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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숙 Apr 06. 2023

추억의 기록 (변소 청소)

      세 번째 이야기 1980년 4월


    이제 가까스로 만 여덟 살이 되는 우리 집 꼬마도 벌써 삼 학년에 올랐다. 삼 학년부터는  제법 수업도 늦게까지 하고 한 주일에 사흘씩이나 도시락을 싸 갖고 다닌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라고 자칫하면 응석받이가 되거나 의존심이 커질까봐 내 나름대로 단단한 교육의 주관은 세워 두고 있다. 일부러 가까운 사립학교를 놔두고 소위 삼류라는 학구 내의 공립으로 꽤 먼 길을 걷거나 만원 버스에 시달려 가며 다니도록 한 것도 그런 뜻에서였다.

  남들과 함께 변소 청소도 제 손으로 해 보고 자잘그레한 교내 작업도 함께 해 가면서 근로의 정신과 애교심, 협동심도 은연중에 길러지는, 정말 평범하고 건실한 아들로 자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데 웬일로 아이가 학교에 가는 것이 지겹다고 했다. 평소에 과묵하고 대체로 신중한 아이여서 나는 자못 당황했다.

  이유는 변소 청소 때문이란다. 여섯 명의 사내아이들이 일 주일간 여섯 칸의 변소 청소를 맡았다는 것이다. 같은 반 같은 분단의 사내아이들이니 한 사람에 한 칸의 변소가 배당이 된 셈이다. 게다가 우리 아이의 변소엔 겨우내 말라붙은 똥덩이가 크게 붙어 있어서 혼자서 아무리 애를 써도 꿈쩍도 안 한다는 것이다. 아직 추위가 덜 가신 계절이어서 얼어붙은 채 말라 있는 똥이 쉽게 떼어지지 않나보다.

  나는 문득 어제 저녁나절에 그 애가 화살처럼 뾰족하게 긴 나뭇가지를 깎던 일을 생각했다. 오늘 아이는 그것을 가지고 가서 아무리 찔러가며 밑에서부터 도려내어도 역시 실패를 했다고 한다. 돌멩이를 가져다가 쪼그리고 앉아서 두 손으로 밀어봐도 안 되고 이마에선 땀이 수없이 쏟아졌다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호소를 했다.

  물을 부어 두면 내일은 쉬울 거야.“

  나는 일부러 무표정하게 대답해 봤다. 그렇지만 속에선 그 애보다 더 천불이 나고 찌르는 아픔이 솟구쳤다. 

  “물은 안 돼. 선생님이 변소 청소엔 물을 쓰지 말랬어.”

  아이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청소 때마다 물을 부어대면 그것도 큰 문제다.

  “다른 아이들은 그래도 모두들 제 힘으로 해결하잖니?”

  “다른 애들은 운이 좋아서 비교적 깨끗해. 쓸어내면 되지만 내가 맡은 건 그 모양이야.”

  아이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내가 동정의 말을 한 마디만 한다면 그 애는 곧 울게 틀림없었다. 사실은 그 애 못지않게 내 마음도 아팠다. 그 애가 쪼그리고 앉아 시커먼 대변 덩어리를 떠밀어 보려고 애쓰는 모습을 상상한다는 것은 더 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이게 어떤 귀한 아들인데....’

  “그 뿐이 아니야. 반장이 변소 검사를 하고는 더럽다고 일러바쳤어. 나는 방과 후에 남아서 다시 했지만 별 수가 없었어. 엄마, 나 학교 안 갈래.”

  드디어 아이의 눈에서 굵은 방울이 툭 소리를 내며 무릎에 떨어졌다.

  ‘딱해라. 얼마나 고생을 했니? 그래.’

  나는 그런 소리가 목구멍을 꽉 메웠다. 왈칵 아이를 가슴에 껴안아 위로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지만 꾹 참았다.

  “내일만 더 참아 봐라. 엄마도 혹시 좋은 수가 없을까 생각해 볼 테니.”

  아이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아이의 고통스런 호소가 가슴에 남아서 뼈를 녹이는 것 같았다.

  어찌할까? 담임을 찾아가서 어색한 몸짓으로 봉투 하나 건네면서 죄송하지만 우리 아이를 변소 청소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구차스런 부탁을 하는 내 모습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그 비굴한 표정하며.....  나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가 몸에 병이 있다고 해 볼까? 병든 아이를 그런 청소를 시키진 않겠지? ’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창이 뽀얗게 밝아 오도록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낸 뒤 서둘러 나섰다. 긴 브러쉬를 사고 꼬챙이를 들고 학교로 향했다. 공부시간이라 조용한데 나는 대뜸 화장실로 갔다. 도무지 어떤 것이 우리 아이의 담당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차례차례 문을 열어보았다. 고약한 악취 때문에 헛구역질이 오르다 못해 얼굴엔 벌겋게 열이 올랐다. 그리 깨끗한 것도 없고 모두가 비슷비슷한데 그 중에서 나는유독 더러운 변소를 간신히 찾아냈다.

  이게 우리 아들놈의 변소려니 생각하니 그 때까지 역겹던 것조차 다 사라지고 오히려 반가워서 나는 엎드려 그것들을 치웠다. 간신히 다 했다 싶을 때 벨소리가 들렸다. 브러쉬를 들고 나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이마엔 땀이 솟고 가슴이 뛰었다.

  오후 늦게 아이가 왔다.

  “엄마, 이상하게 내 담당 변소가 깨끗해 졌어. 오늘은 청소가 너무 쉬웠어.”

  아이는 좋아서 입을 벌리고 웃었다. 그 애의 고운 치열을 바라보며 나는 안도의 기쁨으로 가슴이 떨렸다. 그런데 웬일인지 내 눈에선 화끈거리며 눈물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었다.

  “너희 선생님이 어제 오후 늦게 손수 청소를 하신 거야. 반장이 검사를 했어도 나중엔 선생님이 확인을 하게 돼 있거든. 이건 네 힘으로 곤란하겠다 싶으니까 손수 해 놓으신 거야. 나도 어렸을 적에 선생님이 아무도 몰래 변소 청소하시는 걸 본 적이 있어.”

  내 말을 듣는 아이의 얼굴이 숙연해 지고 있었다.

  “엄마, 맞았어. 어쩐지 오늘은 선생님이 변소 청소를 일부러 물어보시잖아?”

  나는 잠든 아이의 일기장에서 고마우신 우리 선생님이라는 제목을 망연히 바라보면서 쓰게 웃었다. 아이의 이마는 촉촉이 땀에 젖어 있었다. 꿈에서도 그 지겨운 변소 청소를 하지나 않는지... 끝




  그 시절엔 그랬다.

  도시락도 싸와야하고 화장실이 아닌 변소청소도 아이들이 해야 했다.

  재래식 변소가 무서워서 갓 입학한 일 학년 아이들은 참고 참다가 실례를 하기도 했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던 70~80년 대의 우리나라 모습이다.

  지금 우리나라 아이들이 상상도 안 될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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