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이 Aug 15. 2023

김환기, 그의 푸른 우주

환기미술관을 다녀오다

화가 김환기는 내게 작품보다는 사랑이야기로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의 본명은 변동림으로 그녀는 김환기를 만나기 전 시인 이상과 결혼해 살았으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와 사별하게 된다. 그 후 그녀는 일본 시인 노리타케 가즈오의 소개로 김환기를 만난다. 그녀는 그에 대해 처음에는 별 호감을 느끼지 못했으나 김환기가 고향에서 꾸준히 보낸 그림 편지에 마음을 열고 김환기는 변동림에게 자신의 어릴 적 이름인 김향안이라는 이름을 선사한다. 두 사람은 삶의 동반자이자 예술적 동지로 살아오다 김환기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김향안은 환기미술관을 설립 후 그의 작품을 국내외로 알리는 데 열정을 쏟는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이야기.

      

김환기의 작품이 환화 132억으로 낙찰돼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들었지만, 부끄럽게도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외국 화가의 작품에는 열광하면서도 정작 국내 화가들의 작품에는 무지했던 셈이다. 내가 김환기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보게 된 그의 화집 때문이었다. 화집 속 그의 작품은 생명력을 발산하며 눈앞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혜안이 없어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작품의 진가가 보이던 순간이었다.

 

환기미술관 입구


그의 원작을 직접 보고 싶었다. 나는 나에게 주는 여름휴가로 어느 비 오는 금요일 환기미술관으로 향했다. 경기 북부에서 부암동까지 버스로 2시간을 달려 미술관에 도착했지만 본관은 전시 준비 중이어서 작가의 중심 작품들은 볼 수 없었고 뉴욕작업실을 재현해 놓은 ‘예술가의 방’만 관람이 가능했다. 가는 날이 장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호암미술관에서 김환기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작품이 그곳에 가 있으니 당연히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2시간을 달려간 보람이 없는 듯해 허탈했으나, 예술가의 방을 관람하니 마음이 좀 달래졌다. 생전에 그가 사용하던 고풍스럽고 운치 있는 가구들과 화구(畫具)를 보관했던 트렁크, 작가의 손때가 묻어있는 공간을 마주하고 있으니 묘한 감회가 들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작가의 작품 몇 점과 아내 김향안과 나눈 편지도 원본 그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아내를 향한 편지글은 어찌나 진솔하고 사랑이 묻어 나오는지 화가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사랑과 예술로 강하게 연결된 두 분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만도 흐뭇한 기분이었다. 사랑에 대한 낭만과 희망이 살아나는 듯한.

     

(좌) 김환기가 편지 말미에 가득 적어둔 그 이름 '향안' / (우) 김향안이 그린 김환기 초상화.


재현된 뉴욕 스튜디오 위쪽에 설치된 스크린에선 작가가 그림 작업을 하며 기록해 둔 메모들이 상영되고 있었다.

     


- 화가는 자신의 작품을 세상이 왜 알아주지 않는지 의아해했고

- 작업한 그림 세 점 중 한 점을 부숴 버렸고

-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가

- 다시 작업에 매진했고

- 한 작품을 시작하면서 대작이 될 것을 예견하였고

-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그의 사후에)

- 작품에 몰두하던 하루가 저물 때쯤,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 그는 고국의 그리운 이들을 떠올리며 그리고, 또 그렸고

- 고국이 아닌 작업실이 있던 뉴욕에서 푸른 꿈을 안고 생을 마친다.



메모들 속, 작가의 감정 변화를 따라가다 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스크린 속 작가의 메모를 한참 바라보다가 전시 굿즈를 진열해 놓은 별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의 작품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도록을 보며 달래려는 심산이었다. 서울과 파리, 뉴욕 등 작가의 삶의 시기마다 달라지는 화풍은 각자의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작가의 말년에 작업했던 점 선 면의 추상화도 물론 훌륭했지만 동양미가 드러나는 초기 작품들도 매우 아름다웠다.

     

김환기는 시를 사랑한 문필가이기도 했다. 글을 잘 쓰는 이들이 미감이 뛰어나거나 반대로 섬세한 미적감각을 가진 이들이 아름다운 글을 쓰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세상에 대한 관찰력이 좋다는 것, 주변에 애정과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었다.


예술가의 방 '포토존'

    

미술관을 나서면서 아쉬운 마음에 나는 몇 번이나 뒤돌아봤다. 환기미술관이라는 문패를, 돌담벽에 드리운 나무들을, 이곳을 설립한 김환기의 아내이자 화가이며 문필가였던 김향안의 마음을. 그리고 그의 작품이 내게 던진 메시지를.

    

그의 그림은 이렇게 묻는 듯했다. 너는 너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그 끝에 다다라 무엇 하나 내어놓을 준비가 되었느냐고.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푸른 우주와도 같은 심연을 어렴풋이, 그려볼 뿐이었다.



1950년대 김환기의 작품과 1970년대 그린 추상화.


◎ 작품 이미지 출처:
전시 도록 <우정의 가교>와 <영원의 노래>
원작의 색감과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 글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 글의 모방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9와 앨리스_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