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여행을 다녀왔다. 주말에 다 같이 TV를 보는데 대만식도락 여행이 소개되어서 결정한 여행지였다. 마침 아이가 갔던 첫 해외여행지라 추억여행 겸 좋겠다고 했을 뿐 누구 하나 날씨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굳이 이 시기에 대만을 가냐는 사람들 반응에 그제야 찾아본 대만 일기예보에는 비그림이 가득했다. 우기란다. 게다가 기온도 확실히 한국보다 높았다. 여행에 날씨가 얼마나 중요한데 걱정됐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는 것 같아 여행을 감행했다. 각오하고 도착한 대만은 예보대로 비가 계속 왔고 흐렸다. 생각보다 덥지는 않았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가동되는 실내는 물론 실외에서도 추워서 옷을 사 입어야 했다. 아프리카에 가도 긴팔 하나쯤은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여행 짐을 챙기면서 열심히 챙기는 것 중의 하나는 약이다. 예전에 일본에서 엄마가 배탈이 나신 적이 있었는데 약국에서 말이 안 통해서 애를 먹었다. 그냥 배가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는 단순한 말보다 자세하게 설명해야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배가 사르르 아프다, 쿡쿡 찌르듯이 아프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머리가 빙빙 돈다. (그때만 해도) 엉성한 파파고에 의존해 약을 샀는데 과연 이 약이 잘 들을지 걱정했다. 출발할 때 당장 증상이 없으면 굳이 약을 챙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오지로 여행 가는 것도 아닌데 그 나라 약국에서 사면된다고 생각해 타이레놀 정도만 챙겼었다. 내 몸에 맞는 약이 있어야 증상에 맞춰 먹을 수 있고 편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는 종류별로 상비약을 챙긴다. 하지만 상비약보다 더 꼼꼼하게 챙기는 것은 다름 아닌 영양제다.
처음 시작은 나보다 체력이 떨어지는 남편을 위해서였다. 남편은 파워 J 계획형의 사람이다. 반면 나는 강력한 P, 즉흥파이다. 이런 성향이 여행에서는 반대로 바뀐다. 나는 여행루트를 최대한 꼼꼼하게 짠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몇 번 버스를 타고 어떤 정류장에서 내리는 지도 적어두었다. 여행지에서 내가 계획형으로 변신하는 이유는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어서다. 내가 이곳에 언제 다시 오랴. 내 위가 허락한다면 다섯 끼를 먹고 내 다리가 부서져라 돌아다니고 싶었다. A를 보러 가는 길에 B카페에 들르고 C식당에 간다. 다시 D를 보러 가는 길에 E를 잠시 보고, F를 먹으러 가는 식이다. 이 와중에 카페나 식당에 사람이 많거나 임시 휴무 등의 새로운 상황을 맞닥뜨리면 주변에 있는 곳에 가야 하므로 정보는 많을수록 좋다. 그래서 최대한 촘촘하게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니 계획을 얼마나 많이 지켰는지 별 관심이 없다. 반면 이런 계획을 접한 남편은 정해진 목록을 모두 완수하고 싶어 한다. 마치 게임에서 미션완수 후에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기라도 하는 듯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내가 작성한 계획을 완수하는데 꽂힌다. 그러다 보니 여행지에서 하루의 끝이 되면 심하게 너덜너덜해지는 것은 남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려는 마음이 고맙다가도 그렇게까지 계획대로 안 해도 되는데 미련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고용량의 영양제를 챙기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챙겨줘도 잘 안 먹던 남편도 여행지에서만큼은 꼬박꼬박 잘 받아먹는다.
여행하면서 기분 좋을 때 중의 하나는 단연 업그레이드를 받을 때다. 비행기 좌석 업그레이드, 호텔 룸업그레이드. 한 손에 꼽을 만큼 적은 경험이지만 공주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은 뚜렷하게 남아있다. 첫 번째 숙소에서 운이 좋게도 우리가 예약한 방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은 곳으로 업그레이드를 받았다. 사람들이 덥다며 말리더니 여행객이 많지 않은 때가 맞나 보다. 잠만 자고 나오기 아까울 정도로 넓은 방이었는데 덕분에 여행 시작이 아주 즐거웠다. 하지만 여행 끝까지 즐거우려면 룸업그레이드보다는 체력 업그레이드가 더 필요하다.
보통 고용량의 비타민정도만 챙기는데 이번에는 유산균에 효소까지 챙겼다. 아침에 유산균을 먹고 일정 시작 전에 비타민을 먹는다. 거한 식사 뒤에는 난생처음 효소도 먹어본다. 입에 탁 털어 넣고 물과 함께 넘어가는 약이 느껴지면 몸속 어딘가에 켜져 있는 체력게이지가 빵빵하게 채워지는 기분이 든다. 영양제는 분명 플라시보 효과가 있다. 여행 내내 덜 피곤하게 느껴진 것은 진정 약기운 덕분일까? 혹은 예전보다 널널해진 계획 덕분일까? 빡빡한 일정표 속에서 하나라도 더 보고 더 먹으려는 자와 일 년에 한 번 받는 소중한 휴가에 그저 쉬다 오고 싶은 자의 대치다. 그동안은 여행 준비를 주로 내가 하다 보니 아무리 줄이고 줄여도 편하게 쉬고 싶은 남편 입장에서는 여전히 힘든 일정이었다. 둘 사이의 간극이 워낙 커서 중간에서 만나기가 어려웠다. 이번에는 휴가 전까지 유독 바빴던 남편을 위해 하루에 한 곳만 보자는 마음으로 계획을 거의 세우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편은 이번 여행에도 쉬지 못한 것 같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남편이 좋아했던 여행이 딱 한 번 있었다. 여행이 며칠 더 남았는데 비행기표를 뒤로 미루자고 했었다. 라스베이거스에 들렀다 칸쿤에 갔을 때였다. 여행 직전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니 여행 가는 것이 무조건 위험한 것은 아니지만 응급상황이 생길까 걱정된다고 했다. 선택은 우리 몫이라며 간다면 최대한 무리하지 말라고 하셨다. 야심 차게 예약해 둔 모든 액티비티를 취소했다. 특히 기대가 컸던 그랜드캐년 헬기투어는 눈물을 머금고 취소했지만 임신 초기에 멀리 여행을 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다. 라스베이거스에서는 호텔에 있는 카지노를 하고 호텔수영장에서 수영하고 옆 호텔에서 공연을 본 게 전부다. 호텔 반경 100미터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다음 일정인 칸쿤에서는 활동이 더 줄었다. 그때 호텔올인클루시브가 유행이었는데 제대로 이용하자며 내내 호텔에 있었다. 몇 발짝만 나가면 있는 프라이빗비치에 조차 딱 한 번 나갔다 왔다. 수영장 썬베드에 널브러져서 내내 좋아하는 미드를 보며 남편은 이곳이 지상낙원이라고 했다. 제대로 쉬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걸 10년이 지난 이제야 기억하고 깨달았다. 남편이 원한 건 그런 여행이었구나. 영양제를 살뜰히 챙겨준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내 딴에는 남편 생각해서 일정을 대폭 줄였지만 남편이 크게 고마워하지 않은 것은 섭섭해할 일이 아니었다. 다음 여행은 10년 만에 엄청난 변화를 줘야겠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을 계획해 봐야겠다. 근데 둘이 쉬고 있으면 나만 잠깐 나갔다 오는 건 괜찮겠지? 계획은 변해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