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윌렘스의 『내 토끼 어딨어?』는 ‘애착인형’에 대한 아이들의 정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그림책이다. 세 권짜리 시리즈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주인공 트릭시는 거듭된 실수로 자신의 애착인형인 꼬마토끼를 잃어버리고 만다. 작가는 주위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트릭시의 귀여운 투정과, 동심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른들의 노력을 특유의 위트로 따스히 담아낸다. 이 책을 유난히도 좋아하던 우리집 아이들은 토끼 시리즈를 읽을 때면 자신만의 애착 물건들을 팔에 안고 내 품 안으로 모여들곤 했다. 큰아이는 공룡 피규어, 작은아이는 리넨 이불. 생명이 없는 것에 기대어 온기를 나누는 어린 존재들에 덩달아 포근해지면서도, 한편으로 마음이 짠해져 두 아이를 더 힘껏 껴안아주던 밤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내게는 ‘애착’의 물건이 따로 없었다. 기억나지 않는 시간 너머 어딘가에서 끈끈한 유대를 쌓은 작은 장난감들을 잊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머릿속 선명한 조각들을 모아 종합해 보면, 나는 위안이 필요할 때 물건을 찾기보다는 홀로 공상하는 것으로 그 마음을 달래곤 했다. 사진으로만 보아온 지구 반대편의 거대한 호수, 하이디가 뛰어놀 것 같은 푸른 잔디밭, 아치형 창문과 잔꽃 무늬 벽지. 그러다 이따금씩 색연필을 꺼내 상상 속 풍경들을 그려, 제멋대로 이름을 지어 넣기도 했다. 유치 찬란한 명명 실력에 식구들 다 같이 모여 하하 웃던 저녁. 그런 시간이면 충분했다. 인형도, 이불도 필요하지 않았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 내게도 욕심내 꼭 가지고픈 것이 생겼다. 바로 문방구에서 팔던 동전 초콜릿이다. 하교 길 친구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장난을 치다가도, 문방구 앞에 다다르면 약속이나 한 듯 발걸음을 늦추고 멈춰 서곤 했다. 누구는 동전을 넣어 드르륵 반지를 뽑아 끼고, 누구는 반짝이는 스티커를 고르느라 한참을 서성였다. 친구들을 뒤로하고 내 발길이 향한 곳은 뽑기 기계도 학용품 상자도 아닌, 계산대 옆 진열대 앞이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통 안에 수북이 쌓여 있던 납작한 동전 모양의 초콜릿들. 한 개에 오십 원쯤 했던가. 초콜릿들은 빨강, 파랑, 진분홍, 금색 종이에 싸여 바스락 빛을 냈다. 그 앞에 서 있으면 혀끝에는 달콤함이, 코끝으로는 들큼한 향기가 솔솔 번져가는 것만 같았다. 플라스틱 통 바깥에서 핑크색 껍질은 어디 있나, 오늘도 금색이 가장 많네 하며 헤아리던 손가락. “이제 가자!” 이름 부르는 친구들 목소리에 그제야 발을 떼고 집으로 향하던 어린 날이 생생하다.
“문방구에서 파는 간식들은 불량식품이야.” 엄마는 초콜릿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엄마가 내게 동전 초콜릿을 서너 개씩 쥐어주던 날이 있었는데, 바로 감기약을 먹을 때였다. 어릴 땐 왜 그리도 알약 삼키는 것이 힘들었을까. 쓰디쓴 가루약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든 알약을 삼켜보려 애썼지만 물을 두어 컵씩 마셔대도 도무지 알약들은 꿀꺽 넘어갈 생각을 안 했다.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엄마는 숟가락 위에 곱게 빻은 가루약을 얹고 시럽을 부어 새끼손가락 끝으로 개어주었다. 두 눈 질끈 감고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빼기 무섭게 ‘으악! 너무 써!’ 호들갑을 떨던 나. 엄마는 그런 내 손바닥 위에 초콜릿들을 살포시 놓아주곤 했다. 반짝이는 포일 포장을 열고 초콜릿을 입에 넣으면 알약에 대한 두려움도 가루약의 쓴맛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만능 상비약처럼 하나, 둘 초콜릿을 아껴 모으기 시작했다.
기분이 울적할 때마다 꼭꼭 숨겨둔 초콜릿들을 하나씩 꺼내 먹었다. 수학 문제가 잘 안 풀릴 때, 친구와 다투었을 때, 이유 모를 뾰족한 감정이 마음을 뒤덮을 때. 그러던 어느 하루, 학원에서 돌아와 알맹이 없이 빈껍데기로만 가득 찬 서랍을 발견하고는 북받쳐 눈물을 쏟았던 오후를 기억한다. -범인은 오빠였다. 아무튼 오빠들이란.- 엉엉 울면서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속상해야 할까, 그깟 초콜릿이 뭐라고’ 어리둥절했지만 이상하게도 쉬이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초콜릿을 더 이상 모으지 않았다. 빼앗기지 않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기도 했지만 어느새 초콜릿 말고도 평온한 마음을 만들어내는 것들이 내 곁에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초콜릿’은 다양한 형태로 진화했다. 어느 계절에는 아름다운 멜로디로, 어떤 시기에는 화려한 색채의 자연으로, 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문장’으로. 그중 역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문장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문장들을 모아 나만의 공책에 담기 시작했다. 책에서든, 매체에서든, 아이들에게서든. 의미는 잘 모르지만 왜인지 멋지게 보이는 말들에서부터, 마음 깊은 출렁임을 일으킨 문장들까지. 그렇게 건져 올린 문장들을 찬찬히 살펴 읽다 보면 공허한 마음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데미안』)’라거나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은 거야. 네가 무엇을 고를지 아무도 모른단다. (영화 『포레스트검프』)’ 같은 익숙한 말들에 기대 생각에 잠기거나, ‘엄마, 까치러워. (까끌거려+간지러워)’ 같은 아이의 말에 미소 지으면서. 그리고 나의 문장들, 나의 글 안에 오래 머무르며 더 나은 글을 위해 고요히 투쟁한다.
한동안 나는 내가 잘 긁히고 쉽게 휘어지는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 스스로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글을 쓰면서 깨달은 것은 잘 긁힐지언정 깨지지 않고,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유연한 강도의 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더 이상 초콜릿이 사라졌다고 눈물 흘리지도, 누가 초콜릿을 빼앗을까 봐 전전긍긍하지도 않는다. 홀로 공상에 빠져 그림을 그리던 그 어린 날처럼, 무언가를 소유하지 않더라도 나는 다시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근래 들어 글이 잘 써지지 않아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막다른 길에 다다를 때는 쉼 없이 책을 읽는 게 나만의 방법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해결책은 뭐니 뭐니 해도 일단 쓰는 것일 테다. 노트북 앞에 힘없이 앉아 있는 내게 작은아이가 다가와 초콜릿을 내밀었다. 얼마 전 밸런타인데이에 친구들로부터 받은 작은 정성들이다. 오랜만에 한 자리에서 초콜릿 다섯 개를 몽땅 해치웠다. 초콜릿은 달콤했고, 아이의 응원 덕에 이 글을 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