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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엠지MZ대리 Feb 22. 2024

언제나 상냥해야 할 이유


헬륨 가스를 가득 집어넣은 풍선 속에 신랄하게 팔딱이는 심장 덩어리를 집어넣은 것처럼, 두개골이 울려댔다. 정수리부터 뒤통수로 이어진 두통은 귀도 먹먹하게 만들었다. 물 속에 얼굴을 처박고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 같이 사람들의 소리가 막연하게 느껴졌다. 한 시간 남짓 사장실에서 회의를 마치고 나오니 누군가가 묻는다.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



내가 할 일은 전부 머리 쓰고 분석할 일들 뿐인데 경험치가 없으니 선뜻 시작을 못한다. '어떤 데이터를 봐야할까, 어디서 데이터를 가져와야 할까, 논리 전개는 어떻게 만들까, 아니지 논리 이전에 먼저 무얼 이야기하고 싶은지부터 정해야하는 게 아닐까. 다른 선배들은 어떻게 일하는거지?' 오른손은 가지런히 마우스 위에 올려놓고 두 눈은 모니터에 고정되어 하염없이 무언가 끄적인다. 그런 생산성 없는 순간을 지내고 있더라도 그 '집중'과 '고민'의 시간이 몇시간이고 이어진다면 한 걸음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텐데, 현실은 녹록치 않다. 몇분이 지나지도 않아 메일이 들이닥치고, 자리에 사람들이 찾아온다. 숨어서 일하고 싶을 지경이다. 두 달여 동안 자리 한번 크게 비우지 않는 날 보던 옆자리 선배는 나보고 쉬엄쉬엄 하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한다.



쉬엄쉬엄 하라고? 나는 들이닥치는 '눈 앞'의 일만 했지, 가치 있는 무언갈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렇게 프로젝트의 중요한 시기가 흘러가고, 나는 '적정 시기'의 업무는 시작도 못하고 눈 앞에 닥친 일들만 하다가 또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 날 퇴근 길, 이대로 모든 일을 때려치우고 퇴사를 한다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다음 날 여러 유관부서가 엮여 각 프로젝트의 진척도를 체크하는 격주 미팅에 참석했다. 마케팅을 제외한 다른 부서가 전부 연구소에 있기에 내가 연구소로 찾아갔다. 서로의 입장과 요구를 주고 받는, 속된 말로 '핑퐁질'하는 논의가 오고 갔다. 그들의 힘 겨루기에 동화되지 않고 업의 본질에만 집중하겠다고 다짐하며 자리를 지켰다. 서로의 지향점을 이야기하고 그 간극을 확인하여 핵심만 논의하고 다음 이슈로 넘어가길 바랬다 (그럴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회의는 초반부터 늘어지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하나하나 따지자는 것이 아닌데, 각 세부사항은 담당자들이 별도로 논의하고 이곳에서는 진척상황 체크와 큰 결정만 하는 자리어야 하는데.. 회의는 종종 딴 길로 세어버렸다. 상대적으로 더 연차가 높은 분들은 회의 시간에 자꾸 자리를 비우곤 한참 뒤에 돌아와 이미 논의가 끝난 이슈를 다시 물어보기도 했다. 머리가 다시 울려대기 시작하고 왼쪽 귀가 먹먹해졌다.


평소보다 더 좋지 않은 분위기로 회의가 이어졌다. 길고 긴 회의가 끝나고 내 직속상사가 아닌 엔지니어 쪽의 상무가 나를 부른다. 마치 방금 전 회의에서 있었던 그들 사이의 힘겨루기에서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듯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심지어 업체의 비리 의혹설까지 거론하며, 근거도 없는 위험한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 분과 나의 직급 차이 이전에 앤지니어 담당자와 마케팅 담당자로써 사실로 확인된 내용들로 협의하고 싶었으나, 그건 나만의 아름다운 파라다이스요 상상속 동화나라였다. 더욱이 큰 소리로 사무실이 떠나가라 자기 주장을 설파하니, 사무실 밖에선 내가 혼나는 줄 알았단다.



대화를 마치고 나오니 이미 내 머리는 과포화 상태였다. '정말 다 지겹네'하고 생각했다. 자리에 돌아와 메신저를 보니 이전 부서 선배가 퇴근하며 메신저를 보내놨다. "퇴근하고 저녁 해먹기 귀찮으면 우리 집에 와~ 비빔국수 해줄게" 같은 동네에 사는 선배였다. 내가 혼자 사는 걸 알고, 같은 부서에 소속된 동안 가장 많이 챙겨주신 고마운 선배였다. 퇴근하며 상무님 자리에 불려가 몇십분동안 언쟁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선배는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주차장으로 나오며 카톡을 보냈다. 감사하지만 오늘은 집에 가서 쉬고 싶다고. 선배는 위로의 말을 건네며 마음 바뀌면 언제든지 오라고 덧붙였다. 서수지 IC 앞에서 눈 앞의 벤츠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들이받을 뻔 했다. 조수석의 짐이 전부 와르르 쏟아졌고, 그 순간 머리 속의 가느다란 실이 탓!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났다. 선배에게 카톡을 했다.


"저 마음 바뀌었어요. 서수지 IC에요."


나를 '베이비시터'로 알고 있는 아파트 경비아저씨가 문을 열어주고 선배네 아파트에 주차를 했다. 갑작스럽게 오느라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가방을 주섬주섬 뒤져 손바닥 만한 카드 지갑에서 만원짜리 두 장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선배 집에 도착하니 최근에 리모델링을 해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집안 풍경에 마음이 말랑이기 시작했다. 선배는 비빔 국수가 들어간 유리 그릇에 양념을 치며 나를 맞이했다. 언제나 수줍은 듯 예의바르게 꾸벅 인사를 하는 선배의 아들도 반가웠다. 먹던 라면을 마저 먹고 방으로 들어가는 선배의 아들을 쪼르르 따라 들어가 챙겨온 이만원을 주머니에 찔러주었다.



가족들 먹을 국수 만들며 내것을 조금 더 만드는 줄 알고 왔는데, 온전히 나를 위해 선배는 국수를 삶고 있었다. 예쁘게 그릇에 담아 건네며 케일주스와 귤 당근 주스를 내어 주었다. 사실 스트레스가 올라와서 감자튀김 같은 걸 먹으려다가 좋지 않은 기름을 섭취하면 신경이 더 예민해질 것 같아서 고민했었다. 그런데 매콤한 국수와 건강한 야채와 주스들을 배불리 먹으니 방금까지 주글주글했던 정신의 주름이 쫙 펴지는 느낌이었다.





퇴근 운전 길에서 머릿속에 파드득 거리는 수천마리의 나비떼를 입으로 쏟아내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는데, 도대체 누구한테 전화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전화할 사람이 없었다. 결국 전부 회사일 아닌가? 이런 걸 누군한테 말한단 말인가. 회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하나 배경까지 설명하고 등장인물의 캐릭터까지 설명하며 이야기하다간 숨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런데 때마침 선배가 날 불러준 것이다. 회사에 대해 잘 알고, 함께 일했기에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잘 파악하고 있으며, 나에 대해서도 잘 아는 사람이.



선배는 국수를 맛있게 먹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조잘 거리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렇게 이삼십분 남짓 내 이야기를 다 토해냈을 때 즈음, 선배가 나를 등떠밀며 얼른 집에 가라고 한다. 혹여 눈치 보며 앉아 있다가 내가 되려 피곤해질까봐 염려한 것이다. 가져갈 간식까지 챙겨주며 나를 배웅해주었다.


주차장으로 내려올 때 즈음 이미 내 스트레스는 전부 사라져있었다. 머릿속에서 전쟁을 벌이던 나비떼는 사라진지 오래였고 텅 비었던 가슴 속에는 행복하고 따스한 오렌지 빛 기운이 가득했다. 선배의 작은 배려가 한 사람 하루의 끝을 180도 바꿔 놓았다.


우리가 언제나 다정해야 할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의 사소한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가 닿을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작은 무심함이 상대에게 잊지 못할 큰 상처로 닿을 수 있고, 아주 작은 선행이 한 사람의 라이프세이버가 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언제나' 다정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그렇게 몇 년 전 어느날 했던 단상을 다시 기억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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