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마시멜로 챙겼지?”
“거기에 집게랑 가위도 있다고 했나?”
여행 출발 10분 전. 어른이나 아이나,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꼼꼼한 성미가 발휘되는 아침이다. 연휴를 맞아 도심 외곽의 캠핑장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처음 하는 캠핑에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어수선하던 발걸음들. 빠진 짐이 없는지 분주히 확인을 마치고, 차 안에서 먹을 커피와 간식까지 세팅한 후, 비로소 가라앉은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텍사스의 너른 개방감을 만끽하며 들판을 통과하다 보면, 광활한 목장 안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와 말, 거대한 바람개비 모양의 풍력 발전기를 만날 수 있다. 그렇게 여유로이 네 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곳은 키 큰 나무들로 우거진 숲 속 캠핑장. 오두막처럼 장식된 작은 컨테이너 하우스와 야외용 의자 4개, 그릴이 마련된 캠프사이트가 아늑하게 우리를 반겼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컨테이너 한 면을 가득 채운 큼지막한 통유리창에 가장 먼저 시선을 빼앗겼다. 그 너머로 반짝 흔들리던 가을빛. 아이들이 “우와, 우와!” 신난 목소리로 좁은 벙커 침대를 오르내리며 탐색하는 사이, 나는 신랑과 함께 짐을 빼어 냉장고에 먹거리를 채웠다. 짧은 정리를 마치고 노란 햇살이 내려앉은 식탁에서 한숨 돌릴 즈음, 그제야 구석에 놓여 있던 웰컴 노트와 손바닥 크기의 나무 상자에 시선이 갔다. 이건 뭐에 쓰는 물건일까, 자세히 보니 뚜껑 위에 짤막한 메시지가 새겨져 있었다. “Cellphone Lockbox: For a true escape, forget your phone inside.” 휴식이 콘셉트인 이 캠핑장에서, 온전한 해방을 위해 핸드폰을 잠시 상자 안에 넣어두라는 의미였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재빠르게 일어나 캠핑장 곳곳을 사진으로 남기고, 핸드폰을 ‘방해 금지 모드’로 바꾼 후 상자 안에 넣었다. 이제 좀 제대로 쉬어 볼까, 작은 전자기기 하나 떨구었을 뿐인데 왜인지 몸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가붓해진 마음으로 오두막을 나온 우리는 근처 트레일 코스를 둘러보기로 했다.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닿았던 넓은 길에서는 둘씩 손을 잡고 걷다가, 다시 좁은 길이 나오면 기차처럼 한 줄로 서서 앞사람의 발끝을 따라갔다. 양 옆으로 드리워진 나뭇가지에 요리조리 몸을 피하기도 하고, 터널처럼 맞닿은 머리 위 나뭇잎에 쭈욱 손을 뻗어보기도 하면서. 우리가 사는 곳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붉은 단풍도, 자주 보던 키 작은 선인장도, 마주하는 모든 것이 그저 새롭고 반가웠다. 앞서가던 아이들은 작은 꽃 하나라도 발견하면 호들갑스럽게 나를 불렀고 그러면 우리는 들꽃 주위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앉아 ‘이런 게 여기서 어떻게 살지?’ 한참을 들여다봤다. 떨어진 나뭇잎을 차내듯 거칠게 휘젓는 큰아이 발걸음에 힘없이 허공으로 솟아오르던 갈색 낙엽들. 생각해 보면 대단한 경치도 아닌데 그 오후의 풍경들은 유난히 깊고 선명하게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다.
실은 트래킹 초반에, 나는 핸드폰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잊고선 자주 주머니를 뒤적거리곤 했다. “얘들아, 여기 서봐, 사진 찍자.”, “한 번 더, 됐어. 가자!”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인증샷 찍을 장소를 먼저 찾고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다시 찍고, 그러느라 시간이 지체되면 아쉬움으로 마감하는, 그런 과정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대신 이번엔 포토타임이 사라진 자리를 선명한 자연으로 채워 넣었다. 골똘히 관찰하고 오롯이 집중하면서. 여행지에서 사진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숲 속에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다시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사진으로 남길 수 없으니 마음속으로라도 새겨야겠다는 무의식이 작용한 것일까. 트래킹을 마치고 오두막으로 돌아와 옷을 터는데, 자연을 담뿍 맞은 듯 온몸에서 흙냄새와 풀향기가 툭툭 떨어졌다.
트래킹을 마친 우리는 서둘러 장작을 끌러 불을 피웠다. 요 며칠 비가 와 나무가 축축해진 탓인지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캠핑 초보인 우리들이 허둥대는 사이, 급기야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 가까스로 붙은 불 위에 허겁지겁 그릴과 고기를 올렸지만 금방 거세진 빗줄기로 하는 수 없이 야외 식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그라진 불씨 앞에서 길따란 나무 꼬챙이와 마시멜로 봉지를 든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던 아이들. 그 순간, 참지 못하고 오두막에 들어간 신랑이 핸드폰을 꺼내 나와서는 재빨리 아이들 사진을 찍었다. “이건 남겨야지 크크.”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작은아이와 입술이 불룩 튀어나온 큰아이의 불평스러운 표정. 억지로 연출한 장면이 아닌, 영상처럼 생동감 있게 포착한 순간 이어서일까. 아이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게 찍은 사진은 꺼내 볼 때마다 우리의 웃음 버튼이 되어 주었다. "이런 사진은 나중에 시간이 많이 지난 후 꺼내 봐도 생생하게 그 순간이 떠오를 것 같아." 내 말에 신랑이 맞장구쳤다. "그렇지, 이런 게 진짜 추억의 순간이니까."
이번 캠핑에서 우리 가족이 가장 기대했던 것은 캠프파이어와 야외 바비큐였다. 그날 밤, 우리는 두 가지 모두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채 첫 캠핑을 끝내고 말았지만 나는 어쩐지 아쉽지 않았다. 미션을 수행하듯 해내야 하는 일들보다는 ‘쉼’에 초점을 맞춘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핸드폰을 나무 상자 안에 집어넣기로 결심한 순간부터였다. 억지스럽게 시간과 계획에 맞추지 말고, 무엇이든 자연스럽게 마주치고 받아들이자고 다짐했다. 그래서일까. 갑작스레 찾아온 빗줄기도, 생각보다 더 고요하던 숲의 단조로움도, 우왕좌왕하느라 더 빨리 맞이한 어둠도, 그저 그 자체로 편안한 쉼의 발판처럼 느껴졌다. 잠시 앉았다 가라는 듯 낮게 웅크린 동그란 쉼표(,)처럼, 그 밤 우리 네 식구는 작은 오두막 안에 나란히 앉아 자연에 귀를 기울였다. 적막을 가르는 타다닥 빗소리와 위잉 바람 소리,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나뭇결의 흔들림을 느껴가며. 그렇게 가만히 있다 보면 절로 몸이 노곤해지면서 제대로 쉬고 있다는 만족스러운 기쁨이 차올랐다. 그저 잠시 멈추었을 뿐인데, 조금 더 멀리 보며 귀를 기울였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에너지가 채워지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생각해 보니 그런 시간이 참 오랜만이었다. 끊임없이 핸드폰을 체크하고 무언가를 검색하며,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을 좀체 멈추기 쉽지 않던 일상. 그러고 보면 휴식이란 별 거 아닌 듯하면서도 일상에선 쉽게 할 수 없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까만 어둠 속에서 하룻밤 꿀잠을 자고 맞이하는 숲 속의 아침. 빗소리에 한두 번 깨었던 것도 같은데 이상하게도 몸이 개운했다. 챙겨 온 빵과 커피, 핫초코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후 밖으로 나가 젖은 낙엽 위를 다시 한번 걸었다. 어느새 숲에 익숙해진 것인지 돌멩이를 모아 쌓고, 나뭇가지로 땅에 그림을 그리며 나름의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짐을 챙기는데, 냉장고 위에 놓여 있던 체크아웃 리스트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Take one more breath before you go.” 차에 올라타기 전, 이곳을 떠나는 마지막 의식처럼 우리는 나란히 서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비 온 뒤라서 인지 전날보다 더 진해진 흙내음에 머리마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공기를 온몸 구석구석 저장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여러 번 숨을 들이켰다. 이 기분을 잘 간직해야지, 그러다 마음이 궂은날엔 이 맑은 기운을 조금씩 꺼내어 정화시켜야지 생각하면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큰아이가 말했다. “엄마, 별로 한 게 많은 것 같진 않은데 재밌었어요.” 어쩌면 ‘하지 않음’으로써 채워지는 것도 있다고. 아이는 아직 이해하지 못할, 나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은 그 말을 중얼거리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하늘엔 한 무리의 새들이 점처럼 모여들었다. 화살촉 모양으로 질서 정연하게 날아가다가 팽창하듯 흩어져 뒤로 물러서던 새들. 전깃줄 위에 까만 음표처럼 나란히 앉아 쉬다가 다시 하늘로 솟아오르던 모습. 정해진 방향을 따라 전진과 멈춤, 후진을 반복하는 그 모습에 홀로 의미를 부여해 본다. 기꺼이 멈추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금 나아가는 것. 결국 인생은 그런 과정의 반복이 아닐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