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이 Sep 06. 2023

하나의 나뭇잎에서부터 02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쁜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빈 속에 쏟아붓던 카페인, 연일 이어지던 밤샘근무에 위염을 달고 사는 케이에게 커피 대신 민트티를 사다주던 M의 웃는 얼굴을 케이는 기억하고 있다.


온전한 선이 어렵듯 온전한 악으로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케이의 머릿속에 이 문장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어느새 나뭇잎의 반을 칠했다. 색연필의 길이도 짤막해졌다. 색연필을 쥐었던 중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 살이 배기고 손목이 저렸다. 케이는 숙인 허리를 펴고 등을 젖혀 스트레칭을 했다.

“으아아~”

신음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케이는 무언가 후련한 기분을 느꼈다.



-3-

새로 자리잡은 회사에서 몇 년 후 케이는 팀장 직함을 달았다. 팀장을 달고 나서야 케이는 알았다. 좋은 팀장을 만나기는 어렵지만 좋은 리더가 되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케이는 잘 하고 싶은 마음이 과해 여러 잘못을 저질렀다.


첫째로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상사가 되고 싶다는 욕심을 부린 것이고

둘째로는 자신의 아이디어와 판단을 관철시키지 못했으며

셋째로는 업무분담에 실패하고 혼자서 많은 것들을 짊어지려고 했다는 것.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업무와 인간관계 모두 이도저도 아닌 제스처를 취했다는 것.


조력자의 성향을 가진 케이는 처음부터 리더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케이는 자주 불면에 시달렸고, 출퇴근길 쏟아지는 사람들 속에서 종종 두려움을 느꼈다. 후에야 그것이 공황장애의 전조증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케이는 한 디자인프로젝트를 마지막으로 회사생활을 그만두었다. 그 사이 있었던 많은 일들은 모두 행간에 묻어두기로 한다.



-4-

저녁시간을 쪼개어 나뭇잎을 그리기 시작한지 꼬박 삼일 째 나뭇잎은 선에서 면으로 빈데없이 채워져 있었다. 그 사이 케이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들은 하나둘 어딘가로 멀어졌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케이는 창문을 열고 바깥공기를 들이마셨다. 상가건물의 3층에 살고있던 케이의 집 창 아래로 건물 2층 높이의 단풍나무가 내려다보였다.  단풍나무 잎들은 무성하게 자라 나뭇잎 지붕을 만들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촘촘히 사방으로 누운 나뭇잎들은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은 푹신한 이불 같았다. 등을 대고 누우면 옷에 푸른물이 들 것 같은 싱그러운 초록색 잎사귀들.


바람이 불자 잎사귀들이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흔들렸다. 음악에 맞춰 각자의 춤을 추는 것처럼, 조금씩 다른 음으로 화음을 이루는 것처럼. 그 모습이 꼭 우리네 사는 모습과 닮아있었다. 관계 속에서 나를 잃지 않고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일. 그러면서 조화롭게 타인과 어우러지는 일. 케이는 그 일을 해나가는데 있어 자주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렇지만 흔들리지 않는 삶이 어디 있을까. 어쩌면 삶이란 각자에게 주어진 흔들림의 몫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흔들림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움직임을 이루는 것인지도.


하나의 나뭇잎에서부터 시작된 한무리의 잎사귀들이 바람과 한바탕 근사한 춤을 추는 것처럼, 그 움직임은 제법 아름다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조금 흔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케이는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덧. 이 이야기의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렇듯

작가의 이전글 하나의 나뭇잎에서부터 0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