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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엠지MZ대리 Aug 12. 2024

#08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24.03.05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사지가 잘린 것처럼, 어떤 의지가 사라졌다. 신체적 피로일까 싶었지만 나보다 조금 앞서 결혼한 친구에게 물어보니 단번에 이해한다. 내가 무기력하며 다소 우울감을 느끼는 이유는 난생 처음 겪어보는 삶에 대한 주도권 박탈이 원인이었다.



K장녀



이 단어를 떠올렸을 때 그 누구보다 대표적인 페르소나는 바로 나 자신이라 여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나는 내 욕망과 책임감을 자주 혼동하며 자라왔다. 진학할 대학을 고를 때는 통학할 수 있는 거리를 고려했고, 취업이 잘되는 학과를 선택했다. 물론 약간의 타협을 한 것이지 전적인 선택을 상황으로 인해 하진 않았지만 책임감이라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선택을 내린 건 맞다. 이러한 성장 배경에 대하여 좋고 나쁨을 논하던 단계는 이미 20대 초반에 마쳤다. 말하고 싶은 건, 성장 배경 덕분에 나는 반강제적으로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지며 그것이 당연한 사람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몰고 다니던 자가용을 갑자기 폐차시키고 남자친구의 차에 보험을 등록하는 일은, 반갑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조만간 이사를 해서 살림을 합치게 되면 내 차를 처분하고 차를 한대로 운용할 생각이긴 했다. 어차피 예정된 일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불편해졌을까. 단순히 시기가 앞당겨져 그런 것이 아니라, 내 결정과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의와 상황에 의해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사실 자동차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런식으로 내 욕구와 취향을 조금씩 포기해왔다. 그동안은 내 인생이라는 프로젝트의 리더이자 주연은 오로지 나 혼자였다. 이곳에서 내린 결정으로인한 칭송도 비난도 오로지 나만의 것이었다. 그런데 결혼이라는 사이드 프로젝트가 생겼는데, 갑자기 주조연급의 등장인물이 생긴 것이다. 예비남편, 양가 부모님과 가족들 그리고 하객들까지. 다양한 등장인물과 상황을 고려하여 ‘합리적’인 결정이라는 명목 하에 나는 여러 가지 결정에서 조금씩 티나지 않게 내 욕구와 취향을 포기해왔다. 어쩌면 내 마음 속에는 양보의 그릇이라는 것이 있고 제한된 용량이 있는데 조금씩 퍼내어 쓰던 양보의 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걸까.



상황때문이든 인물때문이든 주도권을 잃은 상황이 불편했다. 여자는 출산할 때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임신 중에 우울한 이유는 본능적으로 과거의 나와 이별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직감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출산이 아니라 결혼 전에도 어느 정도 과거의 나와, 정확히는 과거의 선택방식, 욕구 그리고 취향과 이별해야 함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생경하고 낯선 이 느낌도 결국 익숙해지는 시기가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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