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서는 거 싫어하는데 관심받는 건 좋아하는 당신을 위해
나는 발표가 싫다.
남들 앞에 나서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차라리 차분하게 글을 쓰지, 갑작스럽게 말로 무언가를 조리 있게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아! 그때 그 말을 했어야 했는데.
게다가 발표를 하며 나의 말투와 표정과 옷차림과 외모와 일거수일투족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상황이 불편하고, 혹시나 실수해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까 봐 지레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해지곤 한다.
재밌는 점은 내가 타고나길 관종으로 태어났다는 점이다.
유치원에서 아주 크게 성탄절 행사를 했는데, 내가 손을 번쩍 들어 자원해서 진행자를 맡은 적이 있다.
준비 과정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손을 든 그 순간만큼은 기억에 아주 생생하다. 비디오테이프에 남아 있는 무대 위 내 모습에서도 어떠한 떨림이나 불안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목소리도 크고, 외우는 것도 곧잘 하고, 눈치 안 보고, 쭈뼛거림 없이 할 말 다 하던 내가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
특별히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자라며 대중이 타인에게 냉정한 모습들을 자주 마주하곤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이미 나는 선생님이 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 나는 선생님에게 기왕이면 칭찬받고 예쁨 받고 싶은 평범한 학생관종이었는데, 다른 친구들은 거의 모든 선생님들을 뒤에서 욕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10살도 안 된 나이에 벌써 나는 ‘남들 앞에 나서는 직업은 안 먹어도 될 욕을 먹는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놓고는 교직 이수해서 정교사 2급 자격증을 딴 게 유머)
대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발표 과제가 있는 수업은 최대한 다 피했지만, 과목명에 토론과 발표가 들어가는 필수 교양 과목을 무슨 수로 피하겠는가. 성적은 A+가 나왔지만, 마치 익명 댓글처럼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서 짧은 글로 받았던 피드백이 상처가 됐다. 좋은 반응도 물론 있었지만은, 일부는 ‘너나 잘하세요’라고 되갚아주고 싶을 만큼 말넘심이기도 했다. 아니, 지는? 이렇게 날 욕할 정도로 기깔나게 발표 잘하는 애는 아무도 없던데? 아마도 나는 모두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피드백을 남겼는데 예상치 못한 돌직구를 돌려받아서 잠시 화가 났던 것 같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악플(?)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즉, 발표의 요점이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 같은 말을 듣고도 내 의도에 공감해 준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닌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발표 첫 부분에 떨려서 자연스럽게 대본에 눈이 먼저 간 점도 지적을 받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들은 나처럼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지 않고 나름의 건전한 비판을 해준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후 발표에서 도움이 되기도 했다. 아, 처음에는 무조건 청중의 눈을 보고 시작해야겠구나. 발표할 내용의 핵심을 누가 들어도 이해할 수 있게 전달해야겠구나.
여전히 배민 리뷰에조차 싫은 소리를 못 쓰는 나에게 비판은 어렵다. 인정할 건 인정하는 스타일인데도 그렇다. 나는 그냥 내가 좋은 말만 듣고 싶은 만큼 남들에게도 좋은 말만 해주고 싶다.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주고 두루두루 잘 지내고 싶다.
자, 욕을 먹기 싫으면 어떻게 하면 될까? 답은 간단하다. 욕을 안 먹을 정도로 잘하면 된다. 객관적으로 욕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면 된다.
다행히 신입생 때 들은 발표 수업 이후 전공 수업에서 발표할 때는 목소리가 떨릴지언정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럭저럭 전달했던 것 같다. 기획을 통해 발표의 기승전결 구조를 짜는 방법을 어느 정도 익혔다. 여전히 최대한 발표를 피했고, 이불킥 하고 싶은 순간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며 훨씬 더 괴로운 일이 생겼다. 남들 앞에 나서서 교육하고 발표하는 게 나의 업무 중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무려 발표가 나의 주요 업무! 거의 10년을 미리 떨려하고 빨리 행사가, 교육이 끝났으면 좋겠다 하며 보내게 된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욕먹기는 싫으니 최선을 다해왔지.
그러다 발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최종 면접을 통과했다.
신입 직원 OT 때에도 내가 대표로 발표를 했다.
반년 정도 지나 업무적으로 발표를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이번에도 나의 목표는 욕 안 먹기.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넷플릭스 흑백요리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즐겁게 봤다. 쟁쟁한 백수저, 흑수저 셰프님들을 보고 있자면 정말 존경심이 절로 든다. 요리 실력도 실력이지만, 기획하고 스토리를 풀어가는 과정과 결과에 한 분 한 분의 인생이 오롯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NTJ의 현신인 나폴리 맛피아 권성준 셰프님을 보면, J만 같은 나는 정말 부럽다.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 자신만만한데 진짜 잘해서 칭찬 밖에 할 말이 없네? 본인이 그만큼 미쳐서 노력해 왔음을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기에, 그리고 그 노력을 구구절절하게 말로 설명할 필요 없는 뛰어난 결과를 보여줬기에 가능한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에드워드리 셰프님이 서툰 한국어로 요리를 설명하실 때의 또 다른 감동이 있었다. 사색과 연구, 연륜과 창의력이 만나는 자리에 진짜 존경스러운 요리가, 요리사가, 이야기가 있었다. 유창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다 전달되는 것들 말이다.
흑백요리사를 보신 분들은 알 것이다. 귀신같이 프레젠테이션 잘하는 최현석 셰프님도, 내향형 I가 100%여서 근데 이제 바질을 곁들인 최강록 셰프님도 요리를 정말 잘하시고, 각자의 요리로 인정받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 모두가 스티브 잡스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다 스티브 잡스처럼 프레젠테이션을 기깔나게 한다면 지금까지 그의 발표가 회자되지는 않을 것이다.
서론이 매우 길었다.
여전히 발표를 싫어하고 기회만 되면 피하려는 나도 이제는 받아들인다.
“월급 받으려면 해야지.“
직장에서 월급은 받고 욕은 안 먹는 나의 발표 스킬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1. PPT는 발표자가 직접 만든다.
발표 내용을 정리하며 의도와 주제를 소화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화려한 효과는 필요 없고 깔끔한 폰트, 도형, 사진 정도면 충분하다. PPT 자료를 공개적으로 어디 업로드할 거 아니면 미리캔버스에서 만들고, 어디 업로드할 거면 폰트 저작권 등 한 번 더 체크하자.
2. 대본을 쓰고 소리 내어 연습한다.
실전처럼 연습을 해봐야 실전에서도 나온다. 고등학교 때 연극부 활동을 했던 게 무대공포증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됐다. 발표도 일종의 연극이라고 생각하자. 근데 이제 일인극인. 다만 대본을 그대로 외워서 줄줄 읊거나 보고 읽으면 안 된다! 면접도 발표도 마찬가지다. 잊어서는 안 되는 키워드를 PPT에 적어둔다 생각하고 다양한 레퍼토리를 연습해 보자.
3. 첫인상이 반이다.
격의 없는 자리에서는 신나는 데이식스 노래 틀고 농담하면서 MC의 자질을 보여주는 것도 매우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딴 거 없고 정장 입은 어른들 앞에서 발표할 때에는 무난한 것이 가장 좋다. 오늘 무엇을 할 건지 한 문장으로 인사드리고, 바쁘신 와중에 자리를 빛내주신 분들께 감사를 표하자.
4. 나를 자각하자.
영상으로 내 모습을 촬영해 보면 좋은 게, 나도 몰랐던 내 습관들이 보인다. 나의 경우 빔 프로젝터로 영사된 PPT 화면을 보면서 설명할 때 자꾸 고개와 몸을 틀고 흔들고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어서(?) 자세를 꼿꼿이 바르게 하고 기본적으로 청중을 보되, 내 앞에 놓인 화면을 눈알만 굴려서 보고 설명하는 방법을 택했다. 음, 하면서 자꾸 반복되는 말버릇이 있다면 그 부분도 신경 쓰고, 목소리 톤이나 표정도 한 번쯤은 점검해 보자.
5. 발표의 주인은 청자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일인극이 아니라 관객조차 없는 방백이다. 듣는 사람이 무엇을 듣고 싶을까에 초점을 맞춰보면 좋겠다. 이런 게 궁금하겠지? 에서 시작해서 핵심만 간결하게 전달해 보자.
6. 내가 짱이다.
우리 소심한 관종들에게 꼭 필요한 마인드다. 결국 답은 하나다. 떨지 않고 여러 사람 앞에서 의견 전달을 하려면 내가 나에게 확신을 가져야 한다. 처음에는 덜덜 떨면서 실수도 후회도 하겠지만, 하면 할수록 는다. 나처럼 억지로 괴로워하면서 해도 결국 경험이 쌓이면 더 잘하게 된다. 세상 모든 일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나와 당신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