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이 아닌 '진짜 나 자신'을 위해
다시 비가 내린다. 나무초리 끝에 걸린 빗방울들이 투명한 필라멘트 전구처럼 반짝인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안에 들어서자, 진한 커피 향이 가장 먼저 나를 반긴다. 언젠가 비 오는 날엔 향이 더 짙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습도가 높으면 물분자에 냄새분자가 달라붙어 향이 한 곳에 머물기 때문이라고. 코에 집중된 감각을 느끼며 옷을 털어내는 사이, 여과된 커피 향이 밀도 있게 채워진 부엌에서 신랑이 고개를 내민다. “이 스푼은 정말 잘 산 것 같아.” 두어 달 전에 산 계량스푼을 내려다보며, 아침마다 또 그 소리다. 고심하며 스푼을 고르던 그의 손과 보석을 감별하듯 신중하던 미간. 그 모습을 다시 떠올리자 바람 빠지듯 코웃음이 절로 새어 나온다.
마트에 갈 때마다 주방용품 코너를 서성이던 신랑이었다. 우리 집 커피 담당인 그가 찾는 것은 원두 양을 가늠할 때 쓸 계량스푼. 최근 원두로 커피를 내려 마시면서부터 스푼 타령이 시작되었는데, 좀체 자신에게 잘 맞는 것을 찾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신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작은 물건 하나를 사는 데에도 절대 대충 고르는 법이 없다. 플라스틱, 나무, 스테인리스 등 다양한 재질의 볼록하거나 네모난 스푼들이 진열대 앞에 선 그를 혼란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적당한 것을 선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이거다! 이거 사야겠어.” 그날의 결연한 목소리와 오늘의 뿌듯한 미소를 포개어 놓고 보니, 사이다급 해피엔딩이 따로 없다. 고민한 만큼 딱 맞는 물건을 만나 만족스럽게 사용하고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예전의 나라면 뭐 그런 거 고르는 일로 시간 낭비냐 잔소리를 보탰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느긋하게 그를 기다릴 수 있다.
20대의 나는 계량스푼을 살 생각조차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밥숟가락으로 어림잡아 쓰면 되지 뭐 굳이 그걸 사, 하면서.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것에는 돈을 아끼고 꼭 필요한 데에만 지출하자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알뜰살뜰함을 지향하며 사소한 불편함 같은 건 눈감아 버리곤 했다. 당시의 내게 ‘꼭 필요한 것’은 주로 나를 치장하는 물건들이었다. 옷, 신발, 가방 등 남들 보기에 그럴듯하게 나를 포장해 주는 것들. 계절마다 비슷한 새 외출복을 여러 벌씩 사면서도 집에서는 무릎이 늘어지고 해진 추리닝 바지 두어 벌을 돌려 입었다. 도자기로 된 냄비 받침 귀퉁이에 이가 나갔는데도 기능상 큰 문제가 없다며 무시했고, 그러다 마음에 걸리면 손에 잡히는 대로 다 쓴 공책 위에 냄비를 내어 올렸다. 밑창이 다 떨어져 너덜해진 실내슬리퍼가 발걸음을 걸리적하게 붙잡아도 ‘뭐 당장 못 쓸 정도는 아니니까’ 모른 체했다.
그렇다고 신경 쓰이지 않았던 건 아니다. 무심코 집어든 노트 앞면에 찌개 국물이 말라붙어 있는 걸 보면 내 몸에 얼룩이 묻은 것처럼 괜스레 불쾌해졌다. 퇴근 후, 두 발을 위한 안식처가 겨우 실밥이 튀어나오고 앞코가 벌어진 슬리퍼라는 사실에 시무룩해지기도 했다. 사소해서 방치했을 뿐인데 그럴수록 자꾸 나 자신이 더 사소해지는 기분이 든 건 왜일까. 소중한 일상이 시작되는 나만의 공간에서 불편한 요소들을 버텨내 가며 대충 시작하고 마무리 짓는 하루. 그 속에서 어쩐지 자꾸 중요한 것이 새어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즈음 친구 M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친구들 사이에서 컵받침 컬렉터로도 유명한 M의 주방 정리대에는 실리콘, 우드, 도자기 등 대충 봐도 십여 가지가 넘는 컵받침들이 채워져 있었다. 구석엔 M이 뜨개질로 직접 짠 꽃잎 모양의 티코스터도 있었는데, 언젠가 가방에서 알록달록한 털뭉치를 꺼내 친구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이후로 뜨개질과 바느질에 흥미가 생긴 M은 기분이 울적할 때마다 마음에 드는 무늬의 천을 떼다 하드보드를 덧대어 식탁 매트를 만들고, 가장자리를 시침질하여 테이블보로 쓰기도 한다고. 나름의 취향이 곳곳에 묻어 있는 단정한 집안을 엿보는 사이, 내 앞에 나뭇잎 모양의 컵받침과 옅은 베이지빛 머그잔, 봉긋한 접시에 소담히 담긴 쿠키가 놓였다. 허물없는 사이지만 정갈한 다과상이 내어지니, 왜인지 중요한 손님이 된 것 같아 흐뭇해졌다. 그런 기분을 전하자 M이 답했다. “그렇지? 난 혼자일 때도 이렇게 해. 내가 나를 대접해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더라고.”
내가 M을 좋아한 이유는 그런 것에 있었다. 명품 가방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냐 허세 부리는 주변인들 틈에서도, 깨끗한 캔버스백에 정돈된 파우치와 책을 넣어 다니며 아랑곳 않던 그녀. 그건 단순히 돈을 아끼는 것과는 다른 의미일 것이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고고함이랄까. 컵받침을 고르며 행복해하던 M의 미소와 자신을 똑 닮은 방에서 정성스레 스스로를 대접하는 모습. 그런 장면을 그리다 보면, 내가 놓치고 있던 것들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보여지는 외면을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을 돌보는 소비가 필요하다는 것. 그건 어떤 여유로움이 수반되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비중을 달리하면 되는 일이라는 것도.
내가 외면해 온 ‘사소함’들은 실은 내 일상을 균질하게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회사에서 이리저리 치어도 도돌이표처럼 돌아와 웅크리면 편안하게 나를 감싸주는 것들이 필요했다. 집 밖의 일에 치중하느라 집 안의 것을 소홀히 하는 건, 외면에만 집중하고 내면을 홀대하는 것과 같았다. 어쩌면 얼룩진 공책이나 다 떨어진 슬리퍼가 거슬렸던 이유는 그게 마치 진짜 내 모습 같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비싼 옷, 비싼 화장품으로 아무리 가려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혼자서도 자주 미소 짓고 소소하게 즐거운 일상을 누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타인의 시선’을 위한 소비가 아니라 '진짜 나 자신'을 위한 소비가 필요했다.
이제 나는 보드라운 슬리퍼에 발을 넣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냄비 색에 맞추어 받침대를 내어 놓는다. 몇 달 전엔 노트북을 하거나 책을 읽을 때마다 자꾸 어깨 근육이 뭉치는 것 같아서 거치대를 하나 주문했다. 어찌나 만족스러운지, 삶의 질이 달라진 느낌마저 든다. 자꾸 소리가 나는 안방 문 경첩에는 얇은 스펀지를 사서 덧대었다. 새벽에 방문을 열고 나올 때마다 삐그덕 소리 때문에 아이들이 깰까 신경 쓰였는데 고민이 해결되어 마음도 가뿐하다. 옷장과 화장대 위에 비슷비슷한 물건들을 채워 넣는 대신, 나와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것들을 돌보고 내 몸의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는 데에 비용을 들인다. 그렇게 가꿔나간 순간들은 참고 버티는 하루가 아닌, 누리고 느낄 수 있는 하루가 되어 나를 맞이한다.
“넌 요즘 널 위해 뭘 해주니?”
“넌?”
“나 이거 샀어. 장작 거치대.”
“왜 샀어, 그런 걸?”
“날 위해 그냥 샀어. 나 이거 살 때 엄청 행복했다. 너는 뭐 해주는데? 널 위해 너한테 뭐 해주냐고.”
“이렇게 너랑 같이 밥 먹는 거. 너랑 같이 밥 먹고 커피 마시는 거. 난 나한테 그거 해줘.”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나왔던 장면이다. 이 대사가 마음에 들어, 한참 동안 반복해 봤던 기억이 난다. 캠핑 마니아인 여자주인공이 장작 거치대를 사며 홀로 행복했다는 모습이 반가워서다. '슬기로운 소비생활'을 하시는군, 하고 웃으며 나 역시 다짐했더랬다. '날 위해 그냥 샀어. 나 이거 살 때 엄청 행복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고. ‘넌 요즘 널 위해 뭘 해줘?'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 사람이 되자고. 소비의 대상은 물건일 수도 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날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깨닫는 것, 거기서부터가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판단이 모호해질 땐 내 삶의 가장 귀한 손님은 나 자신임을 상기한다. 그리하여 나를 잘 대접하는 내가 되기를. 타인의 시선보다 나를 바라보는 내 시선 끝에 행복한 미소가 묻어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다면 슬기로운 소비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