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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영 Oct 06. 2024

                 내 무의식의  방엔   

                         막내 여자아이가  산다.

  1942년, 엄마는 전라도 순천에서  한 집안의  막내  딸아이로 태어났다. 그날,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할머니의 겁에 질린 울음소리와 외할아버지가 각목으로 온갖 집안의 기물들을 깨 부수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때 장독에 있던 옹기들 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 들은  죄다 부수고도 분이 안 풀린 외할아버지는 그 길로 선술집에 달려가 사흘 밤 낮 동안 술을  먹고 기절해서 실려  왔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사실 처음부터 그의 아내가 아니었다. 첫 남편과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다가 어느 날 어딘지  모를  곳으로 남편이  끌려간 후 돌아오지  않았고, 딸 하나를 데리고 남편을 기다리며  살고  있던 할머니를 그 사람이 몰래 밤에 자루를 뒤집어  씌워서  데려와 버렸던 것이다. 동네에서  못 말리는  난봉꾼으로 소문난 그를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첫 남편과 낳은 딸아이와 강제로 헤어져야만 했다.

  이후에  그와 낳은 자식들은 모두 일곱인데, 딸 넷에 아들 셋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딸 넷은 모두  살아남았고 아들 셋은 두 돌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하늘나라로  갔다.  그 험한 일들을  다 겪어내는 와중에 마지막으로 태어났던  딸이 바로 내 엄마였다.

  엄마는 생일을 알지  못한다. 외할머니는 막내딸이 태어났던  그날의 두려움과 공포를 차마 붙잡고 살아갈 수 없었던지 그 날짜도  함께 놓아 버렸다. 외할머니의 남편은 밥을 먹다가도 아무 이유 없이 상을 뒤엎어버리기  일쑤였고  심지어 색시집에 가서 술을 퍼마시다가 잔뜩 취해서는 색시들을 양 옆구리에 끼고 집에 올  때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면  할머니는 술 취한 그와  여자들의 잠자리까지 마련해야 했다.  어렸을 때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자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듯하여 온 사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다행히 (?) 그는 엄마가 돌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는 누군들 그렇지 않았겠냐만, 네 명의  딸들을 데리고

헤어진 딸을 가슴에 얹은 채 할머니는 참으로 힘들게 사셨을 것이다.

  이후  엄마는  간호사가 되었고 병원에 근무하던 중에 아버지를 만났다. 두 사람사이에는  딸 셋 아들 둘이 태어났으나 딸 셋만  자라서 어른이 되었고 아들 둘은 아기 때  죽었다.  그게 어떤  이유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아버지는 순한 성격이었지만 술만 마셨다 하면 엄마를 죽여버린다며 때리고 괴롭혔다. 공포에 질려 울고 있을  때마다 아버지는 나에게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이제 엄마랑은 못 사니 엄마를 쫓아낼 거라고 했다. 커다란 자개농이 있던 안방에서 그 장롱의 살짝 튀어나온 부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나는 서럽게 울었다. 열려있던 창 틈으로 햇살이 들어오면 , 싸우고 악을 쓰는 사람들 탓에 일어난 먼지가 제멋대로 일렁일렁거리며 춤을 추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태어난  딸아이다. 내가 태어나던 날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  밤새 술을 마셨다고 한다. 정말 소름 끼치는 이야기들이다.

  내가 어렸을 때 전라도  순천에 계시던 외할머니가 가끔 부산 우리 집에 다니러 오시면 엄마와 외할머니는 그렇게

죽일 듯이 싸웠다.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엄마는 악을 쓰며 자기 엄마에게 쏘아댔다. 한 열흘 계실 거라며 오셨다가 이틀이 안 돼서 할머니는 다시 가셨다. 매번  되풀이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할머니가 오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할머니가  오시면 되도록  동네 친구  집에서  놀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한 번은 할머니가 어떤 남자아이를 하나 데리고 왔다. 그리고 엄마와 한참을 얘기하더니 또 아빠와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아이를 양자 삼으라고 할머니가 데리고 왔음을 직감했다. 나는 엄마한테 울면서 싫다고 했다.  결국 며칠  있다가 아이를 데리고 할머니는 다시 돌아가셨다.

  사람들이  엄마에게 자식은 어떻게 두었냐고 물으면 엄마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쓸데없이  딸들만 셋이에요. 혹시 나중에 사위라도 잘 봤으면 하고 바랄  뿐이죠 "라고.

나는 창피하고 또 창피했다.  내가 여자아이로 태어난 것이 커다란 저주인 것만 같았다.

  쓸데없는 딸들 중에서도 최고로 시시한 존재인 막내 딸아이.  그게 나였다.  큰 언니는 공부를 잘해서  엄마의  어깨뽕  역할을 해주며 칭찬을 받았고, 작은 언니는 몸이 약해서 다른 아이들처럼 또 하늘나라로 일찍 갈까 봐 언제나 챙김을 받는 존재로 자리매김했지만 , 난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  바람에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비닐봉지 같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안에 뭐가 들었을지 궁금해하지도 않는. 그래도 나는 그럭저럭 남들처럼 줄 서서 학교 가고 취업하고 결혼도 했다.

  우리 세 자매는 결혼 후  모두 아들을 낳았다. 드디어 저주에서 풀려났을까? 백설공주  목구멍 속의 사과는 튀어나온 걸까? 이제는  외할머니도 엄마도 모두 돌아가셨고 더 이상 아들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나는 왠지 아직도  비닐봉지를 쓰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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