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서로 다른 이름을 주장하는 대화 속 사물의 대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비로소 아버지가 식탁에서 찾으신 푸로스펙스의 정체는바로프로폴리스. 눈을 둥그렇게 뜨고 어안이 벙벙한 딸에겐 대체 이 분들이 무얼 얘기하시나 기가 막혔지만, 30년 세월을 넘긴 노부부에겐 찰떡이 먹히는 매우 자연스러운 건강생활이었다고 해야 할까.
"엄마랑 아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심지어 딸이 굳이 지적을 하게 됨으로 폭소를 터트리기 전까지는 당신들의 대화가 이상하다는 낌새조차 느끼지 못한태연자약함이다. 그야말로 개떡이 찰떡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프로폴리스는 억울하다.
사람들에게 그 효능을 들키기 전에는 꿀벌들의 방패가 되어주었던 사명감 있는 삶이었다. 육각의 방 틈새틈새를 메움으로써 여왕벌과 아기 벌들을 유해 미생물로부터 든든히 지켜내었으니 일등공신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똑똑한 일처리를 인간들이 그냥 둘 리가 없지, 항염 효과와 항산화 효과를 일찌감치 눈여겨본 고대인들이 상처치료용으로, 방부제로 등등, 그 쓰임새를 이모저모 발견하지 않았겠나. 목이 칼칼하니 통증이 온다 싶을 즈음, 프로폴리스 스프레이를 치익 칙 뿌리고 자면 아침에 제법 개운하여 그것 참 기특하다.
이토록 이로워 비타민 버금가는 영양제들과 키를 나란히 하며 약 선반에 떳떳하게 자리 잡은 녀석인데하필 이름이 왜 프로폴리스인가. 프로스펙스가 되었다가 브로콜리가 되었다가(하필이면 갱상도 어르신들이라 푸로스펙스에 부로콜리가 되기도) 하는 것도 정체성에 혼돈이 오는데 어느 날은 불리지 말았어야 할 이름까지 뒤집어쓰게 되었다.
"집에 그거 없어? 프로포폴인가? 폴라폴리스였나?"
감기 후유증이 남은 데다가 고농도의 미세먼지를 마신 날 꺼끌 해진 목을 가다듬으며 남편이 약선반을 뒤진다.
프로포폴이라니. 이런 오명과 치욕을 나에게 씌우다니. 초성에 'ㅍ'이 들어가는 단어는 다 갖다 붙이는 거 아니야? 프로폴리스의 걱정 어린 한숨이 들려오는 듯하다. 하필이면 어려운 이름을 갖고 태어나서 프로폴리스는 곤욕 중이다.
사실은 프로폴리스도 해명하고 싶을 것이다. 비록 나의 이름엔 'ㅍ'이라는 꽤나 강렬한 거센소리가 두 번 들어가지만 그걸 감싸기 위해 온통 울림소리를 연달아 깔아놓지 않았냐고. 거세고 된 소리들로만 이루어졌다면 발음하는 데에 더 곤혹스럽지 않았겠냐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프로폴리스에게 미안한 얘기를 좀 하자면, 그 거셌다가 울리는 변덕 덕분에 우리는 웃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위로를 건네고 싶다. 깊어가고 늙어가던 부모님의 그날 밤, 실은 무거운 주제로 갑론을박 중이었다. 도무지 접점이 찍히지 않는 아비와 딸의 세대갈등에 느닷없이 등장하는 푸로스펙스와 부로콜리. 한껏 격앙되었던 거실에 웃음보를 터트려 놓아주었으니 어찌 고맙지 않으랴.
남편의 프로포폴과 폴라폴리스도 마찬가지다. 좀처럼 낫지 않는 기침과 목의 통증으로 인상이 확 구겨지며 심각했던 남편, 그걸 지켜보며 걱정 반 언짢 반이었던 나로 인해 집안은 어두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우스꽝스러운 작명이 튀어나와 준 덕분에 팽창된 먹구름조차 '피식' 하며 바람이 빠졌다.
이렇듯, 때로 우리의 삶에는 팍팍하고 거센 놈들이 불쑥불쑥 들이친다. 그러나 그런 것만이 인생은 아니라고 뒤이어 따라와 주는 울림들이 언젠가는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며, 다시 반복되는 그 패턴을 견뎌내는 가운데 생의 염증을 이겨낸 우리는 기어코 살아간다. 단언컨대 프로폴리스의 효능은 구내염 치료에만 국한되는 건강기능식품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프로폴리스의 효능을 강약의 변덕에 관한 교훈으로만 끝나면 또 아쉽다.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 개인 이 건강기능 보조제를 두고 우리는 화합한다. 오명으로 부른 들 어떠하리,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면 그만인 것을. 서로 다른 이를 불렀지만 너의 마음은 나의 마음이라 알게 된 것 아니었냐는 것이다. 티격태격해도 먹구름이 드리워도 결국은 이심전심, 함께한 세월은 한 마음결로 흐르니까.
부모님의 푸로스펙스, 브로콜리, 남편의 프로포폴, 폴라폴리스를 꼬집어 웃고 말았던 쓰니가 프로폴리스 과다 인용으로 인한 부작용을 톡톡이 맛보았다. 혀가 꼬여서 별명을 부르는 이를 만나더라도 적당히 웃고 멈추자. 자칫하다 역공을 당하기가 십상이다.
지난 주말, 광화문 앞을 지나가며 딸이 공연 현수막이 크게 붙은 웅장한 건물을 가리키며 질문하며 역공은 발단했다.
"엄마. 저긴 어디야?"
"응? 저게 뭐더라, 갑자기 이름이 생각이 안 나네, 예술의 전당이었던가?"
아, 아닌데 거긴 서초동인데, 이루 말할 수 없는 내적 수치심을 느끼는 중인데 남편이 비웃는다.
"큭, 거기서 예술의 전당이 왜 튀어나와? 세종 문화회관이지."
"아니, 그래도 전설의 고향이라고 얘기한 할머니보다는 낫지 않나?"
아무 말 대잔치를 일단 우겨보자. 남편의 때려주고 싶은 비소를 애써 무시하는 가운데 딸이 다시 묻는다.
"근데 왜 예술의 전당을 전설의 고향이라고 불렀던 거야?"
이 때다, 만회할 기회는!
"으응, 아무래도 음절의 운율이 같고 사용되는 초성이 비슷하니까 헷갈려서 그렇게 부를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