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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Jan 17. 2023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이야

나는 순이


옷장 속에서 예전에 썼던 일기장을 발견했다. 반도 쓰지 않은 빳빳한 일기장에는 친구와 싸운 이야기도, 준우라는 꼬마의 엄마를 찾아준 이야기도, 곡절 끝에 취업하게 된 이야기도 있었다. 모두 까마득하고 희미한 추억들이다. 일기장을 넘기던 손이 멈춘 것은 내가 예전에 좋아했던 아이돌 그룹에 관한 이야기였다.


저 무렵은 회사를 그만두고 카페알바를 하면서 이직을 준비하던 시기였는데, 취업이 잘 되지 않아서 다른 친구들에 비해 뒤쳐진다는 걱정에 밤잠을 설치던 때다. 근심이 많던 그때의 나는 최애 아이돌 그룹의 인터뷰에 꽤 감동을 받았던 모양이다. 다른 팀들은 지금의 연차에 대부분 솔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솔로 활동을 못하고 있지 않냐는 질문에 한 멤버가 "데뷔시기가 같은 팀들의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런 생각에 압박을 받지 않고 팀으로 오래갈 수 있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한 것이 인상 깊었다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덧붙여서 인생은 달리기 경주가 아니라 나 혼자만의 산책인데 주변 사람들이 뛰는 모습을 보면 조급해진다고, 느리게 걸으면서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지만 자꾸 지나치게 된다는 심오한 걱정도 가득했다. 5년이 지난 지금 그 말을 했던 나의 우상은 어떻게 되었는지 보니, 그는 팀을 분열시킬 만할 행동을 참 많이도 했다. 그저 임기응변에 강하고 인터뷰를 잘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의미 없는 말에 인생을 돌아아보고, 삶의 의지를 얻고, 그를 동경했던 25살의 나를 떠올려보니 귀엽기만 하다.


저때의 나는 면접을 보러 가면 긴장되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그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세 번 외치고 들어갔고, 30분을 보기 위해서 추위에 덜덜 떨며 6시간을 기다리고도 행복했다. 기꺼이 6시간을 또 기다렸다. 대체 무슨 마음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그때 6시간을 기다려서 받은 포토카드를 판다. 일기장과 함께 상자에 고이 담겨있던 포토카드들은 싼 것은 천 원, 비싼 것은 6만 원도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었다. 귀여운 꽃받침 포즈를 하고 있는 6만 원짜리 포카를 사겠다는 5년 전 나 같은 팬에게 다른 것도 그냥 드리겠다고 했다. 한때는 소중히 모았던 것을 미련 없이 다른 사람에게 주게 된걸 보니 변해버린 마음이 실감 난다. 손바닥만 한 사진을 구겨지지 않도록 포장하면서, 아무런 대가도 없이 쏟았던 마음이 변해버렸다는 사실이 속절없이 슬퍼질 줄 알았건만 어쩐지 후련하다. 허무하거나 낭비한 것이 아니다. 다시 또 무언가를 이렇게 좋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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