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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엠지MZ대리 Sep 02. 2024

#13 환승이별

24.04.09



“OO씨, 오늘 표정이 밝네요.”


“사실 오늘 제가 이사갈 집 동호수 추첨하는 날이거든요.”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던 그 날은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동호수를 추첨하는 날이었다. 당시까지만해도 용인의 연구소에 근무하던 나는 마침 서울 본사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었고, 동호수 추첨에 직접 참여할 수 없어 남동생을 대리자로 임명하여 추첨에 참여했다. 초조한 마음반 설레는 마음반으로 현장에 있는 동생의 연락을 기다렸다. 마침내 메시지가 왔다.



‘102동 709호’



원하던 숫자의 차차차차차차차순위 정도의 동호수였지만, 아무렴 어떤가. 대학생 때부터 기숙사, 고시원, 원룸 생활을 전전하던 나에게도 드디어 ‘집’다운 장소가 생겼다. ‘102동 709호’라는 숫자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첫 연애의 시작일이나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유선 전화번호 같이 나에게 지울 수 없는 숫자가 되었다.



원룸 생활이라는 것은 많은 바를 시사한다. 평균 2년 단위로 옮겨 다녀야 하는 일, 3평이든 7평이든 방의 크기에 맞춰 살림을 조절하는 일, 그래서 취향껏 살림을 늘릴 수 없고 작은 가전 하나를 들이는 일에도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일, 건조기가 없는 집이라면 빨래 건조 공간과 그로 인해 줄어들 생활 영역을 감내하는 일 등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널따란 거실과 침실이 있는 집으로의 이사는 나에겐 엄청난 권한 부여가 된 느낌을 주었다. 가구 하나, 소품 하나 오랜 시간을 들여 골랐다. 그렇게 조금씩 공간을 채워갈수록 애정도 커져갔다.




퇴근 후 집으로 귀가하는 길, 괜히 집에 가기 주저한다. 우리 신혼집이 될 남자친구 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며칠 만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때마침 수선 맡긴 가방과 구두가 있어 백화점에 들렀고, 볼 일이 끝났는데도 이 가게 저 가게 걸음을 옮기며 귀가를 지연시킨다...


오랜만에 들어간 집에는 지난 며칠 동안 잊고 있던 일들이 증거물처럼 남아있다. 당근 거래로 받아온 이사박스들, 마지막 외출 전에 급하게 외출복을 교체한 흔적, 건조대에서 옷장으로 들어가지 못한 빨래 같은 것들. 오늘도 나는 정확히 말하자면 ‘집에’ 온 것이 아니라 ‘짐을 가지러’ 온 것이었다.  바삭하게 마른 화장실, 복도 바닥의 먼지들, 애써 외면하고 싶어도 눈에 밟히는 증거들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불편해진다. 오늘은 짐을 더 싸야지, 다짐하고 커다란 이사 박스를 바라본다. 오늘도 한 박스 만큼만 챙겨보자 다짐한다. 좋아하는 식기류 몇 가지와 당장 입을 옷가지를 몇 벌 챙겨 넣으니 한 박스가 금방 찬다. 끙차, 하고 양손으로 들어본다. 이 정도면 지하주차장까지 혼자 나를 수 있다. 그렇게 상자 포장을 마치고 샤워를 한다. 조금 더 꼼꼼히 그리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몸을 씻어낸다. 마침내 할 일들을 끝내고 소파에 털석 앉아 스마트폰을 본다.



할 일을 다 마쳤을 때 탐닉하는 것들은 얼마나 달콤한가. 나에겐 그 달콤함이 바로 이 순간이다. 이어야 하는데… 어딘가 불편하다. 미간에 힘이 살짝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차분하지 못하다. 책장을 칸칸이 살피며 먼지처럼 떠다니는 마음에 분무기처럼 마음을 촉촉하게 해줄 활자를 찾는다. 체한 사람이 다급하게 소화약을 찾듯이 눈동자도 손짓도 다소 분주하다. 성과 없는 책들만 소파 위에 한 권, 두 권 쌓여간다. 결국 책으로부터 집중력을 돌려받지 못한 나는 다시 스마트폰으로 향한다. 컨텐츠를 소비해야 한다. 먼지 같은 시간을 어떻게든 채우기 위해서 스마트폰을 잡는다. 좋아하는 유튜버 오원님이 마침 영상을 업로드했다. ‘환승이별이라니? 언제 연애를 하신건가?’ 호기심이 자극되어 영상을 클릭한다. 제주 요가 여행을 담은 그 영상은, 사실은 오랫동안 살아온 집과 이별을 준비하는 영상이었다. 이사를 결정한 과정, 그리고 그에 따라 함께 움직이는 마음선들. 그의 고백을 ‘집중해서’ 듣고 있는데 갑자기 내 눈물샘이 딸깍 하고 켜진다.



“(계약을 하고) 돌아와서 집을 바라보는데 집한테 미안한 거에요.”



우리는 종종 타인의 입과 시선을 통해서 솔직해지곤 한다. 나는 내 집에게 미안했다. 6년 동안 나에게 좋은 추억을 많이 안겨줬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나를 품어준 나의 공간에게 나는 도무지 어떻게 이별을 말해야 할지 몰라 애써 외면만 하고 있었다. 두 살림 운영이 힘들다며, 결혼 준비로 바쁘다며 집을 방치했고 그것을 정당화 했다. 사실 나는 그저 이별 준비가 두려웠던 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오원님은 매일 집에서 똑같은 앨범을 틀어 놓고 집과의 이별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나 역시 그런 앨범을 선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별이 서툰 나에게, 6년 동안 나에게 한결같이 다정했던 나의 집에게, 나만의 다정한 방식으로 이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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