래도 꼭 낳을 것이라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의 엄마도 오빠의 선천적 장애가 1개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겠지.

오빠는 심장이 약했다. 오빠는 눈이 나빴다. 오빠는 뇌기능도 안 좋았다. 오빠는 다리도 불편했다.

그냥 조금 약하고 나쁘고 안 좋고 불편한 게 아니라 매우 많이.

오빠는 태어나자마자 중환자실로 갔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다행히 상태가 호전되어 몇 주 뒤에 퇴원을 했다.

하지만 오빠는 일상생활에서 머리가 조금만 아파도 정밀검사를 받고 다시 입원을 하고 또 퇴원을 하고…

오빠는 그렇게 매주 포대기에 싸여서 병원으로 출석체크를 했다.




오빠와 나는 3살 차이가 난다. 오빠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병원을 다니고 있는데, 가장 자주 병원을 들락날락거렸을 때가 갓난아기 때부터 10살 때까지였다.

그 말인즉슨, 나는 태어나자마자 귀여움을 독차지해야 하는 막내의 특권을 포기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래, 누군가는 건강하게 태어난 것만으로도 복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생각보다 환아의 동생으로 산다는 것은 굉장히 불공평하고 서글프다.

단지 모부의 관심을 못 받아서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고?

영유아 시기의 모부의 관심은 인생의 전부이다. 영유아 때부터 반양지에서 관심의 햇살을 받으며 자라난 여자아이는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고 스스로를 애정결핍 환자라고 생각하는 성인으로 성장했다.


나도 처음부터 집안에서의 나의 위치가 불공평하다고 느낀 것은 아니었다.

유치원에 입학하면서부터 무엇인지 잘 몰랐던 그 감정이 ‘불만’이며 ‘서글픔’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와 비교가 되는 대상들(=친구들)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왜 나는 할머니가 유치원에 데려다줄까.’


유치원 현관에는 젊고 예쁜 엄마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맨 뒤에는 우리 할머니가 서 계셨다. 할머니의 얼굴을 보면 반갑다는 감정 뒤에 항상 아쉬움이 있었다.

엄마가 있는데 엄마가 없는 것 같다는 기분을 느낄 때면 내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종이접기를 했던 것 같다.


엄마는 그 당시, 옛날자장면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평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장면과 우동을 만들면서 오빠를 옆에 두고 오빠를 보살폈다.

주말에는 영업을 하지 않았는데 금요일 저녁에 가게 문을 닫고 집에 돌아오면 침대에 쓰러져서 다음날인 토요일 늦은 아침까지 잠을 잤다.

그래서 주말에 엄마와 놀이동산에 간다던지 박물관에 간다던지 추억을 쌓기에 좋은 경험을 많이 하지는 못했다.(일기장에도 쓸 내용이 없어서 매일 그날 읽은 책 줄거리를 썼다.) 엄마와의 추억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까. 몇 안 되는 추억들이 아주 생생하게 모두 기억이 난다.

어디에 갔고, 어떤 것을 했고, 내가 왜 울었고, 내가 왜 사진을 찍기 싫어했는지 등등…

이런 얘기를 엄마한테 해주면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고 한다. 엄마는 젊었을 때 기억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기억장치가 잠시 멈춘 것 같다.




6살 때, 나는 장염에 걸렸다. 장이 배배 꼬이는 고통에 계속 울었다.

할머니는 나를 기독병원에 데려갔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원을 했다. 나에게는 너무 큰 병원복을 입고 휠체어를 타고 병실에 입성한 순간 난 입술이 씰룩거렸다.

병실에 누워 있는 오빠 옆에는 항상 엄마가 있었기에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는 생각에 흥분되었고 기대감에 부풀었다.

‘곧 엄마가 가게문을 닫고 여기로 오겠지?’

저녁이 되어 자장면가게 문을 걸어 잠근 엄마는 편의점에서 파는 작은 키티인형을 사 왔다. 정말 행복했다.

그런데 엄마는 나와 짧게 대화를 나누고는 들고 왔던 가방을 맸다. 할머니가 곁에 계실 테니 키티인형과 좋은 꿈을 꾸라고 했다.

나는 서운함이 폭발했다. 꺽꺽대며 울었다.

오빠를 봐줄 사람이 없으니 가봐야 한다는 엄마, 그럴 거면 할머니가 오빠를 보면 되지 않냐고 소리를 지르는 나, 난처한 표정을 짓는 할머니.

세 모녀의 그림이 지금 생각하니 제법 드라마 같기도 하고 시트콤 같기도 하다.

결국 그날 엄마는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서 멀뚱히 엄마를 기다리며 TV를 보고 있을 오빠가 정말 얄미웠다.

할머니는 그날 밤에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할머니는 오빠보다 네가 더 좋다. 불쌍해서 어떡하니.” 위로의 굿나잇 인사를 건넸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나는 본격적으로 오빠에게 느끼고 있었던 질투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이 글을 보는 여러분은 우리 오빠의 생김새를 어떻게 상상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우리 오빠를 3가지 키워드로 나타내보자면, #수영선수 #피아노 #찹쌀떡이다, 종합하자면 얼굴이 찹쌀떡처럼 하얀 수영선수가 피아노도 엄청 잘 친다는 말이다.

그러니 엄마의 관심을 다 가져간 장애인인 오빠를 단순히 몸이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양보하기에는 조금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내가 갖지 못한 재능을 한 개도 아니고 세 개나 가진 인간에게 동정심과 배려심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분에게 오빠나 형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에 비해 너무 잘나서 항상 비교대상이 된다. 얄미운 마음에 살짝 팔을 꼬집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싸늘하게 쳐다보며 이렇게 말한다.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못됐다.“ 

억울하지 않은가? 비장애인인 형제자매 사이의 싸움은 당연하다. 하지만 형제자매 중 한 명이 장애인이라면 비난의 화살은 비장애인인 다른 형제에게 돌아간다.

누가 먼저 잘못을 했는가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장애인을…’이라고 생각하는 주변 사람들의 관념을 이길 수가 없다.


그렇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의 생각을 지나치게 신경 쓰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엄마에게 받지 못한 관심을 주변 사람들에게 받으려고 했다.

그래서 늘 눈치를 보며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이 노력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 친한 친구가 내게 ‘자기 검열 좀 그만해.’라고 농담 식으로 얘기했는데 꽤 충격적이었다. ‘자기 검열’, 이 네 글자가 나를 규정짓는 것 같아서 우울했다.(지금은 별생각 없음) 나는 지금도 종종 유튜브에서 ‘애정결핍 고치는 법’,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 ‘눈치 보지 않는 법’을 찾아본다. 영상에 나오는 애정결핍 특, 자존감 낮은 사람 특에 해당되는 특징에 나를 대입하게 되는데 애써 부정하지만 나와 얼추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더 많았다.




<미움받을 용기> 라는 책이 있다. 남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에게 추천하는 책이라길래 오디오북으로 듣고 있는 중이다.

책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인물은 두 명이다. 철학자와 철학자를 찾아온 청년. 청년은 철학자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둘의 논쟁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책에 나오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행은 존재한다? 나는 인정할 수 없네. 스스로가 불행한 건 스스로의 손으로 불행한 상태를 선택했기 때문인 것이지, 불행한 운명 때문이 아니라네.”


나는 이 글의 서두에서 ‘스스로를 애정결핍 환자라고 생각하는 성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유년시절의 오빠와 엄마에게 받은 상처 때문이야.’ 라며 온 글에서 피력하고 있다. 철학자의 말처럼 나는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불행한 상태를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나에게 동정심을 느껴 관심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난 애정결핍이야.’ ‘내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내게 관심을 줘.’


나의 이런 상황을 모르는(나도 연애를 할 때 내 상태를 몰랐다) 전 애인들은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었다.

그러면 나는 나만을 향하는 그들의 관심이 매우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불안했다. ‘왜 나를 이렇게까지 아껴주지?’ ‘왜 자꾸 연락을 하지?’

이별을 고했다. ‘나는 연락이 잘되지 않는 사람이야. 너의 연락 주기에 맞출 수 없어.’

자기 합리화를 했다. ‘난 애정결핍이라 그런 거야. 그리고 이건 유년시절의 불행함 때문이지. 어쩔 수 없는 거야.‘


맞다. 난 스스로 불행함을 선택한 것이고 그 불행함을 이용하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사회생활을 하고, 연애를 오랫동안 쉬며 나에게 관심을 쏟고, 나의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니 나의 개선점이 보인다.

결핍되고 공허한 부분을 자존감으로 채우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투자를 한다.

불행한 상태를 선택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운명이라던가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이라고 핑계 대지 않는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글을 쓰는 편인데 오늘은 글을 쓰며 생각이 많아진다.

피아노 잘치는 수영선수 찹쌀떡 오빠 이야기는 계속 쓸 생각이다.


Image by Alexa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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