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할아버지한테 “너는 배우 해도 되겠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그 말을 들으면 나는 거울로 다가가 눈물을 흘리는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빨간 눈 핏줄을, 분홍색 코 끝을, 힘껏 내려간 양쪽 입술 끝을. 그러고는 각 부위에 더 힘껏 힘을 주고는 기어코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노력했다. 할아버지 집에서 하루 자고 가기라던지, 문방구에서 파는 장난감이라던지, 언니가 먹고 있는 달달구리라던지.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얻어낸 날은 많지 않았다. 거의 실패한 날이 많았다. 그러면 나는 그냥 눈물을 즙처럼 짜는 아이로 남아 갈망인지 원망인지 모를 감정을 뒤섞여 눈물짓는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눈물이 없어지는 과정이라 했던가. 더 이상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온 얼굴에 힘을 주지 않는다. 대신 계속 계속 원하는 바를 회피한다. 숏폼을 계속 보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이며 화면을 내림으로써. 욕망을 감춘 자리에 허망이 들어서면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곤 한다. 하지만 그 눈물이 어디서부터 나왔는지 나도 모른다. 귀여운 토끼가 무력하게 숨을 허덕이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우는 건지, 그 영상을 무기력하게 넘기는 내가 불쌍해서 우는 건지. 어찌 되었든 나는 울기 시작하면 남자친구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우는 내 모습을 보여준다. 그 통화에서 남자친구는 우는 내 모습을 보고 귀여워하거나 당황해한다. 그런 반응을 보며 나는 왼쪽 하단 보이는 우는 내 얼굴을 본다. 어렸을 때와 같이 빨개진 눈에, 분홍색 코 끝을, 잔뜩 내려간 양쪽 입술 끝을.
“또 울어?”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면 지겹다는 듯 말하지만, 나는 우는 내 표정이, 눈망울이, 콧구멍이, 벌게진 볼이, 그리고 그 눈물을 기어코 만들어 내는 내 힘이 좋다. 왜 우냐는 물음을 들고 우는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울음 속에 내 기대와 애정이, 분노와 가여움이, 선망과 용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욕망을 위해 울던 어린아이는 주토피아 속 불길을 보며 용산 철거민이 생각나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계단을 올라가는 아이의 모습에 찬란할 앞길을 응원하는 눈물을 흘리고, 가고자 하는 길에 다다르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위로하고자 눈물을 흘린다. 감정의 끝이 눈물로 이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진실한 감정 표현이기 때문이다. 윗사람을 위해 억지로 웃기도, 주위 사람으로 억지로 분노를 보내기도 하는 수많은 거짓 표현들 사이에서 유일한 진실. 그 눈물을 분출함으로써 나는 내가 아직 무기력에 주저앉지 않았음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는 눈물을 흘린다. 오늘도 그 눈물의 이유를 모른다. 그래도 눈물을 막지 않고 울어낸다.