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사이즈가 워낙 작아 종양인지 아닌지는 몇 달을 두고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운이 나쁘게 종양이라면 종양이 커질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못 하고 지켜봐야 한다는 것인가 싶어 몇 군데 병원에서 검사를 더 받아보았지만 의사들의 소견은 비슷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머릿속의 혹은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았고 일 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좀 단순하게 살라는 9의 4절까지 이어지는 잔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다가 나는 ‘단순하게? 너처럼~?’ 하고 최대한 얄미운 투로 말한다. 9는 그 단정한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그 눈매에 적의라고는 하나도 없어서 나는 피식, 웃고 만다. 9를 놀리는 것처럼 재밌는 일이 또 있나 싶다.
9의 둘째 딸인 진이는 9가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보육센터에서 만난 아이였다.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진이는 3살 때 한번 입양된 적이 있다. 진이는 입양 후 1년도 되지 않아 희귀성 질환에 걸렸고, 병의 완치 여부를 확신할 수 없었던 양부모는 진이를 결국 파양 하기로 했다.
센터로 돌아온 진이는 복지사들의 돌봄과 꾸준한 병원치료로 몸은 회복되었지만 자기도 모르는 마음의 구멍이 생긴 것 같았다. 복지사들에게 친근하게 웃으며 다가오다가도 겁을 먹으며 피했고, 고분 하게 말을 잘 듣다가도 억지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9의 말로는 혼란형 애착장애인것 같다고 했다. 9는 그런 진이가 눈에 밟혔다고 한다. 특정한 아이에게 애정을 표현하면 센터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가는 걸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결혼을 하고 호를 낳고 키우면서도 일을 놓지 않던 9는 몇 년 전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남편과 상의해 진이를 입양했다. 진이 이야기를 하며 눈가에 물기가 어리던 9의 얼굴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역시 신기할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진이를 실제로 만나고 내 생각은 조금 바뀌었다. 9는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딸을 얻다니 말이다.
그런 그녀도 허당 같을 때가 있는데, 뭘 하나 살래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다는 것. 언젠가는 식탁의자를 산다며 여러 개의 사진을 보내왔는데, 오렌지색 철제 접이식 의자가 눈에 계속 들어오더란다. 흰색과 베이지색, 원목을 중심으로 인테리어 한 그녀의 집에 오렌지색 의자는 너무 튈 것 같아 말렸는데도 그녀는 다시 ‘그래? 근데 너무 예쁘지 않아?’라며 물어온다. 나는 대답 대신 오렌지색 의자를 그녀의 주소로 주문한 후 주문페이지를 캡처해 그녀에게 전송했다. 핸드폰 화면 밖에서 웃고 있을 그녀의 얼굴이 상상이 되는 데도 그녀는 문자로 주문을 취소하라고 한다. ‘하고 싶은 걸 너무 참는 것도 좋지 않다며?’ ‘그냥 해.’
나는 대답한다. 하트와 눈물 이모티콘이 나의 핸드폰으로 날아든다.
며칠 후 그녀는 사진 한 장을 보냈다. 베란다에 흰색 간이 테이블과 오렌지색 의자가 놓여있는 풍경이었다. 내 말대로 부엌의자로 쓰기에는 너무 튀어서 베란다에 놓기로 했단다. 9는 그 의자에 앉아서 창밖 풍경도 보고 차도 마시고 자기만의 시간도 가진다면서 너무 좋아했다. 의자이름도 ‘앨리스’라고 지어줬다나. 그러면서 내가 보고 싶을 때도 앨리스를 본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오글거리는 말을, 9는 참 잘도 한다.
앨리스……
그 이름이 참 9다워서 나는 또 피식, 웃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