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는 아랫동서직군에 꼭 필요한 용어다.
아침 7시, 그렇게 그 둘은 같은 공간에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있었다.
더는 같이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섞여있는 것이었다.
늘 그랬듯이 차례상을 차리고 약식으로 연도를 하며 차례를 지냈다.
그러는동안 모두가 좁은 공간 안에서 각자 할 일을 찾아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아진과 달하 역시 그랬다.
아진은 남편이 베란다에서 들여온 상과 제기를 마른 행주로 닦았다.
달하는 전날 시모가 준비해 둔 음식들을 데워 상에 올릴 준비를 했다.
그리고 아진은 그동안 주변을 정돈하고, 심부름을 하며 시모와 윗동서의 조리를 보조했다.
음식을 조금씩 정갈하게 잘 놓는 달하가 제기에 음식을 올리면 아진이 제기를 들어날랐다.
"어쩜 형님은 이렇게 음식을 예쁘게 잘 담으세요? 정말 금손이세요, 금손. 부러워요~~"
"에이, 아니야^^ 하다보면 다 돼."
평소같았음 주고받았을 대화가 이 날은 없었다.
평소가 아니었기에.
모든 과정을 지나오는 동안 아진과 달하는 서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늘 수다스럽게 부지런히 움직였던 아진이지만 이 날은 아진의 얼굴에 웃음도, 말도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새벽부터 그런 대우를 받은 아진은 웃고 싶지 않았고, 웃음이 나지 않았다.
차례를 지낸 후의 일과 역시 같았다.
아진은 프라이팬과 집게, 키친타올, 식용유와 접시를 챙겨 베란다로 나간다.
파란색 목욕탕 의자를 휴대용 가스레인지 앞에 가져와 앉는다.
결혼 전엔 무서워서 넣지도 못했던 부탄가스를 칵테일 섞듯이 야무지게 흔들어준다음 능숙하게 넣고 뚜껑을 닫는다.
결혼 전엔 혼자서 누르지도 못했던 레버 역시 내리는 것 또한 이젠 일도 아니다.
그렇게 세 가족이 먹을 갈비를 굽는다.
그래도 지금은 낫다.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일곱 가족이 먹을 갈비를 구웠어야 했다.
사람 수로 따지면 열여덟명. 어머나. 하필 열여덟이네. 처음으로 세어본건데 마음에 들어오는 숫자인걸.
진작 세어볼 걸 그랬다. 열여덟.
아진은 결혼 후 명절이 되면 베란다에서 혼자서 쭈그리고 앉아 갈비를 굽는 이 시간이 정말 싫었다.
마치 혼자 어디에 갇힌 신세가 된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날은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좋았다. 적적하게만 느껴졌던 이 공간이 너무나 평온하게 느껴졌고, 도망쳐 나와 한숨을 돌리는 기분이었다. 살 것 같았다. 몹시 편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명분이 있어 좋았다.
야속하게도, 구워진 갈비는 어느새 접시를 가득 메워갔고 이제는 나가야했다.
마지막 갈비접시를 들고 거실로 들어가면 나머지 식구들은 이미 다 자리를 잡고 앉아있기 때문에 아진은 늘 남아있는 자리에 앉아야 했는데 달하의 맞은 편 자리만이 비어있었다. 아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식사 시간.
보통 때라면 아진은 조카들에게 장난도 걸고, 시모의 김치나 전 등이 맛있다고 한참 재잘댔을 시간이다.
유일하게 엉덩이 붙이고 앉아 식구들 얼굴을 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에 아진은 밥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을 좋아했다.
하지만 보통적일 수 없었다. 아진은 입도 뻥끗 하지 않았고, 고개도 들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 반찬 저 반찬에 다 인사하고다닐 아진의 젓가락도 이날은 달랐다. 밥그릇에 있는 밥알들을 하나씩 세며 아진의 입으로 날랐다. 도무지 아진이 입을 벌려주지않아 젓가락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식사를 마친 후의 아진이 있어야 할 곳 또한 정해져 있다.
싱크대 앞이다.
아진은 이 시간을 <설거지옥>이라고 칭하고 다녔다. 다행히 이렇게 어른들 앞에서 엄살을 피우며 까불어도 혼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여태 단 한번도 요령피우지 않고 늘 설거지를 도맡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늘 즐겁게 임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진은 설거지하는 시간을 좋아했다. 아진이 설거지를 시작하면 누군가가 옆에 와 늘 아진이 비눗칠 해 쌓아둔 그릇들을 헹궈주었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는 어떤 날은 달하가 되기도, 아진의 다른 사촌아랫동서가 되기도 했다. 아진은 그렇게 나란히 서서 수다를 떠는 설거지옥 그 시간을 좋아했다.
그랬기에 여느날과 다르지 않았다면 아진은 나머지 식구들이 먼저 숟가락을 내려놓기 시작하면 눈치껏 남은 밥을 입에 얼른 욱여넣고 일어나 싱크대로 향했을 것이다. 자신이 하지 않으면 달하가 해야하는 것을 알았기에 늘 달하보다 먼저 일어나 싱크대 앞을 차지했다.
언젠가 한번은 달하가 먼저 그릇을 정리하고 일어나 싱크대 앞으로 가 설거지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아진이 잽싸게 일어나 달하에게 가서는,
"형님, 어머님께서 찾으시는데요?" 하고는 달하를 부른 적도 없는 어머님의 권력을 빌려 자리를 다시 꿰찬 적도 있었다.
그만큼 아진은 달하를 좋아했고, 본인이 조금 고생하더라도 달하를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먹는 듯 마는 듯하던 아진은 식구들이 하나둘 숟가락을 내려놓자 여느때처럼 자신의 그릇을 들고 눈치껏 일어났다. 그리고는 싱크대로 향했다. 자신의 그릇들을 싱크대 안 설거지통에 넣어 물을 받았다. 물이 넘치자 물을 껐다. 아진은, 더이상 싱크대 앞을 지키지 않았다. 남편이 결혼 전 쓰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는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침대끝이 포옥하고 내려앉더니 아진을 바닥으로 미끄러트렸다. 다시 나가 너의 자리를 지키라는 듯이. 늦지 않았다는 듯이.
아진은 다시 일어나 더 깊숙히 엉덩이를 밀어넣고 발바닥과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아진의 의지였다.
그제서야 침대가 아진을 포근하게 앉혀주었다.
아진에게 대책따위는 없었다. 그냥 하기 싫었다. 오늘만큼은 달하를 위해 자신의 수고를 내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아진은 아랫동서직을 포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