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얼거리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단어들이 있다. 햇살, 피크닉, 책갈피, 그리고 봄. 그중에 ‘봄’은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다른 단어와 연결될 때 그 싱그러움이 배가 된다. 이를테면 봄바람, 봄밤, 봄꽃, 봄나물, 봄비 같은 것들. 춥고 긴 겨울의 끝자락에서 따스한 기운이 언 땅을 뚫고 피어오를 무렵이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한 발치 앞서 봄 마중을 나선다. 겨우내 비어 있던 나뭇가지에 점을 찍듯 돋아날 이파리들과 살결을 스치는 온화한 바람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저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뿐인데도 코끝이 간질해지고 꽃향기가 느껴지는 공감각적 체험의 시간.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면 신기하게도 성큼, 어느새 지척으로 봄이 와 있다.
“봄은 역시 노랑이지.” 몇 해 전, 큰아이와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릴 때였다. 봄의 풍경을 채색하며 노란 색연필을 고르는 내게 아이가 되물었다. “봄은 초록 아니에요? 녹색이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옆에서 지켜보던 신랑도 아이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봄에는 풀빛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누가 뭐래도 나에게 봄은 노랑이다. 개나리 색 노랑.
오랫동안 살았던 나의 옛 동네에서는 담벼락 위에서부터 봄이 찾아왔다. 아파트 단지 밖 좁은 도로 옆으로 초등학교까지 쭉 이어져 있던 돌담길. 3월, 새 학기가 시작되면 긴장된 마음으로 그 길을 따라 학교를 오고 갔다. 담장 밖으로 뻗어 나온 마른 가지에 초록 꽃망울이 하나 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틈새로 개나리 꽃잎이 얼굴을 내밀었다. 노란 잎이 별처럼 뾰족하게 모서리를 펼치기까지, 보름 정도 걸렸을까? 한두 해, 꽃나무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목도하고부터는 3월이 오면 기쁜 마음으로 개나리꽃이 움트는 과정을 지켜보게 되었다. 순리대로 피어나고야 마는, 이변 없는 성장임을 알아서였을까. 조바심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나무의 변화를 응원했다. ‘힘 내! 볕이 더 따듯해지고 있어!’ 그러면 꽃나무 역시 화답하듯 내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나 잘 자라는 거 보이지? 새 학년, 새 학기, 조금 지나면 너도 익숙해질 거야.’ 그저 꽃일 뿐인데, 이상하게도 위안이 되었다. 불안하던 마음이 기대감으로 바뀌던 순간들. 3월의 개나리꽃은 내게 시작이자 응원이었다.
고개를 꺾어 꽃나무를 올려 봐야 했던 꼬마의 어깨가 나뭇가지에 닿을 만큼 키가 자랐을 무렵, 나는 그 동네를 떠나왔다. 새로운 동네에는 오래된 벚나무 꽃잎이 봄마다 길가에 흐드러졌다. 살랑이는 꽃비를 맞으며 연분홍 아름다움에 취해 있다가도, 어쩐지 아쉬웠다. 그러다 버스 차창 밖으로 우후죽순 솟아있는 개나리꽃을 만나면 그렇게나 반가울 수 없었다. 저 멀리 비탈진 언덕과, 다리 건너 천변에 무리지은 노란 꽃들.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3월에 짊어져야 할 부담감이나 비장함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일상에 새로울 것이 없다는 생각에 허무해지곤 했다. 그런 순간에 싱그럽게 다시 피어난 노란 잎들을 보면 왜인지 불끈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 기분이 좋았다. 무언가를 시작하고 도전하고 싶게 만드는 기분. 샛노란 비타민 가루가 입 안에서 녹을 때처럼 찌릿 전율이 느껴지는 기분. 봄이 왔구나! 비로소 깨닫는 순간, 쳐져 있던 어깨가 활짝 펴졌다.
무채색 아이템만 선호하던 내가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노란색 운동화를 고른 것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응원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연노랑 컨버스 운동화 끈을 바짝 잡아당기고 양쪽 끈을 동그랗게 말아 처음 매듭짓던 날. 꽉 조여진 양 발을 번갈아 탕탕 바닥에 구르는데 이상하게도 익숙한 신발처럼 편안했다. 새 신을 신고 신발 끈을 동여맸을 뿐인데 영험한 부적을 얻은 것처럼 왜 자신감이 차오른 걸까.
그 신을 신고 미국에서의 일상을 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곳곳을 여행했다. 낯선 도시를 걷다 지쳐 고개를 숙이면 노란 운동화가 응원봉처럼 눈앞에서 반짝였다. 흔히들 앞만 잘 보고 걸으면 된다고 말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주저앉고 싶은 순간에 앞보다 뒤를 더 돌아보곤 했다. 출발점이 어디였더라,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그 과정을 되짚으며 다시 걷다 보면 더 낯선 곳으로 나아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또 다른 방향으로도 얼마든지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에 대한 가능성을 놓지 않는 것. 매해 변함없이 피어나던 노란 꽃나무 아래에서 어린 내가 얻은 가장 큰 깨우침이기도 하다. 피고 지고 피었다 또 지지만 반드시 다시 피어난다는 것. 그러니 언제고 새로운 가능성을 펼쳐 시작하고 실현할 수 있다는 것.
언젠가 친구들과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라는 말을 두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유명 개그맨이 ‘늦었다고 생각될 때는 너무 늦은 거다’라고 한 말에서 시작된 웃음 섞인 토론이었다. 그 말이 회자됐던 것은 모두들 맘 속 깊이 ‘사실 늦긴 늦었지, 지금 해도 될까?’ 조금씩 불안함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늦은 시기는 없다는 걸, 지금 꾸는 꿈은 오늘부터 피어나야 할 나만의 제철 꽃망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결국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끝이 될 것인지 시작점이 될 것인지는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것도. 때로 타인의 나이와 위치를 기준 삼아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설 때면 나는 그렇게 봄빛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계절의 경계가 불분명한 이곳 텍사스에도 봄이 찾아왔다. 비록 개나리꽃을 볼 수는 없지만 마음속 노란 꽃그림을 떠올리며 아쉬움을 달랜다. 창문을 열고 숨을 들이마시자 익숙한 봄내음이 느껴진다. 온몸의 감각이 깨어나는 기분을 느끼며 활짝 기지개를 켜보았다. 주저하며 접어두었던 마음을 넓게 펼치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생동하는 봄의 풍경처럼 희망이 자라난다. 신발 끈을 동여매기 딱 좋은 계절, 다시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