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0일. 지난 주말에 상견례를 가졌다. 상견례를 기다리는 동안 긴장을 많이 했는데, 이렇게 긴장을 많이 하면 실전에서는 오히려 긴장이 덜할 것이라는 미신같은 생각도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긴장한 나의 상태와 달리 상견례 자체는 무난하고 순탄하게 흘러갔다. 대학시절부터 사회생활을 이어오는 지금까지 각종 무대에서 발표, 사회, 통역까지 수차례 경험한 나지만 이 날은 사소한 말 한마디도 쉽게 튀어나오지 않았다. 양가 부모님과 가족들 모두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오랜 침묵이 이어질 때, 남자친구는 우리 결혼 진행 상황을 공유하기도 하고 우리 부모님에게 질문도 해 가면서 분위기를 잘 윤화시켰다. 남자친구의 어머님 아버님도, 나도 깜짝 놀랄만한 그의 행동이었다.
상견례를 마치고 각자의 가족들은 돌아가며 가벼운 감상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곤 집으로 모여 디저트를 먹고, 못다한 이야기도 나누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우리 가족은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아이스크림이나 먹자”하는 누군가의 말에 마트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서 집으로 왔다.
결혼을 준비하는 모든 커플이 거쳐가는 단계일 뿐이었다. 단지 주최자가 나라는 이유로 뭔가 특별하고 다를 것이 없다는 당연한 사실에 새삼 느껴지는 좌절감은 뭘까. 어릴 때부터 나는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여겨왔다. 한번은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엄마. 이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아. 내가 주인공이고 모든 사람들은 나라는 주인공을 위해 존재하는 조연이야.” 진심으로 믿는 바를 말할 때 우리는 종종 무례해지기도 한다. 그런 나를 엄마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딸이 그렇게 생각했구나.” 그 대답이 당시 내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았다. 엄마가 긍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건 최선의 대답이었다. 긍정하면 정말로 다른 사람 따위는 조연으로 치부하는 교만한 아이가 될 수 있고, 그렇다고 부정하면 아이는 상실감을 느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대신 엄마는 수용을 선택했고 서른이 지난 지금의 나는 그 대답이 옳았음을 깨닫는다. 요지는 나는 어릴 적부터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겼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결혼식이 평범하며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절차들을 밟아나가는 것에 이해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는 것 아닐까.
김연아 전직선수나 다른 유명 연예인들의 결혼식이 다소 호화롭다는 점을 제외하고 일반인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놀랄 때가 종종 있다. 결혼식이라는 것의 보편성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나라의 특징일까. 어떤 특별한 결혼식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내 삶이 결국 표준치로 조정되어간다는 점에서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허탈한 점은 이런 감정 역시 지극히 ‘일반적인’ 감정이라는 사실이다. 알랭드보통은 이러한 인지오류를 정확히 깨닫고 있었던 듯 하다. 그는 그의 저서 중 한 곳에서 우리 시대의 남녀관계를 지배하는 통념을 매섭게 꼬집은 바 있다. 우리 시대의 남녀는 ‘이상적인 사람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위한 ‘특별한’ 인연의 존재를 믿는 것인데, 이는 내가 앞서 어릴 적부터 나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것과 나의 삶은 보편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교만과 결을 같이 한다. 훌륭한 저자가 그러하듯, 알랭드보통 역시 일침을 가한 뒤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상적인 인연을 찾는 것에 혈안될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옆에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치열하게 연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단계별로 느끼는 소회와 감상을 우수수 활자로 떨어뜨리고 나면 문득 허무하다. 털어놓고 보면 별거 아닌 말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 연재도 그렇다. 나라면, 내가 준비하는 결혼에서의 이야기라면 뭔가 남다를 줄 알고 쓰기 시작했나. 중요한 건 내 삶이 혹은 내 결혼식이 얼마나 특별한지 가늠하는 것이 아님을, 중요한 건 결혼의 주최자인 ‘우리’가 인생의 다음 장을 잘 준비하는 일임을 별것 아닌 평범한 감상들을 쏟아낸 후에야 다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