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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엠지MZ대리 Jul 05. 2024

#01 프로포즈 없는 프로포즈

24.01.12



나에겐 오랫동안 진행해 온 연말연시 의식이 있다. 한 해를 돌아보며 이룬 것과 아쉬운 것을 적으며 결산하고 신년의 목표와 다짐을 적는 것이다. 어차피 늘 하는 일이긴 했는데, 이번엔 남자친구에게 같이 적어볼래 하고 제안했다. 제안을 하면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는 선뜻 알겠다고 했고 심지어 좋은 생각이라는 의견까지 덧붙였다. 어쩌면 나는 그를 향해 커져만 가는 마음과 궁금증을 글로 나마 엿보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학창시절 아마도 그랬을 것처럼 성실히 적었다. 글이 완성되면 서로 교환하여 보여주기로 했고 노션에 각자 글을 올리기로 했다. 업로드된 글을, 나는 몰래 숨겨둔 초콜릿을 먹는 것처럼 달콤하게 그리고 탐욕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한 해의 결산글을 쓴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넘버링을 한다. 가령 ‘1번 자산, 2번 독서’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 역시 이렇게 넘버링을 했는데, 1번이 내 이름이었다.


1번 YJ.



내가 제안한 글쓰기였기 때문인지, 2023년 한 해에서 내가 가장 중요한 변화였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1번의 자리를 독차지했고 그 자리가 꽤 맘에 들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내가 1번이 된 이유를 굳이 알아내지 않기로 했다. 1번 글엔 우리가 처음 만난 날짜와 그 날짜를 기점으로 남자친구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가 그의 관점으로 적혀있었다. 관계에 약간의 회의감을 내비쳤던 과거에 대한 의미심장한 몇몇 문장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미래를 기대하는 문장이 붙어있었다. 그 문장을 나는 리본 매듭이 지어져 있지 않은 선물이자 결혼하자는 말이 없는 프로포즈로 받아들였다.


1월 12일은 내 생일이다. 생일날 남자친구가 정성스레 준비한 것들을 즐기며 우리는 평소보다도 더 붙어있었고 오래 함께했고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미래계획은 재정 계획으로, 재정 계획은 거주 계획으로, 거주 계획은 결혼 계획으로, 자녀 계획으로…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화가 흘러갔고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다. 그날 내 눈에 남자친구는 평소보다 와인을 조금 더 많이 그리고 빠르게 마셨다.


생일의 주말이 끝나갈 때 즈음 남자친구가 노트에 ‘2024’ 라는 숫자를 적어 식탁에 앉아 있는 나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우리의 계획. 계획을 말하자는 거구나. 나는 커리어며, 자기계발이며 나의 신년 목표를 적어가며 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재정계획을 발표하려는 순간, 남자친구가 결혼 계획을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다.


그렇게 우리의 결혼 준비는 시작되었다. 나와 결혼해줄래. 그런 말은 없었지만, 우리가 사귀기 시작했을 때처럼 나는 그에게 그런 확언들을 필요로 하거나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느끼는 마음이 확실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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