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인생영화 <너와 나>를 본 후기. 진심 어린 습윤한 영화.
감독: 조현철
각본: 정미영, 조현철
장르: 드라마
줄거리: “오늘은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수학여행을 하루 앞둔 오후, 세미는 이상한 꿈에서 깨어나 하은에게로 향한다. 오랫동안 눌러왔던 마음을 오늘은 반드시 전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넘쳐흐르는 마음과 달리 자꾸만 어긋나는 두 사람. 서툰 오해와 상처를 뒤로하고, 세미는 하은에게 진심을 고백할 수 있을까? (왓챠)
목차: 1. 후기 2. 좋았던 점 3. 아쉬웠던 점 4. 평점
훌륭하다고 하기엔 전반이 미흡하고, 미흡하다고 하기엔 후반이 훌륭한 영화였다. 주제는 다층적이었고, 후반부로 갈수록 연출, 호흡, 연기, 플롯이 강렬하게 펼쳐졌다. 결론적으로 꽤 마음에 든 영화였다.
나는 전반부가 심심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그러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전반부가 무지하게 느린 영화들이다. 내 인생영화인 <고령가소년살인사건>도 그렇고, 2024년에 본 영화 중 최애인 <카일리 블루스>가 그랬다. 이 영화도 전반부는 마음에 썩 들지 않았으나 후반부는 나의 기존의 평을 뒤엎기 충분할 정도로 세심하게 와닿았다.
영화가 마음에 든 건 감정이 이끄는 영화였다는 것이다. 작가의 진정성과 연출 능력(성의), 그리고 배우의 퍼포먼스가 이뤄낸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는 좋건 나쁘건 논리가 후에 맴돌고, 그 논리를 바탕으로 평가를 정하게 된다.
근데 몇몇 영화는 논리와 별개로 감정이 맴돈다. 영화를 감상한 후 '아이디어'보다 '감정'이 크게 남아 있을 때는, 다른 부분들이 사소하게 느껴진다. 나는 감정적으로 동요되는 일이 드물어서 논리가 이끄는 영화를 선호하지만, 감정을 유발하면 후해진다. 뭐 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감정의 유발은 생각할수록 페이스pace가 결정적인 것 같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다. 내게는 페이스가 유기적이지 않으면 영화는 설득력을 잃는다. 모든 요소가 자유분방해도 페이스만큼은 유기적이어야 한다. 리듬의 일관성과는 별개인 문제다. 일부는 창작자가 작품을 페이싱하는 것만큼은 직관의 영역이라 하고, 다른 일부는 이 또한 계산의 영역이라고 한다. 어떤 게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너와 나>에서 박혜수 배우님의 연기는 인상적이었다. 영화란 오로지 한 장면만이 진실돼도 호소력을 갖는다. <너와 나>는 잔잔한 영화이지만 그런 강렬한 장면이 존재했다. 그래서 점점 비판적인 시선을 접어두게 되었다. 박혜수 님이 표현한 세미가, 자기중심적이지만 하은을 사랑하는 모습이 참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결코 이 싱그러움이 과장되지 않은 걸 알았기에, 정말 다시금 4.16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의 생각에 깊이 슬퍼졌다.
일부 사람들은 이 영화가 세월호 사건을 다루는 방식에 비판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실화를 작품에 차용할 때 반드시 존재하는 문제를 규탄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작품의 감정적 효과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지탄할 만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며 만든 이들이 이 참사로 희생된 이들에 마음 아파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 영화는 음악과 영상미도 훌륭했다. 특히 음악이 발군이었다. 무드를 적절하게 형성하면서도, 지루한 전반부에 흥미를 유지시켜 주었다. 또한, 영화의 과한 노출과 뿌연 화면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여름의 강렬한 빛과 습기가 느껴져서 마음에 들었다. BIFF 2023에서 본 <블루 송>이 떠오르기도 했다.
영화라는 시청각적 매체에서는, 이야기와는 별개로 화면이 흥미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뭐 규칙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신념이고, 내가 생각하기에 도리이다. <너와 나>는 비록 일부 숏이 다소 뻣뻣하게 느껴졌지만, 롱숏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전반적인 영상미가 꽤나 취향에 맞았다.
그리고 쓰면서 생각났는데, 박혜수 배우님이 노래방에서 체념을 부르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감정이 차오른 그녀의 삐죽삐죽한 표정이 뇌리에 깊게 남았고, 노래방 화면에 등장하는 그 둘의 영상과, 열창하는 세미의 얼굴을 길고 가까이 잡은 그 장면이 특히 좋았다.
물론 아쉬웠던 점도 있었다. 제일 아쉬웠던 건 이야기는 생생한 것에 반해, 조연 캐릭터들은 죽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각 조연들의 대사와 말투, 화법이 지나치게 유사해서 밋밋했다. 캐릭터의 목소리가 아니라 작가의 문장처럼 느껴졌다. <너와 나>에서는 롱숏이 많고, 캐릭터들이 전경이 아닌 배경에 자주 배치되기 때문에 대사가 캐릭터성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다. 이 영화에서는 조연들이 분위기와 긴장감을 위한 소모품에 불과했다.
또한, 전반부의 긴장감이 인위적으로 쌓이고 있다고 느껴졌다. 소통의 단절과 반복되는 마찰로 텐션을 쌓아가려 했지만, 세미의 친구들의 감정선은 너무 일관되게 고조되어 있었고, 갈등에 대한 반응도 다 비슷했다. (하은 제외) 세미만큼은 입체적이었지만, 나머지 조연들은 그저 감정적으로 과잉된 모습이 반복되었고, 그로 인해 몰입이 깨지는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개개인의 경험이 다르겠지만, 공감하기 어려운 여고생의 초상이었다.
데뷔작이라 그런지 정제되지 않은 오리지널리티가 상당 부분 느껴졌다. 조현철 감독님의 다음 작품은 얼마나 더 훌륭해질지 기대가 되면서도 이런 오리지널리티가 부디 남아있기를 바라게 되는 마음이다. 뭐랄까 여기저기 '진심'이 느껴지고 와닿았다. 그래서 비판적으로 보던 내 잣대들이 무너졌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그런 영화를 정말 높이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