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의 또 다른 기록
~ 이미 내린 비로 온통 길바닥은 질척질척 한데 오늘도 그치지 않고 가랑비가 연해 오고 있다.
아이들은 우산을 채 가누지 못하여 교실 바닥이 자주 물투성이가 되었다. 나는 신경을 써서 교실 뒤편에 자주 갔지만 여전히 깨끗하질 못했다.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을 하교 시키려고 교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군복차림의 청년 하나가 서 있다가 후딱 내게로 향해 인사를 하였다. 그는 아마도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공부가 끝날 때를 기다리면서.
“김 순자 오래비입니다. 선생님께서 어린 것들 데리고 수고가 많으십니다.”
무척 어른스러운 인사말이었다.
너무 뜻밖이라 나는 잠시 김순자 오빠라는 그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첫 날부터 나에게 강한 인상과 묵직한 문제를 던져오던 그 김 순자의 이미지가 오빠라는 사람의 인상과 잘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동생이 공부를 아주 못해서.....”
그는 뒷머릴 극적이며 먼저 또 입을 떼었다.
아이들을 보낸 후 교실에서 그와 마주 앉은 나는 순자에게 들은 집안 사정 이야기를 대충 되물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을 듣는 사이에 아주 가벼운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울러 내 심정은 덥석 그 청년의 손이라도 잡아주며 격려해 주고 싶단 충동에 사로잡혔다.
바로 어제 순자 오빠는 제대를 했다고 한다.
“집에 와 보니 말이 아니죠. 얘는 제가 군대 간 사이에 입학을 해서, 학교 다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줄은 몰랐습니다. 선생님, 정말 이렇게 공부 못하는 동생을 맡겨 죄송합니다.”
말을 하는 순자 오빠의 눈과 코, 양 볼, 움푹하면서도 작은 눈매. 나는 속으로 어쩜 저렇게 순자와 닮았을까 자꾸만 느꼈다.
제대라고 해 온 고향의 집에 닭 잡아놓고 반겨주지는 못할망정 실명에 가까운 부친과 정신이상의 엄마와 연로하신 조모, 그리고 문자 미 해득의 여동생.
그의 어깨가 너무나 무거울 거라는 생각에 자꾸만 그가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복 등 뒤에 쪼르르 맞고 온 빗물의 얼룩을 바라보며 나는 그 청년이 측은해서 내 마음도 무겁고 아팠다.
“그래도 이젠 제가 왔으니 됐습니다. 이젠 제가 왔으니 염려 없습니다. 그동안 아, 정말 집 꼴이 엉망이었죠.”
자꾸만 계면쩍어 하는 순자 오빠에게
“순자 오빠는 참 훌륭하세요. 정말 장하십니다. 어쩐지 마음이 든든해지네요. 제가 별 도움은 못 되겠지만 간혹 연락을 주시거나 또 이렇게 찾아 주세요. 힘드신 이야기 있으면 제가 열심히 듣겠습니다. 마음이라도 나누고 싶네요.”
나는 거듭 그가 참 장하고 훌륭하다고 감탄했다. 그러면서도 한 가닥 불안은 이 거친 사회 속에 저렇듯 건실한 청년이 열심히 해서도,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쉽사리 극복되는 않는 가난과 역경 속에 자칫 희망을 잃거나 마음 약해지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었다.
나라를 지키는 임무에 참여해야 하는 사명감으로 거의 파탄에 이른 가정을 두고 이때껏 맘 조리던 그가 이젠 안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양 어깨만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 일이 너무나 많고, 그가 짊어져야 하는 무더기의 역경이 그의 앞에 현실로 도사리고 있다. 과연 그의 힘으로 그 역경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그러나 저렇게 자신만만해 뵈는 표정, 성실하고 순박한 그의 말. 그 속에 정말 안도감이 든다.
훌륭한 오빠를 둔 못난 계집애, 순자. 나도 뭔가 조그만 협조를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차근차근 생각해 봐야겠다.
우선은 그 애에게 다만 한 글자라도 눈을 띄워 주자.
사랑이 고픈 이 아이에게 내가 사랑으로 글자를 익혀주자. 이 훌륭한 오빠를 위해서라도 내가 해야겠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가정 형편과는 무관하게 거의 대부분 군 복무를 해야 했고 복무 기간도 무척 길었던 것 같다. 현재로선 받아들이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현실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